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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롬 8: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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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얼마 전에 어느 시사 잡지사에서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조사해 보았더니 100점 만점에 64점이 나왔다고 합니다. 남녀 간의 차이는 거의 없고 연령별 차이가 뚜렷했는데, 십대가 71점으로서 행복 지수가 제일 높게 나왔고, 20대는 62점, 30대가 63점, 40대가 65점, 50대가 66점, 60대가 69점이 나왔습니다. 이번에 행복 지수를 조사하는 데는 영국의 심리학자 두 사람이 만들어낸 공식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사실, 행복지수를 측정해 내는 것은 혈압계로 혈압을 재는 것처럼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 공식이라는 것도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조사한 내용을 보면 대체로 상식선에서 수긍이 가는 것 같습니다.

십대의 행복지수가 높은 것은 아직 실패한 사회 경험이 없고 미래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기 때문입니다. 20대가 낮은 이유는 사회의 초년생으로서 현실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행복지수가 높게 나온 것은 경제적인 안정을 이룬 것도 있지만 나이가 들면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젊은이처럼 과도한 욕망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행복하기 위해 결혼도 하고 돈도 벌려고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웰빙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수준이 있는 사람들은 도의를 지키고 인정스럽게 사는 것을 행복의 조건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국가가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힘씁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행복 추구권”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두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들 관심을 갖고 노력하지만 “나는 참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복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어도 만족함이 없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행복의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는데도 자족하면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행복은 외적인 조건 보다 내적인 조건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행복한 삶을 누리고 계십니까? 이 시간 저는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써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만이 섬길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선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민족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으나 유독 이스라엘 자손만은 영원하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행복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은 어느 것이나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땅속에 사는 지렁이를 보고 사람들은 하찮게 여길지 모릅니다. “지렁이만도 못한 자”라는 말은 상대방을 모독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지렁이처럼 제 할 일을 똑바로 하는 생물도 드뭅니다. 지렁이가 땅속에서 흙을 먹고 살므로 오염된 토양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렁이는 존재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우연히 생겨난 존재라고 말합니다. 진화론자들은 아무 생명체도 없는 지구에 우연히 아메바가 생겨났고 그것이 진화를 거듭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인간이 우연의 산물이라면 존재의 목적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각자가 제 좋은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비난 받을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도덕이니 양심이니 하는 것도 무의미할 것입니다. 그저 본능에 따라서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진화론은 인간의 가치를 지렁이만도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증언합니다. 그것도 아메바나 원숭이와는 전혀 다른 고귀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보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람과 짐승을 비교해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짐승은 본능에 따라 행동하지만 사람에게는 짐승에게 없는 이성이 있습니다. 이성이 있기에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짐승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발전한 것이 없지만, 사람은 눈부신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또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기에 초월적인 신을 찾습니다. 짐승은 종교가 없으나 사람은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처럼 특별하게 만드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본분을 행하게 하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인생의 목적에 맞게 사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존재 목적을 망각한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큰 업적을 남겼을지라도 그의 삶은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지만, 역사책에 이름 석자를 남길지라도, 사실이지 사람들의 인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는 무명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므로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도 마음 쓸 것이 없습니다. 장차,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인데, 그 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평가하시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그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여부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이 생전에 행한 행위입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지만, 그 이름이 생명책에 없는 사람은 영영히 타는 불못에 던짐 받습니다. 그리고 행위록에 기록되어 있는 생전의 행위는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상벌의 근거로 사용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혹 보면, 기독교인인 사실을 사람들에게 감추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마는 그것처럼 안쓰러운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인들로부터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맞지요?” “당신의 얼굴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쓰여 있어요” 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세인들의 입술을 통해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일평생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심으로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모두 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는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으로서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비로소 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나 자녀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자격을 부여 받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에는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성도들을 일컬어 ‘거듭났다’고 합니다. 이는 단지 법적으로만 자녀의 자격을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출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로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스스럼없이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옆집 아저씨를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지만 내심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즐겨 죄를 짓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느끼는 두려움은 존경과 사랑이 포함된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살아계신 전능하신 신이십니다.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없으신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만물을 운행하시며,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며, 우리 각자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와 같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와 같으신 하나님께서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친히 아시고 저들의 삶 속에 오셔서 함께 하시며 인도해 주신다고 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특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자녀라는데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의 자식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합니다.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지라도 자기의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희생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 5절 이하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5)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진실한 사랑은 말로만 하지 아니하고 기꺼이 희생을 감수합니다. 요즘 경제 사정이 나쁘다 보니 가정불화가 잦고 이혼하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수하지 못해서 혼인 서약을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참으로 통탄스러운 세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물질 때문에 맹세를 깨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하나뿐인 독생자를 아낌없이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는 이르기를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을 대상인 우리의 자격이나 상태와 상관없이 부어주신 일방적인 사랑이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얼굴에 행복한 기색이 여실히 나타나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사랑을 하면은 예뻐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행복하니까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런 시련이나 역경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어려움을 만납니다.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실직할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도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 든든한 후원자를 갖고 있습니다. 곧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의 후원자가 되십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26절 이하에는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부족할지라도 성령님께서 친히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시므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리심으로 우리가 당면한 모든 일이 결과적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하물며 다른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날지라도 자녀의 자격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간구하심으로 복된 응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장래의 영광에 참예할 약속을 받은 것이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 3:20). 이 땅의 삶은 잠시 나그네 길에 불과합니다. 누구나 여행하는 도중에는 불편한 일을 만나도 너그럽게 넘깁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 것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바랄 것은 하늘의 유업입니다.

하늘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도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하나님의 후사라고 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했습니다. 후사란 상속자를 말합니다. 이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상속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시며 동시에 많은 아들 가운데서 맏아들이십니다. 이 많은 아들은 구속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씀하면, 예수님은 성도들의 맏형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보고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한 것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듯이 장차 주님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약점이 많은 몸입니다. 그래서 자주 병들고 아프고 부딪히면 깨어지고 망가집니다. 늙고 쇠하고 죽는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현재의 몸과 같지 않은 몸입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보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처럼 우리 역시 병들지 않고 늙지 않고 쇠하지 않고 깨어지지 아니하는 영생하는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몸으로 신천신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살이에 피곤해 질 때 잠시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가 자라는 새 예루살렘 성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은 장차 참여할 그리스도의 혼인잔치를 생각하면서 행복을 맛보아야 합니다. 결혼식을 앞둔 처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객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입장할 그 때를 떠올리면서 행복해 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혼인예식에 참예할 그 날을 생각하면서 미리 기쁨을 맛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주님을 섬기는 일로 핍박을 받는 성도님들은 없으십니까? 주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됨을 기억하시고 기쁨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그 날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는 일로 받은 비난이 칭찬으로, 고난이 영광으로 보상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알았기에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수고를 하고, 여러 번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며, 춥고, 헐벗는 고초를 기쁨으로 당했던 것입니다(고후 11:).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그는 돌을 던지는 자들을 증오하기보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을 행복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장차 주님 앞에서 받을 상급을 바라보면서 주를 위해 고난 받게 된 것을 행복으로 아시고 기쁨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까지 살펴본 것 이외에도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를 들자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기본적인 것 세 가지만 말씀했을 뿐입니다. 비유컨대, 예수 그리스도는 밭에 감추어진 채로 있는 보화와 같습니다. 농부는 그 밭을 갈다가 땅속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는 즉시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밭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 농부의 마음이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혹시라도 예수님을 믿는데도 행복하지 않은 분은 없으십니까? 그렇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올바로 알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이후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해서 이전에 애지중지하던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했습니다.

혹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행복하지 않고 무거운 짐이 되어 있는 분은 없으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 병든 영혼을 치유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라고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혹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것을 손해 보는 것처럼 여기는 분은 없으십니까? 주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일은 힘들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일수록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당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하면 할수록 피곤해 지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해 집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을 위한 수고는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결코 상을 잃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들께서는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를 부단히 찾아내심으로 언제나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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