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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런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창 9: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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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충웅 목사

창세기의 시작은 감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너무 벅찬 하나님의 솜씨였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역사를 먹칠한 사건이 나옵니다. 너무도 많이 가진, 아니 모두를 다 가진 아담, 하와의 욕심이 문제였습니다. 그가 금단의 과일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너무 부끄러운 인간의 행위였습니다. 그런가 했더니 그 아들 가인이 또 큰일을 저지릅니다. 자기 동생 아벨을 돌로 때려 죽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노아시대는 기가 막힙니다. 하도 죄를 많이 지어 노아 가족을 제외하고 몰살 시키셨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끝났습니다. 이젠 제 자리를 잡아갑니다. 배에서 나온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이었습니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입니다. 노아는 포도원을 가꾸는 첫 농사꾼이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가 술에 취했습니다. 옷을 벗은 채로 장막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마침 함이 와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를 형과 아우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셈과 야벳은 겉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덮어 드렸습니다.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술이 깼습니다. 그는 작은 아들이 한 일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에게 천대 받는 종이 되어라.” 이어 “셈의 하나님 여호와는 찬양을 받으실 분,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어라. 하나님께서 야벳을 흥하게 하시고, 셈의 천막에서 살에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과 한국겔럽이 조사한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는 한국의 종교 인구는 1998년부터 2004년 까지 늘어났습니다. 개신교 인구는 21.6%로 1998년에 비해 0.9%늘어났답니다. 교인은 약 1,050만 명. 불교 26.7%, 가톨릭 8.2%였답니다. 개신교 강세  지역은 서울, 인천, 경기, 호남 등이고 열세 지역은 대구, 경북, 부산, 울산, 경남 등 영남지역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기쁨이 으뜸입니다. 우리의 삶은 믿음과 생활이 하나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늘 정신을 못 차립니다. 도덕적 타락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종종 술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아는 그의 실수 때문에 자식들이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노아는 그의 실수 때문에 많은 어려운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작은 한 사람의 실수가 여러 사람을 어렵게 합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 쉽게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노아를 의인이라 했습니다. 그는 순종하는 모델입니다. 인생의 황금기도 잘 지켜왔습니다. 노년기에도 믿음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우리도 노아처럼 쉽게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찮다고 생각한 것에서 무너집니다. 노아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노아는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허수아비가 쓰러지듯 쓰러진 것입니다. 노아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거장 노아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 편에 선 긍정적인 노신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런 실수를 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화평에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로 인해 노아가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아들이 복을 받습니다.’라는 말씀으로 같이 은혜 받고자 합니다.

Ⅰ. 허물을 말하지 맙시다.

해가 막 저물 즈음이었습니다. 맑은 여름날입니다. 어떤 사람이 골목에서 자기 집을 향해 비틀거리며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술이 취해 있었습니다. 그는 이 동네에서 30년 이상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도무지 자기 집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혼자 욕을 퍼붓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겁니다. 결국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질문을 받은 사람은 예수를 잘 믿는 그 동네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소부터 불쌍한 이 술주정뱅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용하지만 슬픈 목소리로 “당신은 파멸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사납게 그를 노려보다가 신음 소리를 내면서 “당신 말이 맞소.” 하고 중얼거립니다. 그러자 예수 믿는 사람은 “자 나를 따라 오시오. 내가 당신을 집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그런 후 다음날이었습니다. 술기운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취한 중에 들은 말 “파멸”이란 말이 자꾸 들립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파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구원해주세요.”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지금도 파멸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파멸인 줄 모릅니다. 무지해서입니다.

여기 아버지의 수치를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한 아들이 있습니다.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었습니다. 자기 혼자서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는 누구에게 알려서 처리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수치를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속성이 참 얄궂지요. 함은 덮고 가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혼자만 알고 입 다물 일이 많습니다. 어떤 때는 무덤에 갈 때까지 가져가야 하는,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물론 옛날 임금님의 귀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해서 유익한 말은 당연히 해야지요. 해서 덕이 되는 행동은 마땅히 해야 합니다. 비록 사실이라 해도 유익이나 덕이 되지 않으면 안 해야 합니다. 얼마 전 연예인들의 ‘X-파일’ 때문에 우리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 들은 이야기, 자기가 만들어내거나 더 보태어 말하는 것도 세상에는 많습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이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좋지 못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좋은 이야기는 그냥 넘어갑니다. 좋지 못한 이야기는 귀가 열립니다. 매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좀 감각이 둔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신문, 잡지에 좋은 기사도 많습니다. ‘누가 헤어졌단다.’ 살인, 강도, 절도, 이런 것이 너무 많이 실리는 것 같습니다. 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남의 약점, 허물에 신경을 덜 쓰도록 해야 합니다. 말이 하고 싶지요. 입이 근질근질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그 당사자라면..”이라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별의 별 소문이 많습니다. 그것은 잘 뜯어 살펴보면 사실이 아닌 것이 많습니다. 비록 사실이라 해도 남에게 해가 된다면 말을 삼가야 합니다. 좋은 말 한마디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좋지 못한 말 한마디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죽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도 “카더라”는 말만 믿고 사실인 것처럼 말하지 맙시다. 성경에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정말 우리는 불조심도 해야 합니다. 차조심도 해야 합니다. 건강 조심도 해야 합니다. 특히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함은 아차 실수로 아버지로부터 저주 받았습니다. 물론 1차 책임은 아버지 노아에게 있습니다. 원인 제공자입니다. 그러나 함은 가벼웠습니다. 생각이 깊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습니다. 좀 더 신중했더라면 이런 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함과 같은 행동을 우리는 종종 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우습게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웃음거리로 삼았습니다. 그는 악을 저지를 뿐 아니라 악을 저지르는 다른 사람을 보고 기쁨을 느끼게 했습니다. 타락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설령 아버지의 잘못 때문이라 말하겠지요. 그러나 아들은 아들의 자리를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함의 후손은 역사에 의해 버림받고 있습니다. 함은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속성이 있습니다.

저는 운동을 하는 중에 서울 광성교회 사건을 묻기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교회 목사님들이 무슨 노동조합을 구성합니까?” “교회 안에서 천막 농성을 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직장 폐쇄를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기에 참 난처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를 보는 사회의 눈이 고깝고 한데...
인간은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방해꾼이 많아요. 지난 1월 27일 폴란드의 무시무시한 아우슈비츠 해방 60년이었습니다. 독일 나치스 당이 저지를 인류 최악의 살인 사건입니다. 사람을 굶겨 죽였습니다. 총을 쏴 죽였습니다. 독가스에 질식시켜 600만 유태인을 죽였습니다. 이유 없는 죽음입니다. 단 하나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 죄 값을 그와 그 후손들이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 메시야를 죽였습니다. 통쾌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닌데요.

Ⅱ. 남의 허물은 덮어야 합니다.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냈습니다. 행여나 남이 알새라 혼자 처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형과 동생에게 가서 얘기했습니다. 그게 무슨 자랑꺼리입니까? 동네방네 소문 낼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 주었습니다. 이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품위 있게 살아야 합니다. 새해가 밝은지 두 달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울한 사건이 우리 주변에 들끓고 있습니다. 쓰나미의 재난, 종교 간의 갈등으로 사람이 점점 죽어가고 있습니다. 언제 저 끓는 불가마 같은 중동 사태가 잠잠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알고 보면 함의 사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서울 K교회 사건 말입니다. 원로목사님 측과 담임목사 측으로 양분된 마찰이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다 억울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억울함을 삼키고 지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섭섭함과 손해를 내가 지겠다는 측이 이기는 측이지요. 이론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용기를 내는 것 쉽지 않습니다. 탐욕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복을 넝쿨채 얻은 사람입니다. 노아의 홍수를 그 아들들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참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복을 원합니다. 인간의 오복(五福)을 수(壽), 부(傅), 강령,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 합니다. 그런데 죽음은 영원한 삶의 징검다리 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 잘 죽어야 합니다. 착하게 살다가 편안하게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죽음은 인간이 별 것 아닌 데 욕심을 부린 탓이었습니다. 그들이 감사할 줄만 알았더라면 선악과에 대한 욕심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감사하고 사랑하면 됩니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참 아름다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수치를 덮어준 것입니다. 저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때로는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전반에 마땅치 못한 것이 있지요. 통치자에 대한 것만은 비판을 삼가자. 그 이유는 그는 우리나라의 높은 어른이십니다. 그의 수치를 우리가 까발리면 우리의 수치입니다. 그러나 언론이나 사회 단체가 건전한 의견이나 비판까지 하지 말자는 것 아닙니다. 저 목회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셈과 야벳이 멋쟁이지요. 참 선이 굵은 형제였습니다. 그가 처신하는 것 보세요. 정말 슬기롭지요.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밝아집니다. 이 세상은 나쁜 사람 보다 착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착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우리는 부모, 형제, 가족의 잘못을 남에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자기 직장, 학교, 친구,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 자기 수치 입니다. 지금도 없지는 않지만 외국에 가서 우리나라를 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정말 수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수치는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허물이 잘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이 잘 드러납니다. 그래도 이런 것은 두 사람이 아는 것 보다 한 사람이 아는 것이 낫습니다. 한 사람이 아는 것 보다 아무도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셈과 야벳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도 남의 말 좋게 합시다. 비록 사실이라 해도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남의 일에 관심을 끊어야 합니다. 남을 칭찬하는 일에는 앞장을 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자세입니다. 남이 비밀이라 할 때는 비밀을 지켜줘야 합니다. 숙덕숙덕 수군수군 이게 세상입니다. 우리는 세상과는 다르지요. 우리는 사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맺는 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홍수가 끝났습니다. 노아는 포도농사를 지었습니다. 술이 과했습니다. 술에 취해서 옷을 벗은 지 입은 지도 모르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의 둘째 아들 함이 이를 보고 그의 형과 동생에게 소문냈습니다. 그는 이 일을 감쪽같이 처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어디 소문 낼 사건입니까? 그게 어디 가문의 영광입니까? 그래서 그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지혜롭게 아버지의 수치를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세상 살다 보면 남의 약점, 허물이 너무 크게 잘 보입니다. 이것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요즈음은 인터넷이라는 정보수단이 있습니다. 여기 올리면 세상 사람이 다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홈페이지를 없애는 곳도 있습니다. 우리 기독신문, 총회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세요. 이게 민주주의고 이것이 교단 소식통이고 총회기관인지가? 이게 교인들인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허물은 먼저 보는 대로 덮어야 합니다. 입 다물어야 합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가족, 교회, 학교, 직장, 일가친척, 친구의 흉이나 허물은 금방(즉시) 덮고 쉬쉬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 받습니다. 우리 주 안에서 승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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