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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가 내리는 장소 (벧전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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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필재 목사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구원" "은혜" "감사" 그런 단어들입니다. 오늘 이렇게 교회를 찾아오신 여러분들의 영혼에 질문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왜 여기에 오셨는가?" 제일 쉬운 대답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은혜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사실 예수 믿고 사는 기쁨이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은혜를 누리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방면의 은혜든지 은혜를 입고자 늘 소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을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이 은혜의 개념 설명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 어원에서는 이 '은혜'라고 하는 말은 어찌나 많은 말로 해석이 가능한지 무궁무진한 뜻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흔하게 통용하는 말이 "값없이 받는 것"인데, 만족도, 행복감, 즐거움, 부드러운 애정, 자비, 사랑, 동정, 기쁨, 아름다움... 이것이 다 포함된 말이 '은혜'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구체적으로 우리 신앙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면, 여러분들이 오늘 교회에 오셔서 설교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이 감동되었다고 합시다.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혹은 우리 몸에 질병이 있다가 건강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건강하게 되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말하잖아요? 어떤 때는 우리가 가난하게 살다가 풍성하게 살 수 있는 가난에서의 해방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소?"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쉽게 우리가 말을 합니다. 어떤 때는 이웃관계나 부부관계가 불화 하다가 아주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이 없던 사람이 또 믿음이 생겼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말한다면 "아, 당신이 어떻게 목사가 되었소?"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나쁜 습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음주, 도박, 마약, 절도, 강도, 퇴폐 등등... 이런 것들을 다 청산하였을 때 "아니, 어떻게 그렇게 깨끗하게 청산하셨소?" "내 힘으로 안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었소." 교회가 부흥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흥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중요한 의미를 우리가 생각해야만 우리가 은혜를 은혜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은혜는 좁은 면의 은혜와 넓은 면의 은혜가 공존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지금 나쁜 상태에서 좋은 상태에로의 변화는 좁은 의미의 은혜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지금 내게 매우 좋은 것이 있어요. 이것이 나빠졌어요. 그러면 그것은 저주인가? 이것은 넓은 의미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것은 나빠지고 영적인 것은 좋아지는 경우입니다. 잘 살던 사람이 별안간 사업이 망해서 가난해 졌습니다. 그러면 저주받았는가? 그 사람은 사업의 실패와 더불어서 신앙이 더 좋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의 사업 망함도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저는 제가 경험한 목회에서 경험한 일들이 많아요. 어느 젊은 30대 초반의 부인이 어린 아이 한 명을 데리고 사무실에 찾아와서 한없이 운단 말이에요. "아니, 이야기를 하고 울어야 나도 같이 울지, 이야기도 안하고 혼자 울면 어떡합니까?"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편이 지금 총을 맞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우리 남편은 한번도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가 교회에 나가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결혼하고 지금까지 가장 열심히 한 일이 있다면 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많이 기도를 하고 온갖 서비스를 하면서 주일날이 되면 교회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남편은 나는 안 간다고 하면서 헌금까지 주면서 혼자 갖다 오라고 하니 영 전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의 마음으로부터 포기하는 상태에 있었는데 아, 이번에 큰 사고를 만났습니다."

미국에는 갱단 같이 아주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 타고 지나가면서 길거리에 있는 사람을 총으로 막 쏘며 지나가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젊은 친구는 이민 가서 열심히 노력해서 자기 가게를 하나 내놓고 그날 아침도 새벽에 일찍 가서 자기 가게 앞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총을 쏴서 척추를 맞았어요. 이 사람은 이제 끝난 것입니다. 죽지는 않았는데 병원의 진단은 "평생 일어나지 못합니다. 평생 휠체어를 타고 살아야 됩니다. 치료는 끝났습니다. 나가십시오." 하루  아침에 젊은 30대 초반이 이런 진단을 받았으니 이 청년이 목사님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며 평생 처음으로 목사를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목사님!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그래요. 갑시다." 그래서 목사님 몇 분과 함께 급히 심방을 갔어요. 이 청년이 침대에 누워있어요. 총을 붙잡고 한없이 울면서 나한테 이렇게 말을 했어요. "목사님! 제 아내가 그렇게 교회를 가자고 해도 내가 안간 사람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 "그래요. 도와줄 수 있어요. 당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어요. 내 말을 잘 들으세요." "듣겠습니다. 목사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내 한가지 소원이 있어요. 지금 내 진단은 평생 일어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일어나서 다리 하나만 쓸 수 있으면 그래도 내가 목발을 짚고라도 교회에 갈 수 있으니까 하나만 쓸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해주는 건 내가 아니고 의학의 판단이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의학은 판단은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기적적 은혜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그것을 기대하고 당신도 나도 또, 우리 주변 분들도 열심히 기도하기로 합시다. 약속하겠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나가라고 해서 나왔어요. 6개월 동안 누워서 대소변 받아내면서 6개월만에 양쪽에 목발을 짚고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는데 성공했어요. 또 6개월 지나니까 목발 두 개 짚는 것 가운데 하나를 버리고 하나만 짚고도 일어날 수 있게 됐어요. 또 6개월 지나니까 목발 버리고 지팡이 하나만 짚고 간신히 지팡이 의지해서 바깥출입을 할 수가 있었어요. 또 6개월쯤 지나니까 그것 마저 버렸어요. 혼자 걸을 수 있게 됐어요. 그 다음에 한 2년 반 이상 지나니까 완전히 회복이 되었어요. 뭐, 그 다음에는 스포츠카를 사더라고요. 가죽 잠바를 사서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베토벤의 '운명'을 들으면서 교회에 오더라고요. "당신 나하고 약속했지? 한발만 쓸 수 있게 되면 평생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그러니까 그거 잊지 말고 평생 사세요." "그럼요, 그렇게 하고 말고요." 그분이 교회 제일 일찍 와요. 새벽 1부 예배에 나와서 아주 열심히 봉사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 면에서 보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사람인데 총 맞는 고난을 통해서 영혼도 육신도 구원받았으니까 총을 맞은 것이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가 곧 행복입니다. 은혜를 떠나서는 살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가 받으며 누가 받지 못하는가? 오늘 말씀에 나와있어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여기서 이 "대적"이라는 말의 뜻은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향해서는 전쟁을 하신다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하고 전쟁할 사람은 교만하십시오. 제가 목회 하면서 지금까지 깨달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두 가지를 성경에서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죄는 하나님의 진노가 빠릅니다. 두 번째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참지 아니하시고 진노하시는 두 가지 죄가 그겁니다.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 상식 수준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작은 일은 안 하려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아무리 작아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잘합니다.

저 같은 목사의 경우 부흥회를 좀 다니잖아요? 제가 옛날 LA에 있을 때 신문을 봤더니 한국의 큰 대형교회 목사님이 LA부흥회를 하러 오신다고 신문에 광고가 났기에 '아! 잘됐다!' 그때 우리 교인이 100명도 안 모이던 초창기 시절인데 '오시는 김에 우리 교회도 좀 덕을 보자!' 한국에 전화를 걸어서 요청을 했어요. "시간이 있으시면 하루도 좋고 이틀도 좋으니 저희 교회에 오셔서 연장 부흥회를 해주십시오." "교인이 몇 명이냐?" "아직 100명도 안됩니다." "안 간다!" 아니, 부흥 안되었으니까 부흥회 하는 거지... 그때 저는 시험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이 다음에 대형교회 목사가 된다면 작은 교회 부흥회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그런데 대형교회가 되었단 말이에요. 교인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나는 작은 교회 부흥회를 다니겠습니다." 그게 또 테이프로 온 세상에 퍼졌네요. 아, 사방에서 전화가 오는 겁니다. "테이프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니까 약속한 대로 오십시오." 이렇게 다 퍼졌으니 어떻게 해요? 하나님하고 또 약속한 건데... 그래서 저 루지애나의 아주 조그만 시골 교회에 한국 목사님이 섬기고 있다고 해서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교인이 몇 명이 되기에 그렇게 작다고 하십니까?" "저까지 20명입니다." "아, 그러면 가겠습니다." 그리고 가서 공항에 내렸더니 나를 만나자마자 첫마디가 "사실은 12명입니다." "아니, 그러면 왜 8명을 속이셨습니까?" "차마..." 그래서 12명을 놓고 열심히 하자고 부흥회를 했는데 무슨 설교를 했느냐 하면 성경에 12 숫자만 얘기했습니다. "12제자가 얼마나 좋으냐, 하늘 아래 12지파가 있고, 12보좌가 있고..." 하여튼 12를 다 갖다 대고 12가 제일 좋은 것이다. 열심히 부흥회를 했는데 아, 3박 4일을 했는데, 글쎄 100명이 되었어요.

어쨌든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크고 작게 보지를 않습니다. 작은 일도 열심히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남의 약점이나 인격에 흠집내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집 부부싸움을 하면 바빠진다니까요. 남의 약점을 선전해야 되니까... 어쩌다 무슨 나쁜 소문을 들으면 그것을 선전하느라고 야단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그런 남의 흠이 새어나지 않도록 감싸주고, 나는 그런 일이 없나 돌아봅니다. 교만한 사람은 분수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갑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감투를 좋아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물질생활을 즐기기 좋아하고 유명하여 지는 일에 너무 지나친 신경을 쓰고 나타나기 좋아하고 이렇게 됩니다.

저는 저보다 10년이나 선배 목사님의 사모님의 상담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좀 만납시다." 그래서 만났어요. "나는 이게 마지막이요." "아니, 사모님! 뭐가 마지막이란 말입니까?" "우리 남편 목사하고 말입니다." "아니, 왜 이렇게 험악해 지셨습니까?" "나는 더 이상 못 견뎌요." "이필재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수고해 줘요." "왜요?" "나는 우리 목사 너무 혐오증이 나서 못살겠어요." "그게 뭡니까?" 예를 들면 대형집회 같은 거 하잖아요? 그러면 거기 순서 맡은 목사님들이 앉기 위해 강대상에 올라가잖아요? 자기는 그날 아무 관계도 없고 순서도 맡지 않았는데 제일 먼저 올라앉는다는 겁니다. 그게 환자이지 그게 정상입니까? 또, LA는 한국에서 높은 사람이 오면 영사관에서 사람을 불러냅니다. "이번에 국무총리가 옵니다. 대통령이 옵니다. 영부인이 옵니다. 공화당에서 누가 옵니다. 무슨 당에서 누가 옵니다..."  그러면 영사관에서 그분들을 영접해야 되니까 교포 사회에서 이름 있는 사람들을 영접위원으로 부른단 말이죠. 저는 교회가 좀 크다 보니까 번번이 걸립니다. 교포사회에서 무슨 일 한다는데 협조 안 할거 뭐가 있습니까? 협조하고 그러는데, 이 분은 자기는 거기 초대받은 일도 없고 갈 이유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제일 먼저 가있는 겁니다. 그리고 사진 찍을 때는 중앙으로 어떻게 쑤시고 들어가서 그 주요인물 옆에 서는지... 교인들이 그거 다 알고 전부 목사님 욕하고 있는데 평생을 못 고친단 말입니다. "자기 분수도 모르는 목사님 나는 혐오증이 나서 못살겠습니다." 결국 이혼하셨어요. 겸손한 사람 분수에 맞게 살아갑니다. 허영이나 허세를 버리고 소시민적 생활을 즐기며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생활철학이 낮은 수준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에 교만했던 사람과 겸손했던 사람에게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우선 왜 인류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로 떨어졌는가? 교만 때문입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해주는 말에 하와가 유혹된 말이 "네가 하나님이 될 꺼야!" 그래서 하나님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피조물인 인간이 파렴치한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고난에 손을 내밀었을 때 하나님은 "이것만은 안돼!" 가차없이 인간을 죄 아래로 떨어뜨리셨다는 것이 신학의 정의입니다. 바벨탑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워보려는 인간교만을 하나님이 파멸시키셨다는 역사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경우를 보면, 아브라함이 롯을 아들같이 키웠습니다. 이제는 성장해서 분가할 만큼 성장했는데, 다소 생업의 관할권이 그들에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겸손하게 조카 롯에게 양보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좋은 땅을 네가 먼저 차지하라는 말입니다. "네가 갖고 나머지를 내가 갖겠다." 그러면 롯이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아니, 삼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린 나를 데리고 오셔서 이 사막에서 이만큼 키워주셨는데 나는 나이가 젊었으니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삼촌께서 좋은 땅을 차지하시고 나는 사막으로 나가겠습니다."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늙은 삼촌을 사막으로 내어쫓고 좋은 땅을 자기가 차지해 버렸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겸손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을 삼으시고, 롯은 대적하셔서 전쟁하셨습니다. 그래서 롯이 차지한 좋은 땅을 '소돔과 고모라' 라고 하는 영원한 심판의 대명사로 저주를 내버리고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나중에는 두 딸과 동침해서 종족을 번식하여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 생기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어 지금도 그 사람들은 조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울 왕은 교만한 사람이요 다윗은 겸손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사울 왕을 대적하셔서 몰락하게 하시고 다윗을 세워 빛이 나게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교인 가정에 자녀가 탄생할 때 아이들 이름을 많이 지어주었습니다. 모두 성경의 이름을 지어주었거든요? 제일 많은 게 '다윗(David)'이고 여자들은 제일 많은 게 '에스더(Esther)'입니다. 좋은 이름 다 지어주었습니다. 하도 많이 지어주다 보니까 이제 없잖아요? "목사님! 아들이래요. 이름 지어주세요." "다 지어주었다. 이제는 없다. 남아있는 게 하나 있는데 지을래? 가룟유다(Judas Iscariot) 어떠냐?" 여러분 구약 에스더를 보십시오! 거기 교만스러운 모습으로 하만 장군이 등장하고 모르드개는 성문지기였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하만을 대적하셔서 죽게 만들고 모르드개는 국가적 공신의 자리로 옮겨 큰 빛을 발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로마는 왜 멸망당했는가? 힘의 교만 때문입니다. 로마가 멸망하리라고 누가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는가? 신앙의 교만을 부리다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독일에 가서 너무 놀란 것은 퀼론 성당은 아이젠하워 장군이 제2차 대전 때 퀼론 성당에 쏘는 자는 처벌하겠다고 명령을 내렸어요. 왜? 이 지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교회는 또 지을 수 없다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총 한방도 안 맞았어요. 그런 독일 교회들이 이제 교인이 없어요. 나는 목사로서 독일이 너무나 지나치게 신학 지식의 교만을 부리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독재자들은 하나같이 말로가 비참해집니다. 권세의 교만을 부리다가 그런 것입니다. 지금 미국이 물질의 교만을 부리지 말아야 영원하지 하나님이 온 세상에 나누어주라고 주신 물질 가지고 자기들만을 위해서 쓰면 그것도 망합니다. 부의 교만을 부리면 망합니다.

지금까지 세계 영화산업의 역사 가운데 가장 많은 관객을 불러모은 영화는 '타이타닉(Titanic)'입니다. 떠다니는 물체 가운데 당시로서 세계 제일이라고 자랑했고 선장은 그 배가 출항하는 기자 회견에서 자랑삼아 한 말이 "이 배는 얼마나 튼튼한지 하나님도 침몰시키지 못한다." 그 말은 이틀만에 전 세계 해상 사고 가운데 가장 큰 해상사고로 1,500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예수님을 봅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요즈음에 보면 인간이면서 예수님같이 나오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인간이 되셨는데...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다 이단이 되었잖아요?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말다툼을 했어요. "왜 또 싸우느냐?" 주제는 "우리 중에 누가 크냐?" 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라.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잠언 29장 23절에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느니라." 그랬는데 여기서 영예란 "위대함과 부귀"라고 해석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성전에서 바리새인은 교만하게 기도했고 세리는 엎드려서 겸손하게 기도했는데 예수님은 세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겸손에 대한 성경구절 잠언 22장 29절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 시편 10편 17절에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시편 22편에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라." 시편 147편에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붙드시겠다." 잠언 11장에 "겸손한 자에게 지혜가 올 것이라." 이사야 57장 "겸손한 자의 영혼을 소성시켜 줄 것"이며 이사야 29장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크게 될 것"이며 열왕기상 21장, 스바냐 2장 "겸손한 자는 재앙을 막아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미국을 탄생시킨 10사람 중의 한 명인 '벤자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은 정치가요 사업가요 과학자요 저술가로서 미국 건국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사람입니다. 그는 절대 잊어버리지 못하는 젊은 시절의 작은 사건 하나를 평생 간직하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자기 집은 아주 큽니다. 미국의 저택은 집이 대궐 같습니다. 그런 곳에서 늘 살던 사람이 가난한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그 오막살이집 같은 곳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문설주에 이마를 크게 부딪치고 기절을 해서 쓰러졌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났을 때 그 친구의 아버지가 나직한 목소리로 프랭클린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평생 머리를 숙이고 살아라." 그래서 그 말을 실천하여 평생 겸손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을 탄생시킨 장소가 '필라델피아'입니다. 거기에 역사적 유적물이 다 있습니다. 거기에 가보시면 지금 그 도시에서 제일 높은 건물 제일 꼭대기에 프랭클린의 동상이 서있고 그 도시의 법으로 "이 도시에서는 벤자민보다 더 높은 건물은 건축하지 못한다."라고 결정했어요. 매일 머리를 숙이고 살았더니 하나님은 전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을 탄생시킨 대표적 도시의 가장 높은 장소에 그를 세워놓고 국법으로 "이 동상보다 더 높은 건물은 여기에서 못 짓는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오늘 성경말씀에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의 뜻을 우리 신앙 생활과 삶의 과정에서 실천하면 이 하나님의 은혜는 물과 같아서 1mm라도 낮은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몰려가는 뜻이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 2000년 역사 가운데 가장 훌륭하게 살았던 사람을 꼽으라면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의 삶의 철학이 그의 고백으로 성경에 세 군데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그가 뭐라고 말하느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나보다 더 죄 많이 지은 사람이 없다고 그럽니다. 에베소서 3장 8절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꼴찌라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8∼9절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모자라는 사람,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를 기독교 2000년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높이 쓰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왔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올 것인가? 오늘 해답을 가지고 이 성전을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겸손하라고 하셨는가? 그 뜻을 오늘 성경말씀에 저희들이 찾았습니다. 우리 마음을 교만하게 만드는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항상 겸손하여서 하나님의 은혜가 끝없이 내게 임재하는 축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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