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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결한 마음 (마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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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동규 목사

지난주에 구정이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섣달그믐에는 밤을 세는 경향이 있습니다. 12시 전에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겁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까지도 잠을 재우려 하지 않았던 까닭은 옥황상제나 조왕신 등의 신령들이 밤 열두시에 집안으로 내려온다고 믿었던 한국 무속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불을 밝혀놓고 기다렸다가 신령을 잘 맞이해서 소원을 빌면 한 해의 운수가 좋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신을 직접 만나고 신의 세계를 체험함으로서 복을 얻고자 하는 것은 비단 한국의 무속뿐만 아니라 모든 인종 모든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을 한 번만 보여주면 당장 믿겠다는 불신자들을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8절을 보면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것은 빌립의 간절한 소원인 동시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간절한 소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단 한번만이라도, 꿈속이나마 보기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직접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간접 경험이라도 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을 방문하고 하나님을 만났다는 간증 테이프나 책자들은 언제나 인기가 높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것은 최대의 열망입니다.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자체는 전혀 잘못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도 하나님을 보는 것이 ‘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성도의 최고 목표이며 최대의 소망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가?’에 있습니다. 방법이 잘못되면 무속적이고 기복적인 경향을 가지게 됩니다. 황홀경이나 꿈이라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예레미야 29:8절은 이미 그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도 속지 말고, 점쟁이들에게도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참 선지자가 있는 반면 거짓 선지자들이 있고, 하나님의 바른 계시가 있었던 반면 거짓된 계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이나 꿈을 선뜻 믿고 따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반드시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분별의 기준을 우리의 느낌과 생각에 둘 수는 없습니다. ‘정말인 것 같다’는 자기 느낌과 ‘예언의 내용이 용하게 잘 맞더라’는 높은 확률은 점쟁이를 찾는 불신자들의 고백 속에도 동일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언제나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만물과 인간의 종교적인 본성을 통해서 분명하게 당신님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에덴동산을 거닐면서 직접 하나님과 만나서 대화하고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과 함께 모든 인간은 죄책과 오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불과 연기로 현현하시거나, 우림과 둠밈으로 때로는 꿈과 이적들을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그러한 계시 방법들은 임시적인 방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였습니다. 그림자는 언제나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이 이용하기 쉬웠고, 그들의 꿈과 예언에 많은 백성들이 미혹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디어 온전하게 당신님을 계시하셨습니다. 임시방편이 아닌 영원한 방편, 그림자가 아닌 실체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본체입니다(골 1:15; 빌 2:6; 히 1:3). 예수님은 당신님의 존재와 삶을 통해, 곧 인격과 말씀과 사역을 통해서 온전하게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성경 말씀을 의존할 때, 미혹되지 않고 바르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 성경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안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문자 자체의 뜻은 ‘심장’이지만 성경에서는 인간의 존재와 인격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지성적 활동이나 감성적 활동, 그리고 의지적 활동을 마음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마음은 단지 감정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지성과 의지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이 마음의 샘에서부터 모든 다른 것들이 흘러나옵니다. 마음에 선한 것을 쌓으면 입으로 선한 것이 흘러나오고, 악한 것을 쌓으면 입으로 악한 것이 흘러나옵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 이 샘이 오염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 17:9)라고 부패한 마음을 지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 하셨습니다(마 15:19-20). 그래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근본적으로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비록 도덕적이며 착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마음이 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았고 도덕적으로도 훌륭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겉모양의 청결에는 힘을 쏟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탐욕과 악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잘 안다고 해서, 혹은 종교적 활동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행한다고 해서 주님께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하셨습니다. 중심이 청결하게 변화되어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청결한 것입니다.

마음의 청결에는 두 가지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단일한 마음이라는 개념입니다. 이것저것 사랑하지 않고 일편단심으로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 속으로는 몇 푼의 제물을 더 사랑하는 위선자가 아닙니다. 마음의 일부분은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있지만, 다른 부분은 세상 나라를 향하고 있는 양다리 걸친 상태도 아닙니다. 온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한 덩어리로 하나님을 향해 있는 사람이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개념은 아무런 점과 흠도 없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도덕적으로도 청결한 내면을 소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으로는 거짓과 부정이 있으면서 하나님께 전심으로 신실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청결’은 무척 강조되었습니다. 주로 의식적인 청결을 강조했지만, 외형적인 청결에만 머문 것은 아니고 달리 도덕적으로도 그리고 신앙적으로 불신자와는 구별된 청결한 삶에 살도록 교육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청결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완성되었습니다. 마음의 청결은 수도적인 삶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되어집니다. 자기 힘으로 정결케 되려는 것은 마치 더러운 걸레로 새하얀 벽에 묻은 때를 닦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자기 수양에 힘쓸지라도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서는 닦을수록 더 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씻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도 발은 다시 씻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요 13:10). 이미 청결케 되었으나 이 땅에 사는 동안 늘 청결에 힘써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일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마음의 청결을 위해 철저히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해야 합니다. 청결케 하려는 노력을 부단히 할 필요가 있지만 그러한 노력이 나를 깨끗케 하지는 못함을 인정하고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청결하게 되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예레미야 29:13절도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6:9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지적으로 총명하든 아니든, 겉보기에 신령해보이든 평범해 보이든,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물론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느낄 수 있는 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히브리적 용법상 ‘본다’는 것은 ‘듣는다’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대상에 접근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해서 민감하고 그분의 뜻을 잘 분별한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의 세계를 통해 전능하신 그 분의 능력과 지혜를 감지합니다. 죄악으로 얼룩진 역사와 부조리한 현실과 고통스러운 개인적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송명희 시인이나 레나 마리아처럼 뇌성마비나 선천적 기형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공평하신 하나님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연인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보다 더 생생한 교제를 나눕니다. 그분께 죄를 고백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결코 허공에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께 내모든 것의 실 소유자 되심과, 내 모든 필요의 공급자 되심과 내 모든 계획의 인도자 되심을 현재적 사실로 인식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청결한 자는 실로 온 세상에 충만하신 그분을 분명히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처럼 풍요로운 자세로 삶의 즐거움을 누립니다. 아무 빽도 없는 것 같으나 가장 든든하게 믿는 구석이 있으므로 불안에 떨며 요동치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성도를 가리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라고 했습니다.

우리 시대는 성취와 획득을 성공으로 정의하는 시대입니다. 성취와 획득을 위해서라면 마음의 청결쯤은 종종 무시해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성취하고 획득한 것을 하나님을 위해 쓰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청결치 못한 마음으로 성취하고 획득한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이미 보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성경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가르칩니다. 날마다 때 묻은 마음을 회개하고 청결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복된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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