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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하시는 하나님 (창 2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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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어떤 명상가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구두쇠에게 물었답니다. 이 사람은 대단한 구두쇠였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모았소?" 구두쇠는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당신에게만 주는 비밀인데, 꼭 당신만 알고 계시오. 내 좌우명은 바로 이것이오: 내일 할 일은 모두 오늘 하지. 그리고 오늘 즐길 일은 모두 내일 즐기자. 이것이 내 좌우명이라오. 당신도 이렇게 해 보시오. 틀림없이 부자가 될 것이오.' 사실, 이러한 삶의 자세나 방법은 성공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언제나 성공할 것이고, 아마 실패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인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특별히 예수님을 죽일 만한 그 무엇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은 예수님을 반대했을까요?  사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오랫동안 기다려 온 사람들 아닌가요? 여러 세기 동안 그들은 '그날이 오면..', 혹은 '그 분이 오시면' 하고 메시아를 갈망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죽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그다', '내가 여기에 있다' 했을 때,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메시아 곧 오실 그 분이라면, 이제는 더 이상 내일의 희망 없이 살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기다릴 대상이 없기 때문에, 기다림이라는 희망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당신이 메시아라면 우리는 이제부터 누구를 기다리며 살아야 하겠는가?' 하고 물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과 유대인의 차이라면 바로 이것이 차이이겠습니다. 유대인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살고 있고,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미 오신 메시아를 믿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격을 지닌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 신앙 방식은 유대인처럼 간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오신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직 오시지 않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엄청난 차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아까 말씀드린 구두쇠의 생활 자세에 매력을 느끼면서, 그것이 성공의 비결인 양 여기고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들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국의 소설가인 최인호씨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대우 그룹 회장인 김우중씨와 여행을 같이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김우중 회장의 비서가 오더니 "회장님이 한 20분 여유가 있는데, 최 선생님께서 회장님과 같이 시간을 보내시면 어떻겠습니까?"하면서 부탁하더랍니다. 최인호씨는 "20분 정도 시간이라면, 혼자 쉴 수 있게 해 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비서가 하는 말이 "우리 회장님은 잠시라도 혼자 있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곁에서 신문기사라도 읽어 주어야 한답니다" 하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최인호씨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김우중씨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구나. 혼자서 자기 시간을 즐길만한 여유조차 없으니..." 내일의 성공이란 기치 아래서 오늘을 희생시키는 사람의 한 모습입니다. 내일이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더 중요합니다. 오늘을 내일을 위해 희생시킨다는 것은 어쩌면 명목이 있는 불행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를 "기다리던 메시아가 이렇게 왔다면, 우리는 이제 누굴 기다리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런 의미에서라도 당신은 죽어야 한다"고 설명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이런 자세로 공부하기를 가르치지나 않습니까?  사실, 저는 자라오면서 "현재를 중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해 시간을 보내라"라는 가르침보다는 "현재는 내일을 위한 준비", "이 다음에 대학가서, 혹은 성공해서 그 때 즐겨라", 심지어는 "죽으면 영원히 자는 잠, 지금 잠자는 시간을 아끼라" 라는 식의 교훈을 더 많이 받고 살아온 느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있어 오늘은 내일을 위한 준비기간으로만 의미가 있습니까?  과거에 얽매여 사는 것도 불행이지만, 미래에 얽매여 현재를 그르치는 것 역시 불행한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자세도 이와 같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어딜까?" 하고 찾아 헤매는 우리의 모습과 노력들을 때로는 경건하고, 믿음의 훌륭한 자세로 여길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실까? 내가 그곳으로 나아가야지" 하고 하나님과 그 뜻을 찾아 나아가고자 하는 자세는 참으로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사실, 저 자신도 그런 입장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 뵙고자 하는 모습으로 살았었습니다. 그러다가 신학대학 4학년 땐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귀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15절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며 야곱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저는 귀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네가 어디로 가든지...."라는 표현에서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가는 곳마다 같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야지, 하나님이 내가 가는 대로 오시겠다니?" 이해가 안 가기보다 하나님이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유심히 읽어보았습니다. 영어 성경도 찾아보았습니다. "Know that I am with you and will keep you wherever you go." 하나님은 야곱이 가는 곳에 따라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먼저 긍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그림자처럼 내가 가는 곳에 늘 같이 가신다는 것, 내가 뛰면 그림자도 뛰듯 하나님도 뛰어오시며, 내가 가만히 서 있으면 하나님도 가만히 움직이지 않으신다는 것, 어떻게 보면 내 행동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먼저 긍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합니다. 이런 야곱이기에 꿈에서 이 말씀을 듣고 깨나선 이런 말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아마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은 인간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요. 지금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 다니는 신세가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와 같은 못된 인간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라고 말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야곱이 이러한 하나님을 긍정했다는 표시입니다.

신학자들이 쓰는 용어 중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이런 용어로 표현합니다: "지금 여기서"(Here and Now).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현재성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련하여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모습이 바로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진실되고 깊이 간직한 사람이 신앙의 체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뭔가 특별한 모습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본문의 야곱에게서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긍정하는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7절,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긍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모습이 진정 경건한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는 바로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 이루어지는 자세임을 성경은 말씀하기도 합니다(잠 1:6).

둘째는 하나님께 예배 드리게 됩니다. 18절에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으로) 벧엘이라 하였더라."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긍정하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예배를 드리십니다만,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을 긍정하시는지요?  우리가 이 사실을 긍정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셋째로 야곱은 하나님 앞에 결단합니다. 본문에는 서원이란 말로 나왔습니다만,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심을 긍정하는 야곱으로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입장을 보여드리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장을 바란다는 야곱의 간절함이 표현된 가운데 주어지는 결단입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결단입니다. 이는 평생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또 하나는, "지금 이 자리를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간적이고도 시각적인 장소로 삼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단은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자기의 모든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결단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게 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되며, 그리고 하나님께 결단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신다고 긍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뒤따르는 현실은 없다고 한다면, 우리의 긍정은 과연 무엇이 될까요? 

한가지 사실을 더 살펴보십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러한 야곱은 결국 훌륭한 성공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지금 여기서 긍정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귀한 모습이 채워지는 역사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 역시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또한 이런 말씀도 하셨음을 아십시다. 그것은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라고 말입니다.

"어디든 함께 가겠다"고 하시는 말씀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끌리어 따라 다니는 인상을 주십니다. 하지만 "너를 이끌어"라는 말씀에서 이러한 하나님은 오히려 야곱을 이끄시는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길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노파심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내가 가는 곳으로 다 따라 와 주신다면, 이 하나님은 너무 약하신 분 아니야?" 하는 노파심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끌리는 듯 하시면서도 결국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시는 약한 듯 하나 강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우리가 가는 대로 따라오시겠다는 하나님에 대해 연약한 분으로 인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끌리는 듯 하면서도 결국 끌어가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야곱을 훌륭하게 하셔서 다시 고향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긍정하는 데에서 우리의 신앙의 삶을 늘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긍정하는 구체적 표시가 바로 성만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는 야곱이 경험한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하심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찬식을 통하여 야곱이 고백한 것과 같은 고백을 하시게 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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