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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쾌한 날이 이를 것이요 (행 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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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덕 목사 

제네바에서 발행되고 있는 일간지 <Tribune de Geneve> 사회면에,
교회와 관련된 기사가 큰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 하게 게재되었습니다. 내용인즉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쁠렝빨레(Plainpalais)교회가 술집을 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인 없는 예배당이 팔린 뒤에 술집으로 바뀌는 경우는
구미 사회에서 가끔 있는 일이기에,
그런 이야기라면 새삼 놀랄 것도 없습니다.
그날의 기사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교회의 목사가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 예배당 내에
직접 술집을 차렸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완전히 등진 스위스의 젊은이들을 교회로 불러들일 목적으로
그들을 위한 술집을 예배당 내에 차렸다는 것이 담당목사의 변이었습니다.
그런데 제네바에서 목회 하는 한인 목사님 한 분이
술집이 되어버린 쁠렝빨레 교회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예배당 한 가운데를 가로막고 있는 커텐 앞쪽이 예배실이요,
그 뒤가 술집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제네바 에서 가장 큰 광장인 쁠렝빨레 광장 한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200년 역사의 고색 창연한 쁠렝빨레 교회가
목사님이 보기에 교회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서글프고
술집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어설프더랍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 교회 성도라기에는 너무나 서글프고, 세상살이에는 어설픈 사람들
오늘 한국교회 안에도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서글프고 어설픈 교인들이
새 힘을 얻어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주일에 베드로 요한을 통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교회의 오순절 성령사건을 대표하는 사건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의 구걸하던 모습은
성령 받기 이전의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기적을 체험하고 본 사람들의 반응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반응과 비교해 봄으로
나의 신앙생활에 새로운 도전을 받는 은혜의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이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먼저 당사자인 앉은뱅이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 나은 사람이 베드로 요한을 붙잡았다고 합니다.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다가 발목에 힘을 얻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니 얼마나 놀랍고 고마웠겠습니까? 그래서 붙들고 감사 했을거예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종종 예외적인 사람들을 통해 기적을 나타내십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병 고침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대부분이 바로 예외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면
내게도 전혀 예상치 않았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도 주시지마는
구하지 아니하는 것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연적인 것을 통해서도 은혜를 주시지마는
때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니 오늘 이 앉은뱅이는 예기치 못했던 축복을 받았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생각하면 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층 19평에서 개척을 시작하면서
교회가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아직 큰 교회는 아니지마는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가끔 오늘 이 앉은뱅이처럼
하나님이 해 주셨는데 사람에게 찾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경이나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날 때는
물론 도움을 준사람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지만
그보다도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더 감사해야합니다.

2) 이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지금 눈앞에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사람들을 놀라게합니다.
이런 충격과 놀람이 예수 믿는 우리의 삶 주변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 가정에 직장에 이웃에 이런 충격을 주어야합니다.
예수 믿고 확실히 변화받은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충격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이라는 행각에 모여들었습니다.
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기적을 보고 놀랐지마는 <3>
그 기적의 진원지가 어디서 온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고도
그 은혜와 기적의 근원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주 우리 교회 집사님 가정에서 일어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수능을 치루고 대학을 지원했는데
점수가 만족할 만큼 나오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재수를 할까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대학에 합격을 했어요.
그러니 집사님 부부가 너무 감사해서
혹 재수할 뻔했더라면 어떻게 할뻔했나 생각하니 너무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아들 재수하면 드는 1년치 비용 하나님 앞에 바칩니다.
목회의 보람이 이런데 있어요
성도들이 정말 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갈 때
목사는 목회의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도 이 기적이 어디서 온지 모르는 군중.
이런 군중들의 반응에 대해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2절에 보니
[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능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배드로가 모인 사람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1)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2)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 요한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하게 되자 사람들이 능력이
자신들로부터 나오게 된 줄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목에 힘이 들어가거나 아니면 침묵을 지키는 것이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위기가 남이 몰라줄 때가 아니라 알아줄 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러한 영적인 위기가 닥쳐왔을 때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오늘 베드로의 대답 중 <4>
1)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왜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이 나타난 것을 이상히 여기느냐?
이상히 여기는 것이 더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내일 가족 여러분 !
우리에게도 예수 믿고 성령 받아 전혀 기도할 때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기적이 나타남이 당연한 것입니다. 역사가 나타남이 당연한 것입니다.
2) 이러 기적이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 지금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이다
그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 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합격하게 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성공하게 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할 때
은혜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계속하여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를 합니다.

13-18절에 보면 기적을 베푸신 분은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기적에서 이야기를 끌어와 기적을 베푸신 분
즉 예수 그리스도로 주의를 끌어옵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과 표적의 특징입니다.
오병이어의 역사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병이어의 역사를 나타내신 주님의 손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주위의 관심과 집중을 항상 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전환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은혜가 뭡니까?
나는 없어지고 예수님만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나는 작아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모읍니다.
13절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예수를 높혀 세웠다는 것입니다.
// 예수를 영화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13하반-15절에 보면 <5>
[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를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
[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
[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 즉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리셨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 ]
가만히 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교인들 있지요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죽였다 ] 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1) 예수를 너희가 죽였다
2) 그러나 그 예수를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셨다
즉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밖혀 죽은 예수가 나의 주시라는 말입니다.
왜? 베드로가 [ 예수를 너희가 죽였도다 ] 라고 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는 말을 합니까?
치명적인 병을 수술하기 위해 메스를 들듯이
회개케 하여 저들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들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의 삶에도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6절에
[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
기적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그 이름을 믿음으로 초자연적인 구원이 나타나고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모든 무릎을 꿇게 하는 이름,
그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을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철학자들의 법칙은 ‘네 생각하는 대로 될지어다’,
의사들의 법칙은 ‘네 먹는 대로 될지어다’,
선생님들의 법칙은 ‘네 보는 대로 될지어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법칙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여 년 동안이나 앉은뱅이를 치유해주신 분은 <6>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베드로의 설교는,
본문 19절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19절 [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
19절은 행2장에서
역시 베드로가 행한 첫 번째 설교의 마지막 결론을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때도 [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 할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양심에 찔림을 받은 무리들이 베드로에게
[ 우리가 어찌할꼬 ] 탄식하며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행2:38절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어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 로 받으리니'
이 행2:38절과 본문인 3:19절은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2장 38절에 대한 설명문이 3장 19절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얻는 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면
주 하나님으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을 종합하면,
회개하고 죄사함을 얻어 성령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주 하나님으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유쾌하게 된다는 말
아나푸쉬키스(anapsuxis)는 시원해진다, 신선해진다는 뜻인데
이 단어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는데
이 단어는 ana란 전치사와 psucho란 동사가 합쳐진 합성어인데,
ana는 '위를 향하여' 그리고 'psucho'는 '숨쉰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늘을 향해 숨을 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란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향해 호흡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그 영원하신 숨결, 그 사랑의 숨결, 그 거룩하신 숨결,
그 숨결 속에서 호흡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숨결 속에서 살아갈 때 어찌 그 삶이 신선해지지 않겠습니다.
어찌 그 삶이 유쾌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 삶에 형통함이 주어지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요20장에 <7>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행동을 바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깨트리시고 이미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겁에 질린 채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친히 그곳으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거기서 행하신 일을
요20:21-22절은 다 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향해 당신의 숨을 내뿜어 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확연하게 알게 됩니다. 성령받은 사람이란
부활의 생명이신 주님의 숨결 속에서 호흡하는 자임을
제자들에게 친히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호흡하는 자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했던 베드로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를 향하여,
주 하나님을 향하여 호흡하는 자가 될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2:7절은 인간의 기원을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하나님께서 인간을 빚으시고 당신의 생기
즉 당신의 숨결을 그 코에 불어넣어 주시므로
인간이 영적인 존재, 곧 참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숨결을 호흡하지 아니하는 자는
참된 사람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밖에서 호흡하는 자가
어찌 자기 존재에 충실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나무에서 떨어져나간 가지가
나무로서의 자기존재에 충실할 수 없는 것과 똑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날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며서도 삶에 유쾌함이 없고
반갑잖은 불쾌한 일들만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숨결을 상실한 까닭이요,
자신의 호흡만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약1:17절에 <8>
[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를 향해,
하나님을 향해 호흡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삶 속에
어찌 진정한 신선함과 유쾌함이 솟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를 향해 진실로 유쾌한 삶을 추구할 것을,
위를 향해 호흡하는 자가 될 것을 간곡히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무엇이 회개인지 아십니까?
수에 칠 가치조차 없는 자기 호흡만을 의지하던 어리석은 삶으로부터
위를 향하여, 하나님의 숨결을 향하여 나의 얼굴을 치켜올리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숨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때 왜 내가 유쾌해지는지 그 까닭을 아십니까?
그분의 영원하신 숨결 속에서 내가 비로소 참된 사람으로 빚어지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의 알지 못하고 행했던 불신앙적인 삶을 청산하고
이제부터 성령 받아 하늘을 향해 호흡하는 자가 되어
나의 삶에 유쾌한 날을 만들어 가는 내일의 가족들 되시기 바랍니다.

한 소년의 감동적인 간증과 글을 소개합니다.
제목 : 예수님께 드리는 편지
사랑하는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구로동에 사는 용욱이에요.
구로 초등학교 3학년이구요. 우리는 벌집에 살아요.
한 울타리에 55가구가 사는데 방문에 1, 2, 3, 4, 5... 번호가 써있어요. 우리 집은 32호예요. 화장실은 공중변소를 쓰는데
아침에는 줄을 길게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해요.
우리 집은 외할머니, 엄마, 여동생 용숙이랑 4식구가 살아요.
우리 방은 할머니 말씀대로 라면 박스만 해서 4식구가 같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엄마는 구로 2동에 있는 술집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오세요. 할머니는 운이 좋아야 한 달에 2번 정도 취로 사업장에 가서 일을 하시고 아빠는 청송 교도소에 계시는데 엄마는 우리보고 죽었다고 말해요.
예수님, 우리 집은 참 가난해요.
그래서 동회에서 구호 양식을 주는데도 도시락을 못싸가는 날이 더 많아요. 엄마는 술을 많이 마셔서 간이 나쁘다는 데도
매일 술에 취해서 어린애 마냥 '엉엉' 우시길 잘하고,
우리를 보고 <9>
'이 애물단지들아. 왜 태어났니? 같이 죽어 버리자' 하실 때가 많아요.
지난 4월달 부활절날 제가 엄마 때문에 회개하면서 운 것 예수님은 보셨죠? 저는 예수님이 저희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정말로 이해 못했거든요. 저는 죄가 없는 사람인줄로만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그 날은 제가 죄인인 것을 알게되었고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저는 친구들이 우리 엄마보고
"술집 작부"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어요.
매일 술 마시고 주정하면서 "다같이 죽자"고 하는 엄마가 얼마나 미웠는지 아시죠? 그런데 지난 부활절 날 저는 "엄마, 미워했던 것 용서해 주세요"라고
예수님께 기도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는 모습으로
"용욱아, 내가 너를 용서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저는 그만 와락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그날 교회에서 찐 계란 2개를 선물로 주길래 집에 갖고 와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생전 처음으로 전도를 했어요.
예수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구요.
몸이 아파서 누워 계시던 엄마는 버럭 화를 내면서,
"흥, 구원만 받아서 사냐?" 하시면서
"집주인이 전세금 50만원에 월세 3만원을 더 올려달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구원만 말고 50 만원만 주시면
네가 예수님을 믿지 말라고 해도 믿겠다" 하시지 않겠어요
저는 엄마가 예수님 믿겠다는 말이 신이 나서 기도한 거 예수님은 아시지요? 학교 갔다 집에 올 때도 몰래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했잖아요!

그런데 마침 어린이날 기념 글짓기 대회가 덕수궁에서 있다면서
저의 담임 선생님께서 저를 뽑아서 보내 주셨어요.
저는 청송에 계신 아빠와 서초동에서 꽃가게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던 때 얘기를 그리워하면서 불행한 지금의 상황을 썼거든요.
청송에 계신 아빠도 어린이날에는 그 때를 분명히 그리워하시고 계실 테니 엄마도 술 취하지 말고 희망을 갖고 살아주면 좋겠다고 썼어요.
예수님, 그 날 제가 1등상을 타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시지요?
그날 엄마는 너무 몸이 아파서 술도 못 드시고 울지도 못하셨어요.
그런데 그날 저녁 뜻밖의 손님이 찾아 오셨어요.
글짓기의 심사위원장을 맡으셨던 할아버지 동화 작가 선생님이
물어, 물어 저희 집에 찾아오신 거예요.
노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똑똑한 아들을 두었으니 힘을 내라고 위로해 주셨어요. 그러면서 자신이 지으신 동화책 5권을 놓고 돌아 가셨어요. 저는 밤늦게까지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동화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어요. <10> 그것이 다름이 아니라 책갈피에서 흰 봉투 하나가 떨어지길래 펴보니 생전 처음 보는 수표였어요.
급히 엄마에게 보여 드렸더니 엄마도 깜짝 놀라시며, '세상에 이럴 수가... 이렇게 고마운 분이 계시다니' 하고 말씀하시다가 눈물을 흘리셨어요.
저는 마음 속으로 "할아버지께서 가져 오셨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주신 거예요" 라고 말하는데,
엄마도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얘, 용욱아. 예수님이 구원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50만원도 주셨구나" 라고 우시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나 신기한 일이 주일날 또 벌어졌어요.
엄마가 주일날 교회에 가시겠다고 화장을 엷게 하시고 나선 것이에요. 교회가서 예배드린 엄마가 얼마나 우셨는지
두 눈이 솔방울만 해 가지고 집에 오셨더라구요.
나는 엄마가 우시길래 "또 같이 죽자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겁을 먹고 있는데 [ 용욱아, 그 할아버지한테 빨리 편지 써라.
엄마가 죽지 않고 열심히 벌어서 주신 돈을 꼭 갚아드린다고 말이야 ] 저는 엄마가 저렇게 변하신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했어요. 예수님, 고마워요. 용욱이 올림
한 초등학교 학생이 예수님을 믿었더니
어둡고 소망이 없던 집안에 생명의 빛이 비추고
그의 어머니도 주일이면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벌집에서 살지 않고 작은 아파트지만
각계의 온정을 통해 내 집을 마련하고 4가족 모두 교회를 다닌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이런 유쾌한 날이 이르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 받으면 유쾌한 날이 이르리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설교는 20-25절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20절 [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
베드로가 기적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또 예수님의 다른 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신다 ] 는 것은
2천 년 전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아니라,
본문의 설명처럼 이미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11>
마지막 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 ] 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까닭을 21절은
[ 만유를 회복'하시기 위함이라 ] 고 밝히고 있습니다.
만유를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하늘보좌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회복하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 해 오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여 그 영혼이 죽어버린 자와
하나님을 향해 그 영혼이 살아있는 자,
즉 신자와 불신자 를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심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유를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심판하실 예수님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기 1천 5백년 전
모세가 예수님에 대해 예언한 내용을 인용하여 이렇게 증거합니다
22-23절 [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 ]
그리고 24절에는
[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
사무엘 이후 모든 선지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하면 꾸벅 넘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세의 말과 사무엘 이후 모든 선지자를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아니하면 멸망당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 받은 자손입니다.
25절 [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
아브라함의 자손인 너희는 복 받은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 받은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면 심판 받는데
모세가 말한 심판의 주님을 바라보고 돌이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유쾌날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였던 낫게 하신 분은 <12>
구약의 선지자들이 오래 전부터 예언해 왔던 바로 그 분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가 먼저 오셨다는 것으로 그의 설교를 끝맺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26절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

중요한 것은 유쾌하게 되는 날과 주님의 재림을 강조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는 베드로의 설교가
[ 버리게 하셨다 ] 동사로 대 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는 사실입니다.
각각 그 악함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너희도 성령 받아 너희의 삶에 유쾌한 날이 이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순종하는 내일의 가족들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분은 예수다. 그 분은 바로 너희들이 죽인 예수다.
그런데 너희들이 죽였지만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셔서 다시 살아났다.
내가 이 일에 증인이다
이 예수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모세가 말한 그 분이다. 사무엘 이후 선지자들이 말한 그 분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축복이 그 분이다.
이제는 그 분 즉 예수님 앞에 돌아와라
예수님 앞에 돌아오면 유쾌한 날이 전개될 것이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의 결론은 행5:31-32절로 맺을 수 있습니다.
[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
[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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