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벧엘로 올라가자 (창 35:1-7)

  • 잡초 잡초
  • 250
  • 0

첨부 1


- 설교 : 서해원 목사

  저는 여러분의 사랑과 기도 가운데 지난 한 주간 호주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저의 장인, 장모님의 결혼 60년 회혼 식을 참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이 혼자 장수하는 것도 축복이겠지만, 부부가 60년 이상을 함께 산다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옛날에 결혼을 일찍 해서 이것이 가능한데, 30세 즈음에 하는 요즘 세대에서는 60년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6년도 기다리지 못하는 세상이 아닙니까! 우리 나라에는 종종 60년 이상을 함께 사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알고 보니 우리 교회에도 70년을 함께 사신 분이 계십니다. 호주에서는 흔치 않는 일입니다. 저의 장인, 장모님이 다니시는 교회가 25년이 되었는데, 이번 일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한인사회에서도 드문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물론,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감사하고, 축하하면서 은혜가운데 잘 마쳤습니다.

  저의 장인, 장모님은 이북이 고향이십니다. 전쟁 때에 서울에 피난 와서 살다가 호주 시드니로 이민 가신지가 벌써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이젠 시드니가 그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셔도 그곳에서 뼈를 묻으려고 산소까지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분들의 인생에 호주 시드니는 마지막을 장식할 곳입니다. 이제 그곳에서의 아름다운 마지막 생애를 요즘 매일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면서 하루의 문을 여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살면서 영원히 잊지 못할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떤 사람에게는 고향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애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곳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일 수 도 있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그런 추억과 사랑과 감동이 서려 있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도 분명히 내 생애 그런 곳이 다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소개된 야곱이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130년의 험악한 인생의 세월을 보낸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곳이 바로 본문에 소개된 ‘벧엘’이란 곳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생애는 벧엘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품에서 마쳤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벧엘인 하나님의 집, 천국으로 간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 생애에 잊지 못할 벧엘, 그곳은 어떤 곳일까요? 왜 벧엘은 야곱의 생애에, 우리 인생에 잊지 못할 곳일까요? 오늘은 본문을 통해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으려고 합니다.

  첫째, 잊은 것이 생각난 곳입니다. 야곱의 생애에 벧엘이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창세기 28장입니다. 거기에 보면, 야곱이 그 형이었던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받게 되는데 이 일로 가정의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부모나 형과 함께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멀리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시킵니다. 형의 분노가 누그러질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길은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고,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야곱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고향을 떠나 외삼촌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곳에 이르러 지친 몸을 이끌고 돌을 베개삼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꿈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위로하시면서 그에게 큰 힘을 주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그곳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이 땅에 돌아오면 이곳을 다시 찾겠다고, 기도하며 약속하고 서원했습니다.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긴 세월동안 야곱은 거기에서 많은 고생을 했고, 땀과 눈물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 세월동안 야곱은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와 싸우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보냈습니다. 그래서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마침내 성공을 하고, 거부가 되어 그는 다시 고향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벧엘을 찾지 않았습니다. 벧엘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에게 깨달음이 왔고 그제야 잊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복을 받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다시 밟으면 처음 찾겠다는 서원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온 가족과 함께 다시 벧엘로 갑니다. 이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야곱의 생애에 벧엘은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그가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난 곳입니다. 그리고 이젠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거기에서 단을 쌓으며 예배를 드린 곳입니다.

  여러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마디로 잊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고,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도 늘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광야생활을 통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면서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탁이요, 명령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상하게도 우리는 잊을 것은 기억하고, 기억할 것은 잘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인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과거의 흔적, 지금의 나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자꾸 잊어버리니까 잘못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근대사의 많은 어려움을 겪은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이 민족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점점 잊혀지고 있다는 것이 비극입니다. 독일에 가면 어느 곳이든지 전쟁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건물도, 다리도, 폭격 맞은 흔적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전쟁의 상처를 기억합니다. 패전의 아픔을 뼈저리게 가슴에 새깁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전쟁의 흔적으로 남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 광화문 한 복판에 폭격 맞은 건물의 잔재를 하나라도 남겨 두었다면, 그래서 그것을 사람들이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잊지 않았다면, IMF를 겪었을까, 오늘의 이 어려움이 왔을까요?

  이제 내 인생의 벧엘을 경험해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잊은 것이 있다면 다시 생각나야 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합니다. 그런 벧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삶의 자리가 바뀐 곳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의 단순한 생각의 전환이나 깨달음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이처럼 큰 결단은 내리게 되었던 결정적이 계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 바로 앞에 있는 34장에서 잘 보여줍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이 고향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자리를 잡은 곳이 ‘세겜’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왜 이곳에 정착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형이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이었는지, 이곳이 살기가 적당하고 좋은 곳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의 배경으로 보면, 야곱이 여기에서 아예 살 작정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의 가족과 함께 세겜에 정착하여 살 때, 불행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야곱의 딸인 디나가 그곳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한 것입니다. 이 일을 있자, 야곱은 어떻게 해서든 무마시키려고 했습니다. 곧 잘 해결해서 그곳에서 세겜 사람들을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살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세겜의 추장인 하몰과 사돈을 맺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달랐습니다. 자기 동생을 강간한 추장의 아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회만을 엿보던 어느 날, 야곱의 아들 중에 장자인 시므온과 레위가 성에 들어가 모든 남자를 죽이고, 추장의 아들도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시므온과 레위는 야곱의 진노를 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야곱은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고향 땅에 찾아와 정착하여 사는 곳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고, 비로소 야곱은 세겜이 살 곳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온 가족을 이끌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이제 ‘세겜’이 아니라 ‘벧엘’로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야곱 생애의 벧엘은 바로 이런 곳이었습니다. 오래동안 자리잡고 살던 삶의 자리와 위치와 방향이 바뀐 곳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내 인생에서 벧엘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삶의 자리를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내가 서 있는 곳, 머문 곳, 내가 가는 곳은 혹 세겜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곳에 있는 우리를 벧엘로 옮기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깊은 영혼을 향하여 ‘벧엘로 올라가라’고 깨닫게 하십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세겜입니까, 아니면 벧엘입니까?

  현대사회에 잘 쓰는 말 가운데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발상의 전환’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기존의 관념과 고정된 가치관에서는 새로운 발전을 기대하기가 어려우니까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그 틀을 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의식구조와 생활 패턴의 전환입니다. 이 말이 나올 때부터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콜롬부스의 달걀로 예를 듭니다. 콜롬부스가 탐험에 성공하고 돌아온 뒤 그의 이름이 높아지자, 그것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모인 잔치에서 콜럼버스는 달걀을 집어들고 누구든지 이 달걀을 탁자 위에 세워 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말을 듣고 모두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때 콜럼버스가 달걀 끝을 탁자에 톡톡 쳐서 껍질을 깨트렸고, 깨진 쪽이 밑으로 가게 해서 세웠습니다. 그 뒤부터 아무도 콜롬부스를 우습게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남이 생각하지 않는 생각을 하고, 남이 하지 않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패러다임 쉬프트'입니다.

  신앙생활에도 패러다임 쉬프트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마로 이 일을 오신 것입니다.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고, 생활의 패턴이 바뀌어야 합니다. 잘못된 관습이나 고정관념에서 전환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래 동안 자리잡은 세겜의 자리에서 이젠 벧엘로 옮겨야 합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신앙인은 있어야 할 자리가 있고, 있지 말아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가야할 곳이 있고, 가서는 안될 곳이 있습니다. 이것의 구분이 명확하게 되어 있지 않으면 신앙생활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야 합니다. 세겜을 떠나 벧엘로 삶의 자리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벧엘로 올라가, 내 인생에 전환의 신앙을 경험하면서 주님을 따라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곳입니다. 야곱이 생각을 전환하고, 삶을 전환하여 벧엘로 올라갈 때, 거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않은 큰 축복입니다. 본문을 포함한 35장은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 축복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이 오셨습니다. 여기서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게 된 것은 그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먼저 오셨습니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듣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겜에 머물며, 전환의 삶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야곱을 강한 팔로 끌어내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바로 이런 은혜를 먼저 체험했습니다. 말씀을 통한 깨달음과 인도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는 ‘영적 은혜’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9절부터 15절까지에 나옵니다. 온 가족을 이끌고 벧엘로 올라갔을 때, 하나님은 다시 야곱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바뀐 것을 완전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결정적으로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이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는 ‘육적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은혜와 육적 축복을 받고 또한 그는 동행의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이 3절에 야곱의 고백에서 확인시켜 줍니다. 그는 그의 가는 길에서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특히 그의 가는 길은 환난과 어려움이었는데, 그때에도 언제나 함께 하시면서 힘주시고 도와주신 은혜였습니다. 아마 그 어떤 은혜보다도 이것이 야곱에게는 가장 큰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영적인 은혜, 육적인 축복, 그리고 동행의 축복, 이것이 벧엘에서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벧엘은 야곱 생애에 정말 잊지 못할 곳입니다. 큰 은혜가 임했고, 깊은 은혜를 체험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 인생의 벧엘을 어디입니까? 우리가 가는 인생 길에서, 말씀의 은혜가 임하고, 육신의 축복이 임하고, 동행의 은혜가 임하는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나는 그 벧엘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아직 체험하지 못했다면 이제 우리 모두 벧엘을 체험해야 합니다.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사순절이 찾아왔습니다.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절기입니다. 이제 십자가로 가까이 가야 합니다. 야곱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벧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벧엘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벧엘을 다시 체험하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절기동안, 잊은 것이 생각나는 기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삶의 자리와 방향이 바뀌는 기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쏟아 부어 주시는 은혜를 받는 기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모두 이 신앙을 다짐하며 야곱처럼, 벧엘로 올라가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