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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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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형준 목사
 
지난번 아시아를 강타한 해일과 지진이 발생했을 때 한 초등학생이 지리시간에 배운 지진 해일 지식을 실천에 옮겨 가족과 관광객 100여명을 살렸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국 런던 데인스 힐 사립초등학교의 여학생 틸리 스미스(10)는 가족들과 태국 푸켓 마이카오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스미스 양은 갑자기 바닷물이 썰물처럼 빠지는 것을 목격하고, 2주 전에 지리시간에 배운 “해일 발생 직전 파도가 갑자기 썰물처럼 빠진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곧 스미스 양은 엄마 아빠에게 달려가 “몇 분 내에 해일이 몰려 올 것”이라고 설명했고, 아빠는 이 사실을 호텔 직원들에게 전달, 100여명의 관광객들은 모두 높은 곳으로 대피했습니다.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엄청난 파도가 밀려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이 곳에서는 해일로 인한 사상자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한사람의 영향력은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에 달려있기 보다, 작고 보잘 것 없어서 주목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문제 앞에 해결력을 갖춘 한 사람의 정확한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맡은 역할에 따라 세상에 나름대로 영향을 줍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존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성경에서는 존귀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빛과 소금에 빗대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어떤 상황 속에 있든 빛과 소금처럼 산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과 의미를 다 이루는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저나 여러분이 빛과 소금처럼 사는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지 주님 음성에 귀 기울이면서 오늘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너희는”이라고 말씀을 시작하시는데, 여기서 “너희”란 문법적으로 볼 때 오늘의 본문 앞에 나온 팔복의 인칭대명사와 연결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광의적으로 좀더 넓게 보아,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는 말씀에 비춰 제자들과 주님 말씀을 사모하여 듣기 위해 나온 사람들을 다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추측합니다.

먼저 제자들을 한번 살펴볼까요? 제자들의 직업은 대부분 어부였습니다. 상류층도 아니요 사회적으로 존경과 높임을 받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또 제대로 직업도 없이 이념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방황하는 젊은이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혁명을 주도하기 위해 가슴에 칼을 품고 다니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민족의 반역자인 세리도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집안이 좋거나 교육을 많이 받은 자도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온 무리들을 살펴보면 주로 병자들이었습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사람,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풀리지 않을까? 한번 사는 인생 이렇게 꼬이고 마음대로 되지 않아 하는 일마다 실패하니 이 세상 한번 확 뒤집어져버렸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도 분명 예수님 앞에 나왔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당시 사회의 지도자격이던 사두개파나 바리새파 그리고 제사장들이 볼 때는 사회에 득이 되기보다 오히려 사회가 도움을 줘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자신들 또한 자기 인식에 대해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들 보기에 별 볼일 없는 존재,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되는 그림자 같은 인생이야.’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과 무리들이 몹시 당황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소금이라면 자기들의 이미지와 어느 정도 맞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소금은 늪으로부터 증류해서 얻었기 때문에 시커멓고 불순물이 많아 보잘 것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빛이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어둠이 가려줘도 시원찮을 텐데 빛이라니 말입니다.

당황스러웠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따라다녔던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빛과 소금처럼 사용하셨습니다. 역사무대에 세우셔서 세계 역사를 바꾸고 인간의 운명을 바꾸는 일에 존귀하고 아름답게 쓰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을 향하여 동일하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말씀하신다면 부담스러워 하실 분도 있을 줄로 압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기 전에 어쩌면 세상을 더 부패하게 만드는 병든 마음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지 모를 우리들에게 부패를 막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실패와 고통의 연속으로 세상의 어둠이 더 편한 나에게 세상의 빛이라 하시니 이게 웬 말입니까. ‘하나님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사람들처럼 주님 말씀 듣고 따르겠습니다. 정말 소금처럼 빛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현재 삶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지만 주님 부름 앞에 응답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보십시오. 주님은 여러분들을 소금처럼 빛처럼 사용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세상의 연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리라.’, ‘가난한 자를 들어 부한 자를 부끄럽게 하리라.’ 고 말입니다. 보잘 것 없던 갈릴리 어부를 중심으로 생명의 역사를 만드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통해 또 한번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가기 원하시는데, 주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이뤄 가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지금 제 모습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저를 만들어 가시는 줄 압니다.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순종하는 마음으로 응답하는 사람을 통해서 주님은 빛과 소금처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이 땅에, 이 가정과 교회에 보내셨습니다. 이 나라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고통과 아픔 중에 두신 이유는 주님을 만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순종하게 하시고 주님을 따르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와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드와이트 무디를 잘 아실 것입니다. 무디는 19세기 가장 위대한 순회설교자였습니다. 무디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가난한 농가의 소년이었는데, 4살 때 건축업을 하는 아버지가 담이 무너지는 바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무디가 받은 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 5학년 교육이 전부였습니다. 10대 때에 삼촌이 있는 보스턴의 구둣방에서 일을 하며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신을 찾아온 주일 학교 선생님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신 주님을 만나고 보니 복음이 너무 귀하고 감사해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보스턴 지역의 부모들은 별로 교육 받지 못한 무디가 틀린 어법으로 가르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무디는 시카고로 돌아갑니다. 시카고에서 아주 충격적인 부탁을 받게 되는데, 자기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 때 무디는 순종하는 사람, 헌신하는 사람,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귀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 배운 것 얼마 없습니다. 가진 것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한 사람이 되어 주님께 헌신하겠습니다.’ 무디는 가장 연약하고 배우지 못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헌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무디를 쓰셨습니다. 1871년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무디를 초청했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무디의 설교는 완전히 실패작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들이 모인 그곳에서 똑똑한 아이들은 무디의 설교를 비웃었습니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고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그러나 무디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그대로 받으시는 하나님, 연약한 그대로 받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드립니다.’ 세상의 1억 명 이상이 무디를 통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무디를 통해서 세워진 무디 신학교와 무디 교회는 지금도 시카고에서 많은 주의 종들을 배출하면서 사역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학벌과 배경, 결점 투성이 무디였지만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했던 순종을 바탕으로 하나님은 무디를 그 시대의 소금과 빛처럼 사용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보잘 것 없고 연약하며 부족한 점 투성이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런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그 옛날 주님 앞에 나왔던 연약한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는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말입니다. ‘바로 너희들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주님의 부르심 앞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답은 여러분의 몫이고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다만 응답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무대에 아름답게 쓰임 받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네가 필요하다.’ 라고 말씀하실 때 믿음으로 순종하면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이 시대를 가장 존귀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결단하여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주님께서 우리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현장이 바로 이 세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쳐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세상은 심히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것을 보아, 세상은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어디가 살길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코앞에 닥친 위기 앞에서 경고도 받지 못하고, 죽음의 길이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 인줄 모르고 달려가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소금처럼 빛처럼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희망도 기쁨도 생명도 없는 곳, 영원한 멸망만이 가득한 세상임을 말씀해 주시고 동시에 바로 그러한 세상이 우리가 소금처럼 빛처럼 살아야 할 현장, 사명의 현장임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며칠 전 CNN 뉴스에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보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살된 6백만 명의 유태인 중 150만 명이 학살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진행되는 기념식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저는 그곳을 직접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학살이 있었던 때로부터 60년 가까이 흘렀지만 아직도 음산한 분위기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사람을 철사로 묶어놓고 때려 죽였던 기둥 옆에서 교인 몇 명과 성찬식을 했는데 다 함께 울었습니다.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안경만 가득한 방, 의족만 가득한 방, 여행용 가방만 가득한 방 그리고 머리카락만 가득한 방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자기 삶의 흔적을 남기고 죽어간 것입니다. 불태워 죽였던 현장 바로 너머에 독일군 장군들이 춤을 추며 밥을 먹었던 식당이 불과 십 미터 거리에 있었습니다. 철학의 대가들과 시대를 풍미했던 지성인들이 특히 많이 나왔던 독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랬던 사람들 속에서 죄책감 없이 다른 사람을 무참히 살해하는 죄악된 모습을 함께 발견합니다.

아니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불륜을 저지른 여인이 그 남자와 같이 살기 위해 어린아이를 임신했다고 속이고 아이를 빼앗아 오기 위해 아이 어머니를 죽인 사건이 불과 며칠 전의 일입니다.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자기 쾌락을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면서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노동자들의 하반신이 마비되어도 상관하지 않는 이웃이 있는 세상입니다. 외국인과 결혼한 후 그들의 분리한 신분을 이용해서 폭행하는 사람들이 우리 이웃입니다. 부정을 저지르는 선생님, 정의로운 척 하더니 뒤에서는 자리 팔아먹기에 바빴던 노조 간부들과 회사 간부들, 실망과 낙심, 절망으로 가득한 현실을 보게 됩니다.

이 땅을 바라볼 때 희망을 둘만한 곳이 없습니다. 어디 한군데 빛을 따라 가면 살 수 있겠다 하는 곳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분간할 수조차 없는 어둠 가운데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계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친히 육을 입고 구원하려 오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빛 된 삶, 소금과 같은 삶의 역할들을 해주기 원하고 계십니다.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될 삶의 현장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오히려 사역의 현장을 벗어나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둡고 힘들고 부패한 세상이 마땅히 우리 삶의 현장이라고 말씀함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편하고 사랑받는 곳, 존경받고 내 입지가 세워지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드로가 순교하지 않겠다며 도망갈 때 주님께서는 로마로 가고 계셨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가 묻는 물음에 ‘네가 피해서 도망가는 로마로 나는 다시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기 위해 간다.’ 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이 오늘 우리 귓가에 들려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구속하신 사랑이 오늘 우리 삶을 통해 나타나기를 원하고 계시는데 어느새 안락하고 유익하고 좋은 자리만을 찾아가는 병든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힘들지만 가정에 빛과 소금이 되라 보내셨는데 가정을 뛰쳐나오지는 않았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믿고 한 친구를 맡겨주셨는데 그 친구를 멀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역을 맡기셨고, 이웃을 맡기셨는데 힘들고 지친다고 편한 곳으로 나온 것은 아닙니까?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할 곳은 부패한 곳, 깜깜하고 어두운 곳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바로 세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916년 영국에서 청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할 때에 존 윈드롭(John Winthrop)이라는 청년은 자기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백성들과 나라, 종교가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 존 윈드롭은 어떻게 살아야 될지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에 미국 신대륙에서 펼쳐지고 있는 신개척지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청교도 무리와 같이 출발하여 매사추세츠 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배를 타고 가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다.’ 라는 응답을 받고 마음에 새겼습니다.

존 윈드롭은 살렘에 도착해서 언덕 위에 도시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원칙이 적용되는 도시를 세우겠노라 헌신했습니다. 비록 도시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오늘날 사회학자들은 말합니다. 지금도 미국 정신 속에는 존 윈드롭이 세운 ‘언덕 위의 집’의 정신이 아직 남아있다고 말입니다. 신대륙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빛의 나라를 바라보고 더 나은 삶을 위한 꿈을 주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자녀에게 빛과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이웃들에게 소금과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 빛과 소금으로서 우리가 있어야 할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다시 기억하기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우리 존재 이유가 바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는 16절 말씀과 같이 소금이 맛을 잃지 않고 짠맛을 가지고 있을 때 존재이유가 있고, 빛이 높은 곳에서 비출 때 가치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융통성 있게 사회에 적응하겠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다운 독특성을 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당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면 빛 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제가 어느 직장에 가서 ‘아, 그분 우리 교회 나오시는 분입니다.’ 했더니 ‘그 분 교회 나갑니까? 교회 나가는 분인 줄 몰랐는데요. 저는 절에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대답을 듣고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임을 여러분 삶의 현장에서 밝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소금의 짠맛을 발휘하십시오. 소금의 짠맛으로 부패를 막으십시오. 예를 들어, 이간질 하는 말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전해질수록 부패하게 되는데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면 이간질 하는 말이 중단됩니다. 이간질하는 말이 중단되고 오히려 사랑하고 위하고 아끼는 말로 바뀝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말을 전하고 들을 때 사랑의 말로 바꾸어 전합니까 아니면 더 말을 보태서 이간질 하는 말로 전합니까? 여러분 자신을 곰곰이 한번 돌아보십시오.

빛과 소금의 적극적인 역할은 사회 제도와 부정부패를 고치고 사전에 차단해서 부패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맛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자기 삶을 검증하는 가운데 짠 맛이 유지됩니다.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점검할 때 빛 되신 주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녁예배와 수요예배도 참석하지 않고, 십일조도 하지 않으며, 헌신도 봉사도 하지 않는데 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교회 직분을 맡고 있다고 해서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밟히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포지션만 가지고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인다운 생동감이 우리 안에 살아나야 합니다. 믿는 사람다운 생명력이 있어서 사람들과 만나는 중에도 소망을 나눠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은 세상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만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던 삶을 이제는 중단하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분명히 요청합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삶은 중단하십시오.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많은 기회가 남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현재가 여러분이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말씀 하신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그대로 내어놓고 ‘주님 맞습니다. 저는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고백하며 나아갈 때 주님께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문화와 풍속이라는 이름 아래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그리스도인의 독특성을 상실한 분이 있다면 회개의 자리로 다시 들어오십시오. 하나님 백성다운 밝음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어둡고 그늘진 모습으로 아무런 영향력 없이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다면 오늘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 앞에 다시 서십시오. 그동안 안주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잃어버리고 살았던 영향력과 독특함을 회복하십시오. 그러다 짓밟히면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오시길 바랍니다.

지난주 저는 우리 교회 팔십 다섯 되신 사순봉 집사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가족이 없어 조카 내외분이 돌보고 있었는데, 우리 교회 전도사님과 권사님이 사랑하시는 어른입니다. 저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입원하셨는데 췌장암으로 굉장히 고통스러워 하시면서도 제 걱정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갔더니 할머니 손에 작은 봉투가 있었습니다. 봉투 속에는 천만 원 정도가 들어있었는데, 이게 무슨 돈인가 보니 할머니의 하나 밖에 없던 아들이 15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며 받은 보상금이었습니다. 그동안 ‘아들 죽어서 받은 보상금을 내가 어떻게 쓰겠나…….하나님께 드려야지.’ 하면서도 혼자 사실 걱정에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가 하나님 나라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더 늦기 전에 하나님께 드려야지 하셨답니다. 그래서 조카 내외분과 함께 제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저 돈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받을 수 없는 바로 생명이었습니다. 팔십 다섯 해 고독하게 살아오신 할머니의 삶이요, 땀과 피와 눈물이요, 생명이요, 삶이요, 한 아니 그보다 귀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이었습니다. “목사님, 교회 건축에 쓰십시오.” 하시는데 정말 받기 힘들었습니다. 어렵게 호흡하시면서 내미신 손을 붙잡으면서 제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마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한동안 저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따님의 삶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을 향한 이 사랑을 받으시고 그 동안의 아픔과 마지막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드림이 많은 사람들과 혼탁해진 세상 속에 비추는 빛이 되게 해주세요.’ 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병실을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가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소유와 자리에 연연해하지 마시고 빛과 소금의 직분과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돌아보시면서, 주님의 부름 앞에 다시 응답하는 결단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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