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환난 중에 얻는 것 (롬 5:1~11)

  • 잡초 잡초
  • 272
  • 0

첨부 1


- 설교 : 곽주환 목사

지난 해 말에 동남아에서 일어난 해일로 인하여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피해가 닥치고 말았다. 이러한 자연재해가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하여 이렇게 엄청난 재해가 일어날 수 있으며 아무런 죄없는 사람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죽는단 말인가? 영국의 어느 무신론 사회학자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없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라고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은 나치 수용소에서 10대 유대인 소년이 공개처형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하면서 부르짖었다고 한다.

이같이 재앙을 당하거나,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될 때에 일어날 수 있는 반응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아예 부인하는 반응이다. 모세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다. 죽을 기한이 되어서 여호수아에게 지도력을 넘겨주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마지막으로 지시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진 고통을 당할 때에,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에, 환난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에 스스로 물을 수 있는 질문이 있다면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가?”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실까?”

이같이 환난을 당할 때에 가질 수 있는 생각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고, 혹은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환난을 통해서 잃어버린 것 같지만 환난을 통해서 얻는 것이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한계를 고백하게 된다. 과학과 문명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문명과 물질도 결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게 엄청난 해일이 덮칠 때에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재앙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요즈음에 여러 가지 많은 기술이 발달해서 우리의 생활이 편리해 졌지만 그 결과로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환경의 재앙을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이같이 환난을 당할 때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환난을 당할 때에 “우리가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게 된다. 창세기 말씀에 바벨탑을 쌓는 이야기가 나온다.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여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의 바벨탑을 쌓았다. 벽돌도 개발하고, 역청을 사용하여, 나름 대로 발달된 기술을 통하여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다. 말이 통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말이 통하지 않게 되니 얼마나 엄청난 변화의 사건인가? 그들에게는 엄청난 환난을 겪게 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환난 중에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의 한계를 고백한다. 내가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번에 일어난 대 재앙의 사건을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단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할 뿐이다. 초대 교회의 지도자였던 어거스틴이 하루는 바닷가를 걸으며 삼위일체의 신비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조개껍질을 가지고 놀고 있는 한 어린 소년을 보았다. 그 아이는 모래에 구멍을 움푹 파놓고 바다로 가서 갖고 놀던 조개껍질로 물을 떠서 자기가 만든 구멍에 붓고 있었다. “무얼 하고 있니?” 하고 묻는 어거스틴에게 아이는 “바다를 구멍에 부어 넣으려고 해요”라고 했다. 그 대답을 듣고서 어거스틴은 생각했다. "저것이 내가 알려고 애쓰는 것과 똑 같구나. 무한한 바다 앞에 서서 내 유한한 마음으로 그것을 잡아보려 애쓰고 있었구나".
환난을 통해서 내 자신의 한계, 우리 모든 인간의 한계, 그리고 과학 문명과 물질의 한계를 분명히 깨닫게 된다. 우리의 힘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에 그것은 곧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창고를 여는 새로운 출발이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래서 환난을 당할 때에 얻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증하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똑같이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아이들을 차별을 받고 있다고 말할 때가 있다. 나에게는 딸과 아들이 있다. 아들이 어리니 아무래도 동생에게 잔손이 많이 간다. 가끔 딸이 엄마 아빠는 왜 동생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가 있다. 분명히 아닌데도 그렇게 말하면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딸이 간단한 교통사고가 났다. 병원에 하룻밤을 지내고 나왔다. 엄마 아빠의 관심이 온통 집중되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흠뻑 받고, 지난 날의 오해가 풀어졌다.
환난을 당할 때에 얻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된다.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다. 이것이 우리 신앙 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초이다.

최근 CNN은 간판 시사 토크 프로그램인 ‘래리 킹 라이브’를 통해 ‘하나님과 쓰나미’라는 주제의 토론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남침례신학교의 앨버트 몰러 총장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사랑의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셨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믿음을 지닐 때 이 세상의 사건을 통해서 제기되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해본 적이 있느냐”는 래리 킹의 질문에 “한번도 없다”면서 “오히려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아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게 됐다”고 말했다.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의 확실한 사랑을 확증시켜 주셨다. 그러니 내가 어떤 환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오히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깨달아야 한다.
이같이 환난 중에 얻는 것이 분명히 있다. 어떤 사람은 환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환난을 당할 때에 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내가 연약할수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사람도 있으니 얼마나 다른가? 잠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선언하고 자기의 길을 가는 자가 있지만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다. 또 잠언에 이렇게 말씀한다.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같은 환난을 당해서 엎드러지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소망으로 이기는 사람이 있다.

환난을 당할 때에 자기의 길을 가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자. 환난을 당할 때에 엎드러지는 패배자가 되지 말자. 환난을 당할 때에 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자.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 속에 확증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에 환난 중에 이러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겠는가? 본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에 환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여기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대답은 바로 “하나님과 화목한 삶”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아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이 말씀을 들은 야곱이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야곱은 언제나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아왔다. 환난을 당할 때에도 야곱은 흔들리지 않았다.

환난을 당할 때에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자기의 길을 간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확신하고 더욱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한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기 위하여 환난 날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스데반이 예루살렘을 중심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비참하게 죽고 만다.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스데반이 믿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갈 길을 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스데반이 죽은 사건으로 인하여 복음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 저곳으로 멀리 퍼지게 된다. 특히 안디옥 지역까지 퍼지게 되어 이방인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전초기지가 되었다. 사도행전 말씀에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환난은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분명한 점은 환난 중에 얻는 것이 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자.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자.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 환난 중에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자. 그래서 환난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통해서 더욱 고귀한 것을 얻는 기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