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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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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 말씀의 내용은 지난 주일의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마 6장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알게 모르게 물질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매일 매일의 식량의 문제부터 비롯하여 모든 의식주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삶에 경제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물질의 영향이 우리의 삶에 깊숙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자칫하면 이러한 경제적인 힘에 굴복하여 재물을 섬기게 되는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이 놓여 있는 현실 앞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으로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지, 결코 재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하시는 줄 압니다.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 6장에는 그 당시, 경건한 사람이면 마땅히 해야 한다고 여기던 세 가지의 신앙적인 삶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이러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게 하는 신앙의 훈련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정신을 늘 함양함으로 실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재물을 섬기는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이루어 나아가야 하리라 봅니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의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요?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는 하지만 실제 우리는 물질에 더 관심을 가지며, 더 영향을 받으며, 물질로 인해 더 신경 쓰고, 마음을 졸이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봅니다. 때로는 물질의 궁핍함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뒷전으로 미룬다든지, 유보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나오는데, 아마 우리 모두가 다 이렇게 “믿음이 적은 자”의 모습에 속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리 하신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말씀은 어쩌면 우리의 현실을 아시기 때문에 하신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마 6장의 마지막 부분에 나와 있는 말씀은 이러한 믿음이 적은 우리의 현실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에 적절한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후, 그래도 연약하여 실제 삶에서 재물을 섬긴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재물로 인해 많은 영향을 받으며 안타까워하는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 주신 처방의 말씀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마 6장의 결론 부분이라는 이유는 비단 오늘의 말씀이 맨 마지막 부분에 나와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어떤 내용의 결론을 암시하는 접속사 “그러므로”라는 말이 세 번 나오고 있습니다(25절, 31절, 34절). 그런데 유심히 살피면, 이 “그러므로”와 연결되어 나오는 말씀은 다른 말씀이 아니라,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제 생활이나 기도 생활 그리고 금식 생활 등을 통해서 실제의 삶에서 재물을 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그러한 삶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염려하지 말아야”되겠다는 것입니다. 즉, 염려하는 모습이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뒤로 하고 재물을 섬기게 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염려(메림나, merimna)”라는 말은 “조바심하며 걱정하는 마음이나 자세”를 말합니다. 일본말로는 “심빠이”라 하여 “갈라진 마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좀 더 심각하게 표현하면 “어떤 생각에 집착하여서 그것 때문에 진정, 해야 할 다른 일이나 생각은 전혀 할 수 없게 되는 일종의 병리적 심리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염려하는 일”은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아주 친숙한 가운데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염려 속에서 살아간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염려하며 사는 모습은 우리 가운데 아주 친숙한 모습이라고 해서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안 되리라 봅니다.

옛날에 어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짓기를 밥 먹듯 하며 사는 마을이 있었답니다. 이런 현상이 있으면 누구보다도 마귀가 좋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귀가 할 일이 생기니 좋은 것이지요. 그래서 마귀가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하나님, 보십시오. 저기 저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하나님 싫어하시는 일들만 골라 하니, 이제 벌을 내리셔야지요?” 하나님께서는 안타깝지만 할 수 없다고 여기시고 심판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마귀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마을에 사는 사람, 100명의 생명만 네게 허락한다.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잘 알아 모시겠노라고 대답하고는 그 마을을 심판하러 갔습니다. 마귀는 심한 전염병으로 그 마을 사람들을 심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100명을 훨씬 넘어 500명이나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마귀를 불렀습니다. “너는 내가 100명의 생명만 허락했는데, 왜 500명의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느냐?”고 마귀에게 다그치셨습니다. 마귀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분명 100명의 사람의 생명만 해쳤습니다. 나머지 400명은 이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 이 일로 염려하며 무서워하다가 제풀에 죽은 것입니다요.”

이렇게 염려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만큼 우리에게 그만큼 해롭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성질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렇게 염려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 속에서 우리가 염려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여기시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염려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언급하시면서 “이렇게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말씀하시는 데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나를 생각이나 해 주시고 계실까 하는 데에 대한 마음이 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두고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내일 일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염려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4절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미리 염두에 둠으로 염려하는 마음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 앞당겨 생각하는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염려 가운데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염려는 쓸데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염려하는 가운데 의심이 생기고 이 의심은 죄나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그 결과, 불신하는 마음이 생기고 결국 자기 자신의 분열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흔히 남편이나 아내를 의심하는 의처증이나 의부증 환자들의 경우를 보십시다. 이로 인해 살인까지도 일어나는 경우도 봅니다. 이러한 끔직한 결과는 염려하는 일을 미리 막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염려하는 일은 곧 신앙과 관계된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염려하는 일을 금하시는 것입니다. 염려란 다른 한 편으로는 믿어야 할 것은 믿지 않고, 믿지 않아도 될 것을 믿는 데에서 생겨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더 위험한 것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염려하는 자들을 표현하면서, “이러한 염려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9장에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라고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트집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러면 우리가 소경이란 말이냐?”고 따졌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아예 모르고 믿지 않으면 희망이 있겠는데, 하나님을 잘 알고 잘 믿는다고 하니 오히려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염려하는 일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믿지 못하는 모습에서 생겨지는 현상인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염려를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염려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슨 염려를 하다가도 더 큰 염려스런 일을 만나면 작은 염려는 사라지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공부 안 한다고 잔소리하면서 걱정하다가도, 막상 아이들이 병이 나면 입장이 바뀝니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이다.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염려하는 이유 중 하나는 보다 더 큰 염려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염려에 붙들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정작 해야 할 중요한 걱정을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큰 걱정을 하면 작은 걱정은 물러간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해야 할 큰 걱정이 무엇일까?” 여기에 집중적으로 걱정해 본다면 일상의 작은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먼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예를 드신 들의 풀과 공중의 새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나에게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8절,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내게 적용한다는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에 대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내 마음을 여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주로 행위가 없는 사람이 염려가 많다고 합니다. 주로 생각이 많고 행동이 없는 사람이 염려가 많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이면 염려가 사라지는 법입니다. 즉,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자세가 염려를 극복하게 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행위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행동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 역시 일상의 염려를 벗어버릴 수 있게 하는 지침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모든 염려의 근원은 소유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깊이 개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에의 모든 투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33절의 후반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더하여지는 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바른 신앙인들에게 주어지는 모습을 간직할 수 있도록 우리의 현실에서 신앙인으로서의 자세와 모습을 늘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현실의 삶을 충만하게 하고, 더하여지게 하는 삶의 비결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결을 배우고 또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발전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수고하고 있습니다. 저는 비 신앙인들이 수고하고 노력하는 삶의 모습이 “더하기의 삶”이라면, 신앙인은 “곱하기의 삶”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이를 비교해 보면 이와 같습니다.

1 x 0 = 0  //  1 + 0 = 1 (곱하기가 작다)
1 x 1 = 1  //  1 + 1 = 2 (곱하기가 작다)
2 x 2 = 4  //  2 + 2 = 4 (곱하기와 더하기가 같다)
3 x 3 = 9  //  3 + 3 = 6 (곱하기가 많아진다)

그러므로 이렇게 3~4단계의 많아지기까지의 수고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 결과로서의 모습으로 더 하여지는 은혜인 동시에 복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만을 바로 섬기는 진정한 영적인 훈련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 아버지만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기에, 그 틈을 타서 여러 가지 염려와 불안과 답답함이 우리의 마음을 채웁니다. 그리하여 불신과 의심과 초조함과 남을 미워하며 원망하는 그리고 시기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저희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권고하시는 말씀대로 염려하지 않게 하시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마땅한 삶을 살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과 우리 주변의 모든 삶에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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