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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몸을 원하시는 하나님!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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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 1
바울 서신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를 신학이라 한다면, 후반부는 윤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해서 바울 신학은 이론 작업에서 그치는 법이 없고 항상 윤리적 실천 지침까지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신학적 이론은 반드시 윤리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윤리적 실천이 따르지 않는 신학은 온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천이 빠진 신학이란 공허한 말장난에 그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는 좀 반성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는 엄청 듣는데, 그 말씀을 실천하는 면에서 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선 강한 것 같은데 세상에 나가선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아니오, 말씀은 우리의 삶에서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씀을 받았으면 세상에 나가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 2
로마서의 경우, 1장부터 11장까지가 전반부 신학이요, 12장부터 마지막 16장까지가 후반분 윤리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기 12장까지 오는 동안, 마치 알프스 산을 등반하는 산악인처럼, 믿음의 봉우리 하나씩을 정복하면서, 그 때마다 복음의 진리 하나씩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인간론> <죄론> <구원론> <역사론> <종말론> <칭의론> <성화론> 등 난해하고 어려운 신학적 개념들에 대하여 매우 논리적이면서도 분석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울, 그는 신학의 대가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1장 맨 마지막 대목에 와서, 믿음의 산 최고봉에 올라선 사도 바울,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갑자기 자신의 신학적 지식과 논리를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하며, 영광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한 마디로 신학에서 예배로 넘어가는 장면인데요,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산 정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알프스 산 정상에 올라선 산악인처럼, 그는 자신의 발아래 펼쳐지는 장관을 내려다보며,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경배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경배와 찬양을 들어보겠습니다. / 로마 11:33-36 / (읽기) / 33절의 첫 단어를 보실까요? <깊도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깊으심 앞에 무릎을 굻을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자신의 신학적 지식이나 논리가 하나님의 깊으심 앞에선 참으로 초라하고 무색하다는 거지요. 내 지혜와 지식으로 그 분의 판단을 측량할 길 없으며, 그 분의 길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거지요. 해서 36절의 맨 마지막, 영광이 오직 그 분께만 영원히 있을 것이라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매우 중요한 대목인데요,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전반부를 경배와 찬양, 곧 예배로 마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 또 하나는 신학이란 예배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신학은 경배와 찬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제대로 된 신학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송영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신학은 예배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분야의 정상에 오른 분들은 대개 비슷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거기가 끝인 줄 알았던 정상에 올라서 보니,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하나님의 세계가 얼마나 깊은지를 절실하게 깨닫기 때문이요, 그럴수록 나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이지요. 해서 한 분야에서 정상에 오른 분들, 대개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 집니다.

저는 우리 동광교회가 신학과 예배가 균형을 이룬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해서 뿌리 깊은 나무가 많은 꽃과 열매를 맺듯, 신학이란 뿌리가 깊은 우리 교회, 늘 아름다운 꽃과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 하여 마침내 이 어두운 시대에 빛이 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께서 이 소망을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 3
이렇게 해서 드디어 로마서의 후반부인 12장에 도착했습니다.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어 구원에 이른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스도께 영적으로 접붙임 되어 새 사람 된 주님의 제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따라 살아야 하는 윤리적 지침을 주시는 대목인데요,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짚고 갈 것이 있으니, <윤리란 하나님의 은혜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윤리란 감사의 표현입니다.>

무슨 뜻인가? 크리스천에게 주어지는 <윤리적 지침>은 일방적 강요나 강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윤리는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최소한 기독교 윤리는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은혜가 너무 커서,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었습니다. 이렇게 주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삶의 원리와 내용을 적어 놓으니,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되었던 것인데요, 해서 드리는 말씀, 윤리는 의무방어전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라는 겁니다.

문제는 오늘날 <윤리>라는 단어 자체가 시효가 다 된 말 같다는 데 있습니다. <윤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윤리부재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학교 교육에서조차 윤리교육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윤리 교육을 원하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대학 입시에 필요한 점수 몇 점보다 못한 것이 윤리 인 것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윤리를 그렇게 무시했기에 치르는 대가가 얼마나 엄청난지 모릅니다. 해서 <윤리>가 왜 중요한가, 먼저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한 일은, 그렇게 윤리가 습관이 되어 살다보면, 그의 삶이 안정된다는 사실입니다. 해서 윤리라는 단어에 <안정성>이란 뜻이 담겨 있는 것인데요, 정말 그렇습니다. 윤리가 습관이 된 인생, 안정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잘 요동하지 않습니다. 웬만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치우치지도 않습니다. 뒤집으면, 윤리가 습관이 되지 못한 사람의 인생, 자꾸 흔들린다는 거지요. 윤리가 땅에 떨어져 그 인생이 요동하게 되는 건데요, 한 마디로 윤리적이지 못한 인생, 안정감이 없다는 뜻이지요. 종합하면 윤리는 우리의 삶을 안정감 있게 해 주는 참 좋은 습관입니다.

# 4
여기서 12장 1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 12:1 / (읽기) / 첫 단어는 <그러므로>이고요, 주어는 <내가>, 서술어는 <권하노니> 이군요. <그러므로 내가 권한다!>는 건데요. 그런데 권면의 내용이 좀 충격적이군요. <너희 몸을 드리라!>

내 몸을 바치라니요, 좀 심한 말씀 아닌가요? 어째 좀 선정적인 명령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무슨 권리로 나의 몸까지 바치라 하시는 거죠? 백보 양보해서 몸을 바친다고 해도, 몸을 바치라는 말씀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요? 여러 반문이 가능한 대목인데요, 우선 주목할 점은, 이 권면의 근거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는 점입니다. 1절 전반부,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거기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란 표현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모든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권면한다는 뜻인데요, 그 자비하심을 생각할 때, 최소한 몸을 바치라고 충분히 요구할 수 있다는 거지요. 왜? 우리 주님, 이미 당신의 몸을 내어 주셨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윤리적 명령의 근원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어김없이 <형제들아!>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윤리적 지침의 첫 마디에 담겨 있는 형제들이란 호칭 속에 윤리적 명령까지 담겨 있는데요, 중요한 점은 <형제>라는 이 단어 속에서 당시 저들 사이의 모든 차별이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 명령대로 살아가야 할 우리는 이제 한 형제자매라는 겁니다. 윤리라는 지평에서 우린 하나라는 거지요.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통념으론 넘어설 수 없었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 주인과 종 사이의 모든 긴장과 차별의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저들 모두를 <형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린 주 안에서 한 하늘 가족으로 택하심 받았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 원하시는 윤리적 삶을 살아가자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그 권면의 첫 마디가 무엇인가, 오늘의 말씀 제목,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원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자는 것이었죠. 더욱 놀라운 점은, 이렇게 몸을 드리는 것이, 곧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몸을 바치는 예배가 곧 영적인 예배가 된다는 거지요. 몸과 영이 하나 되는 순간이요, 놀라운 신학 윤리적 선언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당시 헬라인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몸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언사였습니다. 왜? 당시 저들은 몸을  더러운 것, 썩어질 것, 특히 우리 영혼을 가두어 두는 감옥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당시 헬라세계에서 몸은 나쁜 것, 더러운 것, 영혼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 해서 속히 벗어 던져버려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몸에 대한 이런 관점 때문에 두 가지 흐름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는 육체적 고행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의 흐름이요, 다른 하나는 어차피 더러운 몸, 재미나 보자는 쾌락주의의 흐름이었습니다. 둘 다 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였는데요, 그런 속에서 많은 종교인들은 몸 보다는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한국 교회 안에도 몸을 백안시하고 마음만 강조하는 흐름이 없지 않은 현실이지요. 이건 옳지 않습니다.

# 5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남는 문제는 내 몸을 어떻게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까 하는 점이군요. 이 문제에 대한 답이 거기 질문과 같이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나의 몸을 거룩한 제물로 바칠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는 겁니다. 내 몸을 산 제물로 바칠 때 하나님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윤리적 과제가 주어집니다. 첫째 내 몸을 거룩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내 몸을 흠 없고 순결한 상태로 유지하라는 말씀인데요, 어느 정도로 거룩해야 하나?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정도로 거룩 하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거룩한 몸이란 어떤 몸을 말하는가? 역시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특별히 구별된 몸이면 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순결하게 잘 간직한 몸이면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진 몸, 그것이 거룩한 몸입니다. 그러니 내 몸이라고 내가 막 굴릴 수 없는 거죠.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된 몸일진대, 이 몸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거죠. 하나님만을 위하여 특별히 구별된 이 몸을 술이나 마약이나 음란물로 더럽힐 수는 없는 거죠. <거룩>이 삶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죠.

이 때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그 거룩한 몸을 죽인 후에 바쳐서는 아니 되고, 산 채로 바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 몸이 가장 왕성하게 살아 있을 때 바치라는 거지요. 정말 중요한 대목입니다. 내 몸 망가진 다음에 바치는 것 아닙니다. 병든 몸 바치는 것 아닙니다. 자기 몸에 힘이 넘쳐날 땐 세상에 나가 자기 맘대로 살다가,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을 가져다 바치는 것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만신창이 몸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싱싱한 몸을 원하십니다. 물론 망가진 몸도 받아 주시긴 하십니다. 만신창이도 품어주시긴 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되기 전에 살아 있는 싱싱한 몸을 바치는 것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 마땅한 도리라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의 사도 바울이 외쳐도, 현대인들은 몸을 달라 하면 싫어합니다. 자기 몸 상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내 몸이 소중하다는 거지요. 해서 내 몸에 좋다는 거라면 뭐든지 먹고, 내 몸이 잘 되는 일이라면 별 일도 다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이는 이렇게 바쁜데 어찌 몸을 달라 하시느냐고 반문합니다. 몸만 빼고 다 드릴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몸 말고 대신 돈으로 드릴게요!> 가장 흔한 답변입니다. 한 마디로 당시 헬라인들과는 정 반대의 입장에서 나의 소중한 몸만은 드릴 수 없다고 말하는 거지요. 그러다가 이 몸이 영혼 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아니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원하십니다. 나의 몸을 바치라 하십니다. 여러분, 몸이 실리지 않은 예배, 그건 온전치 못한 예배입니다. 몸이 실리지 않은 윤리, 그건 외식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배라는 단어를 영어로는 service라 하지요, 예배란 곧 봉사요, 제대로 된 <예배자(worshipper)>는 곧 섬기는 자이어야 한다는 뜻인데요, 중요한 점, 섬김과 봉사는 무엇으로 하나요? 몸으로 하지요. 그렇습니다. 섬김과 봉사는 몸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봉사한다고 하면서 몸은 놔두고 말로만 하는 분, 정말 은혜가 안 됩니다. 섬긴다고 하면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분, 정말 본이 안 됩니다. 그럼요, 몸을 내대지 않는 서비스, 그건 서비스가 아닙니다. 해서 사도 바울, 신학과 예배와 윤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곧바로 몸을 바치라 하셨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요즘 내 몸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내 몸이 하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들입니까? 요즘 내 몸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거룩한 몸 맞습니까? 요즘 내 몸은 살아 있습니까? 더러운 곳에 버려둔 몸은 아닙니까? 혹시 죽지 못해 질질 끌려가는 몸은 아닙니까? 여러분, 내 몸 더 망가지기 전에, 내 몸 더 병들기 전에, 내 몸 더 더러워지기 전에, 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바로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 12:2 / (읽기)

# 6
거기 핵심적인 단어 둘이 있군요. <마음>과 <뜻>, 두 단어에 먼저 동그라미 하시고, 둘을 한 줄로 이어놓으실까요? 그런데 마음은 누구 마음이라고요? 내 마음! 뜻은 누구의 뜻이라고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곧 하나님의 뜻! 무슨 뜻인가? 내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품어야 내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수 있다는 거지요. 뒤집으면 하늘의 뜻을 마음에 품지 못하기에 그렇게 엉거주춤 몸을 제대로 바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하늘의 뜻을 마음에 품고 내 몸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2절 말씀에 그 답이 나와 있는데요, 다시 읽겠습니다. / 12:2 / (읽기) / 두 가지 답인데, 하나는 <하지 말라!>는 명령이요, 다른 하나는 <하라!>는 명령이군요.

첫째 내 몸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은 <본받지 말라!>는 겁니다. 무엇을? 이 세대를! 주신 몸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살아있는 제물로 바치고 싶으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겁니다. 거기 본받지 말라는 말, 따르지 말라는 뜻인데요. 세상길을 따라가지 말라, 혹은 세속의 가치관을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 지속적으로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 사탄의 유혹은 생각보다 훨씬 더 끈질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번 거부했다고 해서 사탄이 금방 포기하는 법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 왔던 사탄이 오늘 또 옵니다. 작년에 왔던 사탄이 금년에 또 옵니다. 그리곤 자꾸 세속의 길로 가자고 유혹합니다. 해서 주시는 말씀, 지속적으로 거부하라는 겁니다. 그런 뜻으로 주신 말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의 구약 버전을 찾아보겠습니다. 레위기로 가보실까요? 레위기 18장입니다. / 레 18:1-5 / 무어라 하십니까? 상대가 애굽이든 가나인 이든, 상대가 일본이든 미국이든, 누구든 상관없이 이방 땅의 풍속과 규례를 따라 행하지 말라는 겁니다. 대신 오직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거지요.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 없음을 잘 아시는 하나님, 못내 저들이 미덥지 못하여, 이 말씀을 뒤집어 경고의 메시지로 만들어 주시며,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 레 18:24-30 / (읽기) / 거기 24절에서 주신 말씀,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하셨습니다. 누가 더럽힌다? 스스로 더럽힌다는 거지요. 무슨 뜻인가? 다 자기 책임이라는 거지요. 누구 탓할 것 하나도 없다는 거지요. 내가 더러워진 것, 모두 내 탓이라는 거지요.

해서 주신 말씀, 이 세대를 본받는 가증한 일을 그만두고, 어서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하신 거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 일, 그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입니다. 문제는 가증한 일로 더럽혀진 인생, 토해 내시고, 끊어버리신다는 데 있습니다. 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신 거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삶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습니까? 이 세대를 맹목적으로 따라 사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이 세대를 끌고 가는 삶입니까? 혹시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들로 스스로를 더럽히고 있진 않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기뻐하실 일들로만 가득한 인생입니까?

물론 크리스천이라 해서 세상을 떠나서 살 순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아니 죽는 그 날까지 우린 이 세상에 나가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세상에 나가 산다고 해서, 이 세대를 본받지는 말라는 겁니다. 세상에 나가 살수록, 더욱 찬란한 광채를 발하며, 이 세상을 이겨 승리하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환경에 따라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은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어디 내 놓아도 변하지 않는 제자, 어디 가져다 놓아도 빛을 발하는 제자, 이 세대를 본받기 보다는 이 세대를 변화시키는 제자, 그런 제자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이겨 승리하는 강한 제자 되시기 바랍니다.

# 7
그렇다면 우리가 주신 몸을 가지고 이 세대 속에서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적극적인 명령 역시 2절에 있는데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 한 마디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새롭게 변화를 받으라는 거지요. 변화를 받아 내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품게 되면, 나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바칠 수 있게 된다는 거지요. 변화라는 단어에 표시하실까요?

그렇습니다. 변화의 힘을 갖지 못한 사람, 이 세대를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의 힘이 없는 사람,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 세대에 길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세대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만한 변화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물결치는 대로, 부평초처럼 떠다닐 수밖에 없지요. 아니오,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이 세대를 따라가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오히려 이 세대를 변화시키라는 거지요. 마음을 새롭게 한다, 마음먹기 달렸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주신 말씀, 아예 나의 몸에서부터 나의 마음까지 거룩한 산제사로 바쳐버리라는 거지요. 그 때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지요.

그러고 보니, 사도 바울에게선 몸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는군요. 참으로 놀라운 말

씀인데요, 마음은 남겨 놓고 몸만 가져온 것 아닙니다. 몸은 숨겨 두고 마음만 가져온 것도 아닙니다. 몸과 마음을 통째로 다 바친 것이지요. 왜?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몸만 바치는 것 아닙니다. 마음만 드려서 될 일도 아닙니다. 몸도 마음도, 나의 온 존재까지 다 바치라는 겁니다. 이 때 우린 비로소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왜? 몸과 마음이 분리된 사람, 몸과 마음 사이에 분열 현상을 보이는 인생, 절대로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원하시는 <변화>란 어떤 변화일까? 놀랍게도 거기 2절의 <변화>라는 단어는, 변화 산에 오르신 주님의 얼굴과 용모와 옷이 변형되어 광채를 발하시던 때, 바로 그 모습을 묘사하며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무슨 뜻인가? 주 안에서 거듭난 성도에게 일어나는 변화란, 곧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거듭나는 변화라는 뜻입니다.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친 성도, 해서 온전히 거듭난 성도, 이제 얼굴만 보아도 그리스도가 보인다는 거지요. 마음만 열어도 그리스도가 느껴진다는 거지요. 그렇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담은 크리스천으로 거듭나라는 거지요. 그렇게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며 살아가라는 거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기에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몸을 원하십니다. 나의 마음이 담긴 거룩하고 살아있는 나의 몸을 원하십니다. 우리, 이번 사순절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나의 몸을 원하시는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절기가 되도록 애써 주시기 바랍니다. 영과 육이 살아있는 절기가 되도록 말씀과 기도로 더욱 무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서 우리가 온 몸으로 순종하며,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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