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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자 택일 (왕상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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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자 택일

본문: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 하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세계적인 테너 가수로 성장하기까지는 그의 아버지의 힘이 컸습니다. 빵가게를 하던 아버지는 파바로티가 어렸을 때 남다른 음악적 재능과 타고난 목소리를 지닌 것을 알고 최선을 다해 소질을 계발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파바로티는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졸업할 때 "음악과 교육" 사이에서 방황했습니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파바로티에게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두 의자의 사이를 크게 벌려 놓고 두 의자에 다 앉으려고 하면 바닥에 떨어진다. 평생을 보고 하나의 의자만 택하라. 그리고 그것은 네가 결장할 문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즉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저는 간혹 불신자들로 부터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에덴동산에서 쫒겨나게 하셨느냐? 아예 만들지 말거나 그 선악과 주변에 철조망을 만들었으면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순종하여 안 따먹을 수도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토기장이의 뜻대로 큰 그릇도 만들수 있고 작은 그릇도 만들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을 보여 주시면 믿겠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하늘 구름을 타고 내려오시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보게된다면 이것은 믿고 안 믿고의 선택이 아닙니다. 강제적인 믿음과 복종만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찬양과 순종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조건적이 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순종하여 안 먹을 수도 있는데 선택을 잘못하여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인간의 매일의 생활은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무슨 옷을 입고, 무엇을 먹으며, 어떤 집을 사고, 어떤 물건을 살까? 어떤 학교로 진학하고 어떤 배우자와 결혼하며 무슨 사업을 하고 어떤 지도자를 택하여 투표할까? 그런데 이 선택의 자유는 결국 책임이 따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이 선택여하에 달리게 됩니다. 지혜롭게 선택하면 성공과 행복이 뒤따르고 선택을 잘못하면 실패와 불행이 따릅니다.
만약 한 여인을 정말 사랑하고자 한다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여인을 포기하고 버려야 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려면 우리의 더러운 것을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계속 죄 가운데 빠져 죄 속에 사는 자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죄를 떠나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15년 동안 부정한 여인과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하자 성적인 욕망의 노예로 살았던 모든 사슬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때 잃어버릴까봐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헛된 기쁨들이 한꺼번에 다 제거되었을 때 제 마음은 정말 상쾌했습니다. 제게서 그것들을 모두 몰아내신 주님은 진정 최상의 기쁨입니다. 제게서 그것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취하신 주님은 그 어떤 즐거움보다 감미롭습니다. 오, 주 나의 하나님, 나의 빛, 나의 행복, 나의 구원이시여.”
어거스틴은 죄의 줄을 끊어 버리자 놀라운 하나님의 기쁨과 행복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큰 바다를 항해하려면 부둣가의 줄을 풀어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떠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 것을 다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은 모조품일 확률이 높습니다. 오늘날 영적 거장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성경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순종이 없어서입니다. 순종할 때 영적 거장이 태어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우리가 일생을 살 때 중요한 선택중의 하나가 배우자의 선택입니다. 성도는 다른 무엇보다도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불신자를 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잘못된 생각에서 불신자와 결혼함으로 믿음에서 따나거나 어려움을 겪게 됨을 봅니다.
고사성어에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이란 말이 있습니다. 혼기가 찬 어떤 처녀가 두 남자와 선을 보았더랍니다. 동쪽에 사는 총각은 재산이 많았지만 사람의 인품이 맘에 들지 않았고 서쪽에 사는 총각은 인품이 맘에 들었지만 가난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각각 서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 두 총각을 놓고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처녀에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비아냥거렸답니다.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 하시오!“ 먹고사는 것은 돈 많은 동쪽 집에 가서 하고 잠자는 것은 사람이 좋은 서쪽 집에 가서 하며 왔다 갔다 하면서 살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 중에는 ‘동가식 서가숙’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종교생활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일상생활에서는 ‘세상 것’을 섬기는 삶 말입니다. 동가식 서가숙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까? 세상과 짝하며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까?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
한 주일학교 선생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얘들아, 부자는 이 세상에서 대궐 같은 집에 살면서 맛있는 음식이란 음식은 다 먹으며 살았지만, 결국 그 끔찍한 지옥에 가고 말았단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는 비록 이 세상에서는 구걸하며 살았지만 천국에 갔단다." 이 이야기를 마친 후 선생은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부자와 나사로 중 누가 되고 싶니?" 그러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 이 세상에서는 부자가 되고 싶구요, 죽고 난 다음에는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심리는 누구에게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 것을 마음껏 즐기다가 저 세상에서는 천국을 가겠다고 억지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실컷 마귀와 짝하다가 갑자기 저 세상에서 하나님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편, 저 세상에서도 하나님 편 이어야만 합니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6)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
뉴욕의 한 유대인 여자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가족들은 그 여자로 하여금 새로이 얻은 믿음을 버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유럽여행을 시켜주기도 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만 한다면 갖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어떤 일이라도 다 하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굳세게 버티었습니다. 마침내 여자의 부모는 딸을 위해 만찬회를 베풀고 모든 친구들을 다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식탁에 서서 손님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밤 특별한 이유로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우리 딸이 저 비천한 나사렛 사람을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오늘 밤 내 딸은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단념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부모의 집을 떠나든가 해야 합니다." 이 말에 놀라고 당황한 딸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딸은 피아노를 치면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가도다. 이후부터 예수로만 보배 삼겠네...." 노래를 마친 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꾸려 부모의 집을 떠났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마6:24)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님을 좇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떠났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힘든 요구를 해서 미안하다. 너를 놀라게 하여 떠나게 할 생각은 없었단다. 관계 회복을 위해 협상하자. 너는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니? 네가 소유한 모든 것을 팔 생각이 없다면, 좋다! 얼마만큼 포기할 수 있겠니?”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은 토론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부한 것이 잘못인가? 성경에는 부해지려는 욕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부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그의 삶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우상, 즉 그의 소유물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네가 영생을 소유하고 싶거든, 영생이란 새로운 주인을 모시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영생은 소유물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인격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본질상, 온전한 주인으로 행하실 수 없는 자리에는 거하지 않으신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 청년에겐 이미 그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그의 가치관과 모든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주인(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돈이었습니다. 참된 신(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사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현재의 신(소유물)을 내보내야 했지만, 그 청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보들레르는 "악의 꽃"이라는 책을 써서 교회에서 파문까지 당했습니다. "악의 꽃"은 당시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합니다. 그 "악의 꽃"의 착상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에서 착상을 얻었습니다. 선악과에서 착상을 해서 쫓겨난 에덴을 악의 꽃으로 비유했습니다. 이것이 독사의 색깔이고 독버섯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악의 꽃이 가득 피어 있는 죽음과 지옥과 권태와 고독, 그것이 현대 문명의 특징입니다. 악마가 신앙을 상실한 시대를 향해서 죄와 죽음과 지옥과 죄책과 절망을 키우는 것이 악의 꽃입니다. 순간마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서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보들레르의 친구가 이 "악의 꽃"을 다 읽고 난 다음에 "자네 앞길은 양자 택일이네. 하나는 권총 자살이고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라네."라고 보들레르에게 말했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의 증인에 의하면, 보들레오는 말년에 수도사처럼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직 기도만 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신앙에 귀의했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일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손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내 열 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 30 :15∼20)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위하여 남북전쟁을 할 때입니다. 전세가 남군쪽으로 기울어지자 각료들이 링컨에게 협박을 했습니다.
“대통령께서 노예해방운동을 계속하면 우리 내각은 총사퇴할 것입니다. 당장 노예해방운동을 중지해주십시오.”
링컨은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고뇌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럴 때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노예와 자유인은 공존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링컨은 모든 각료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자유와 노예가 공존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 나라가 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 비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을 계속 밀어붙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와 노예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주 안에서, 진리 안에서 자유로워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해서는 안됩니다. 참된 생명과 참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면 당신은 죄의 종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저드슨은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에 미국 교회가 처음으로 파송했던 선교사 입니다. 그는 탁월한 수재였기에 젊은 25세의 나이에 모교인 대학으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았고, 같은 해에 보스톤에 있는 어느 큰 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청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곳을 다 정중하게 사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지 보름만에 아내와 함께 인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인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사라는 이유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긴 항해 도중에 아내는 유산을 했고 너무 허약해진 나머지 랑군에 도착했을 때 들것에 실려 배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드슨 부부는 복음을 위해 열심히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어 두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도 몇 달되지 않아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러자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복음 사역에 최선을 다했는데 그만 감옥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는 창문이 하나도 없는 캄캄하고 더러운 감방에서 일년 반 동안이나 고생을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건강을 해쳐 출감한 직후에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아이도 몇 개월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서 일했는데 결국에는 자신도 병이 들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요양을 하려고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탔는데 그의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고국땅을 밟아보기도 전에 숨지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서 저드슨의 삶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저드슨은 불교가 국교인 그 나라에서 최초로 성경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구하는 데에 쓰임받았습니다. 또 그의 부인은 오늘날 선교사 부인들중에 가장 귀감이 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저드슨은 세상으로 통하는 넓은 길을 버리고 고난의 길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마7:13-14, 눅13:24)
여러분이 지금 가고있는 인생의 길은 좁은 길입니까? 넓은 길입니까?, 또 의인의 길입니까? 악인의 길입니까?(잠4:10-27) 검소와 절제의 길입니까? 사치와 낭비의 길입니까?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군을 이끌고 유럽을 휩쓸고 있을 때, 장군 한 사람이 정예 부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포위망을 좁히며 총공세를 펴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펠드리히 시에서는 비상 시의회를 소집하고 항복 여부를 논의하였는데 대다수 시의원들의 의견은 미리 항복해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데로 모아졌습니다. 그때 교회의 지도자 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부활주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의 힘만을 믿는다면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긴다면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무서워 떨고만 있지 말고 교회의 종을 힘껏 치고 부활절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그 뒷일은 하나님께 맡깁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펠드리히 시에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찬송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종소리와 찬송소리는 프랑스군 진영에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밤사이에 오스트리아 군대가 도착했기 때문에 울리는 기쁨의 종소리와 노랫소리일 것이라고 판단해서 공격을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말았습니다. 펠드리히 시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절망할 자유와 희망할 자유가 있습니다. 믿을 자유도 있고 믿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맡길 자유도, 내가 움켜 쥐고 있을 자유도 있습니다. 영원히 살 자유도, 영원히 멸망할 자유도 있습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뜻대로 선택할 자유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제가 청량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교장이 내가 교내에서 기독교 교사 신우회와 기독교 학생반 등을 운영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저보고 교내에서 기독교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지 않으면 다른 학교로 전출을 보내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각서는 못쓰겠다고 하여 결국은 태릉고등학교로 전출가게 되었습니다. 학교 교사를 그만 두는 한이 있어도 말씀 전파의 사명을 포기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학교에서는 가끔 주일날 토익시험과 한자 검정고시 등의 시험장이 됩니다. 그리고 감독관에게는 약간의 수당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크리스천 선생님들 중에 약간의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자 주일성수하지 아니하고, 시험 감독관을 신청하는 것을 봅니다. 과연 하나님이 어떤 선택을 기뻐하실까를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느부갓네살왕이 금신상을 만들고 모든 백성에게 절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때 사드락과 메삭과 야벳느고는 이를 어길 경우 풀무불에 들어가 죽임을 당한 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절했습니다. 결국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졌으나 불꽃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고 살아난 기적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같으면 죽음과 신앙 양자간의 선택에서 어떤 것을 택하실 것입니까?
어느 무인도에 두 사람이 올라갔는데, 한 명은 사람이 찾아온 일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한 명은 사람이 찾아온 일이 없다는 주장을 합니다. 사람이 이 섬에 찾아온 일이 있다는 주장은 그 증거를 찾기가 아주 쉽습니다. 아무 것이라도 발견하면 됩니다. 책이 한 권 떨어져 있다든지, 단추가 떨어져 있다든지, 머리카락이 발견된다든지 아무 것이라도 사람이 찾아온 일이 있다는 증거를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찾아온 일이 유사 이래로 없었다는 것을 증거하려면 힘이 듭니다. 일만 년 전에 찾아왔다가 죽어서 누가 불태워 공중으로 날려보냈으면 일만 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땅 속에 묻었다면 섬 전체의 땅을 다 파보고 분석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내세가 있느냐 없느냐, 창조냐 진화냐, 뿌리가 있느냐 없느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도 없이 태어나 저절로 목적 없이, 의미 없이, 던져진 모래알처럼 생긴 것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입니다. 신앙은 양자택일 가운데서 옳고, 좋은 것을 택하는 지혜입니다.(전11:9)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서 호화롭게 지내느냐? 압박받는 내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고 살것이냐는 두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히11:24-26)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목자들의 싸움으로 넓은 들과 골짜기를 선택할 때 푸른 풀만 보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악함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므로 불행한 일을 당합니다. 솔로몬에게 장수의 축복과 부귀의 축복에서 무엇을 줄까 물었을 때 지혜의 축복을 달라고 하자 장수와 부귀의 축복도 더하여 주셨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과 팥죽 한 그릇의 선택에서 굶어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슨 상관이냐며 팥죽 한 그릇을 선택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였습니다.(잠19:3)

구약 룻기서에 보면 오르바와 룻은 모두 남편과 사별한 슬픔을 지닌 여인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모두 같은 환경 속에서 같은 불행을 안고 자신의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를 선택하고 친정을 포기해야 하나, 아니면 시어머니를 포기하고 친정을 택해야 하나, 갈림길이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아들 없는 두 며느리를 보면서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강권하였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적으로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젊은 며느리들의 앞길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최대한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두 며느리가 다 함께 어머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중간에 큰며느리 <오르바>는 친정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친정을 포기하고 시어머니를 선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포기와 선택의 신앙적 교훈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가장 힘든 선택이 바로 신앙의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보면 큰며느리의 선택이 더 잘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젊은 여자가 평생 아들도 없는, 그것도 이방 나라인 외국으로 시어머니를 따라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오르바>와 <룻>은 같은 현실에서 고민하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오르바의 선택이 잘하는 것 같이 보이고, 룻의 포기가 잘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자고 아무 친척도 없는 타국으로 시어머니를 좇아가겠다고 친정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룻의 포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신앙의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룻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의 여인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친정을 포기하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선택하였습니다.
롯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국으로 돌아갈 때,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부의 의리를 택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롯을 어떻게 축복하였는지 우리는 구약성경 롯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의 길(요10:11-14)이 놓여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는 길은 어느 길을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바알(왕상18:21), 하나님과 세상(약4:4), 하나님과 재물(마6:24) 중 무엇을 선택할 것입니까? 둘 다 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 중 하나를 선택할 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선택하고,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인가를 생각하여 선택할 때 자연히 모든 선택이 바르게 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은 잘되면 자기 탓이요 잘못되면 남의 탓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길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자기의 잘못된 선택을 남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잘못된 선택을 회개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택해야 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택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생에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할 뿐 아니라 천국 영생을 얻어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의 욕망은 이 세상에서는 세상 것을 즐기기를, 저 세상에서는 천국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저희로 이러한 욕망 가운데 빠져 생활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양자택일할 일들이 많나이다.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묵상 및 토의
0 나는 혹,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기회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0 내가 선택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과 기준은 무엇인가?
0 나는 어떤 일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가장 결정적인 근거로 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명령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경험과 이기적 계산입니까?

선택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인 백두산 꼭대기에 가면 천지라고 하는 호수가 그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호수에서 시작해서 좌우 양편으로 두 개의 큰 강이 흘러내리고 있다.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것은 황해와 연결되어 지는 압록강이다. 다른 하나는 오른쪽, 곧 동쪽으로 흘러가서 동해로 연결되어지는 두만강이다. 그런데 백두산 꼭대기 천지 속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조금만 서쪽으로 기울어지면 압록강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와 반대로 조금만 동쪽으로 기울어지면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과 함께 동해로 들어가게 되고 만다. 처음에는 똑같이 천지라는 호수 속에 있었지만 얼마 뒤에는 수 천리, 수 만리나 떨어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가는 방향이, 서로간에 선택한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에, 그 결과도 역시 엄청나게 달라지고 만 것이다. 이처럼 내가 과연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 여기에 따라서 내가 다다르게 되는 종착역도 역시 달라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되겠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두 갈림길에 서게 된다. 생명의 길이냐? 그렇지 않으면 사망의 길이냐?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좁은 길이냐?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가르쳐주는 넓은 길이냐? 물론 선택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도 엄청나게 차이가 남을 알아야 한다. 좁은 길, 생명의 길이 보기에는 힘들고 어려워도, 그 길만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해 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매 순간마다 우리는 결정을 해야 한다.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 잘못된 길인지 당장은 알 수조차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나보다는 남을 생각하면서 선택을 한다면 조금도 후회 없는 길을 걸을 수 있다.
"...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으니"(렘21:8)

* 금언:
0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0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면 어느 것도 잡지 못한다.
0 주님을 사랑하라, 주님을 증거하라, 주님을 찬송하라, 주님을 즐거워하라.
0 가장 휼륭한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중에서 단 하나를 선택한다. 영원한 명예를 취하고 사별해 버릴 것은 미리부터 버린다.(헤라클레이토스)
0 사랑한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다.(루오)
0 각자는 자기 길을 택할 줄 알아야 한다.(프로페르티우스)
0 벗을 선택하는 것처럼 저자를 선택하라(로스고론)
0 이것이냐 저것이냐(키에르케고르)
0 너는 자유다. 스스로 선택하고 발명하라(사르트르)
0 약속을 쉽게 하지 않는 자는 그 실행에서는 가장 충실하다.

* 헤르클레스의 선택

크세노폰의 향연집에는 소크라테스가 말하였던 바 '헤르클레스의 선택'으로 알려져 있는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젊은 헤르클레스는 장차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의 앞에 두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한 여인은 매우 아름답고 호화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한 여인은 매우 수수한 흰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전자의 이름은 '쾌락'이었으며, 후자의 이름은 '덕'이었습니다. 전자는 젊은 헤르클레스에게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가장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후자는 그에게 매우 많은 수고와 고통을 겪어야 하지만 결국 그의 남자다움에 합당한 아름답고 선한 삶의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 옛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무엇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참 자유와 영원한 기쁨이 있는 영생과, 영원히 버림받는 영벌의 길을 결정해 줄 것입니다.
http://allcome.ce.ro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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