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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일 좋은 친구 (요 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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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문수 목사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빗 리스만이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에서 한 말입니다. 간단하지만 현대인의 모습을 아주 적절히 묘사한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언뜻언뜻 경험하는 바입니다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이따금 지하철을 탈 때 그런 느낌을 가지곤 합니다. 전동차가 플랫폼에 정차하면 출입문이 열리고 마치 전동차가 토해내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옆 사람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각자 어디론가 급히 걸어갑니다. 마치 달리기시합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틈에 끼어 걷다보면 묘한 기분이 드는데, 문자 그대로 ‘군중 속의 고독’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각박하고 힘든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꼭 필요할까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친구’입니다.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슬프고 힘들 때 위로 받을 수 있는 친구,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친구, ... 이런 진실한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만 한 명, 두 명이라도 그런 친구가 있다면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처럼 진실한 친구를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많지만 진실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는 드문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힘겨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지난 주간 한 여배우의 자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꽃다운 청춘이 스러졌으니 참 안타깝지만, 조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매스컴마다 인터넷 사이트마다, 심지어는 외국에서까지 야단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만큼 인기가 많았던 여배우라서 그렇거니 하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적잖은 사람들이 그의 처지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외롭고 힘들다는 반증입니다. 진실한 친구가 있으면 서로 위로하고 도와가며 극복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하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그 여배우를 추모하면서 어떤 분이 인터넷에 올린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외로움과 좌절감에 빠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 줄 좋은 친구가 있었다면 자살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의 주변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가족들도 있었지만, 그리고 환호하는 팬들이 있었지만 정작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진실한 친구 한 사람이 없었기에 그런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때때로 인생 살다가 답답한 일을 만날 때, 고통에 처했을 때 나를 붙들어 줄 친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행운아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그럴 만한 친구가 없다면 큰 비극입니다.

다행히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진실한 친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제일 좋은 친구’를 소개해 줍니다.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미 여러분이 그분을 만났습니까? 그러면 그분과의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가꾸어 가시기 바랍니다. 혹시 아직도 서먹서먹하고 멀게만 느껴집니까? 그러면 이 시간 그분을 제일 좋은 친구로 마음 속 깊이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독하고 힘든 세상을 사는 동안 그분과 동행함으로 승리하시고, 장차 그분과 함께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제일 좋은 친구 :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 날 저녁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제자들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진실한 친구는 어떤 존재인가 설명합니다.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 진짜 친구는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간혹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것은 희귀한 일이고, 설사 친구를 위해 죽는다 하더라도 그 효과는 미미합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고, 또 그로 인하여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롬5:7~8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러분, 그 당시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사형 틀입니다. 그것은 고통의 극치요, 수치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래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 분이 인간의 형상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왕궁에 오셔도 시원치 않은데,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 사형 틀에 달려 죽었습니다. 무슨 죄 때문입니까?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죽음이었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입니다. 의인을 위해서 죽는 것도 흔치 않은데, 죄인들을 위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리고 일생토록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 외에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우리의 일생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이 세상 떠날 때는 영원한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 한 편의 강도를 보십시오. 그는 평생 죄만 짓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죄를 회개할 때 예수님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눅23:4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정말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책임져 주시는 분입니다. 요13:1 보면 “ ...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5장 보면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100 마리 중 한 마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잃은 양 한 마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내는 그 사랑이 곧 친구이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눅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흔히 사람들이 사귀는 친구가 셋 있다고 합니다. 첫번째 친구는 ‘돈’입니다. 돈 좋죠. 그러나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친구입니다. 어느 날 나를 떠나갑니다. 꼭 필요할 때 오지를 않습니다. 혹시 계속 친구가 되어 준다고 해도 죽음 이전까지만 함께 해 줍니다. 두 번째 친구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사람 친구 필요하죠. 그러나 사람 친구는 배반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와 늘 함께 있어 준다 해도 무덤까지만 따라올 수 있습니다. 그 이후 내세에는 더 이상 도와줄 수 없습니다. 역시 불완전한 친구입니다. 세 번째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어떻습니까?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나와 동행합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그리고 죽음 너머 저 천국까지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해 주십니다. 그분만이 영원한 친구요, 완전한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일 좋은 친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분을 나의 친구로 모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분이 나를 선택하시고 부르실 때 응답함으로 가능합니다. 16절(상).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 예수님은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초청하십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서 문은 ‘마음의 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초청하는 말씀을 듣고 마음 문을 열면 그분이 내 마음 속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마시며 동고동락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친구로 사귀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친구로 삼으면 우리 인생은 행복한 인생입니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고난이 와도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이 좋은 친구 예수님을 모시고 복된 인생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로서 누리는 복

친구끼리는 모든 것을 공유합니다. 예수님은 15절~16절에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특권을 누린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과실을 많이 맺으며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풍성한 삶을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① 동행과 위로 :

세상 모든 게 떠나가고, 그래서 나 혼자 남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그리고 위로해 주십니다. 세상 친구는 배반하기도 합니다. 우리 옛말에 이런 말이 있죠. “정승 개 죽은 데는 가도 정승 죽은 데는 안 간다.” 이게 세상인심입니다. 세상에서는 친구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곁을 기웃거리다 이득 볼 게 없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형통할 때나 답답할 때나 항상 우리 곁에서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마28:20 “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로빈슨 크루소」라는 소설을 아시죠? 영국인 다니엘 데포의 작품입니다. 이것은 실화를 기초로 쓰여졌다고 합니다.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가 탄 배가 난파되어 다 죽고 그 사람 혼자만 남아 무인도에 상륙하게 됩니다. 홀로 버려졌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고독하고 무섭고 ...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폈을 때 눈에 들어오는 성경 구절이 있었는데, 그게 곧 히13:5이었습니다. “ ...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읽고 그는 주님이 자기와 동행함을 깨닫고 감사하며 소망을 갖게 됩니다. 결국 힘든 생활을 잘 극복하고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에게 좋은 친구 예수님이 없었다면 어떻게 무인도에서 승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② 이해와 용납 :

친구끼리는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납됩니다. 혹시 다른 사람은 비난하고 손가락질을 하여도 친구는 다 이해해 줍니다. 그래서 친구가 좋은 것입니다. 우리말에 지기(知己)라는 말이 있죠. 일반적으로 친구라는 말로 알고 있지만 본래는 지기지우(知己之友)의 준말로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구를 가리킵니다. 그런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겁니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실각한 후 하와이에서 망명하다가 임종을 맞이하게 됩니다. 임종 직전에 환국을 소원했지만 당시 정권이 허락지 않아 결국 사망 후에 그 유해가 송환되어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50년 지기인 미국인 친구가 들이닥쳤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외쳤습니다. “I know you! I know you! ... " “내가 너를 안다. 내거 너를 안다. ... ” 다른 사람들은 다 오해하고 비난해도 자기는 이 박사가 애국자라는 것은 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바로 그런 친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바로 전날 밤 베드로는 큰소리치며 장담했습니다. 자기는 절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그러나 예수님이 그의 앞날을 훤히 내다보시고 이러게 말씀하셨습니다. 눅22:34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눅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가 배반할 것을 뻔히 아셨지만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마음속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다만 그의 믿음이 연약해서 배반하게 될 것임을 이해해 주시고 용서해 줄 것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셨기에 베드로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회개한 후 감히 주님 앞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③ 용기와 승리 :

친구는 힘이 되어주는 존재입니다. 곁에 있으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낙심했다가도 친구가 있기에 힘을 얻고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도 사람인데 얼마나 고독하고 힘들고 두려웠겠습니까? 언제 끌려 나가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를 보면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의 모습이 너무 당당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감옥에 있는 건지 바울이 감옥에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그가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좋은 친구 예수님이!
그는 당당히 외칩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3] 예수 그리스도 친구로서 감당한 책임과 도리

우리는 친구로서 예수님에게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친구에게는 도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그의 친구로서 도리와 책임을 다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책임이면서 동시에 특권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친구가 아니라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① 친밀한 교제 :

친구 사이에는 친밀한 교제가 중요합니다. 친구라고 하면서 연락도 하지 않고 교제가 없으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밀한 교제를 요구하십니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가지로서 붙어 있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신앙 인물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모세의 예를 들어보죠. 출33:11 보면 모세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 ”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며 대화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대면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얼굴을 서로 대한다는 의미로 대면(對面)이라고 했지만, 원문 히브리어는 좀 다릅니다. 히브리어로 ‘페 엘 페’인데 이 말은 입술과 입술을 마주 대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을 보면 ‘mouth to mouth’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치 입을 맞추듯 가까이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하게 지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성숙도는 예수님과의 영적 친밀도와 정비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좋은 친구로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에 힘씀으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은 친구로서 도리인 동시에 더 큰 축복을 얻는 비결입니다.

② 말씀의 실천 :

친구끼리는 서로의 말에 순종합니다. 예수님은 본문 14절에서 당신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고 실천해야 진정한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그런데 그의 말씀과 계명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12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7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로서 그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이란 때때로 너무 관념적으로 이야기하고 지나치기 쉬운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친구로서 사랑을 베푼 그대로 우리 이웃에게, 성도들에게 동일한 친구의 사랑을 베풀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당신에게 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좋은 친구가 되고 사랑을 베풀어 줌으로 예수님의 친구로 책임을 다해야 됩니다.

누가복음 10장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도와줍니다. 주막에 데려가서 치료해주고, 씻겨주고, 돌봐줍니다.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가 떠나도 잘 돌봐달라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강도 만난 사람에게 진정한 친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10:37 “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③ 부탁을 들어주기 :

진정한 친구는 친구의 간곡한 부탁을 꼭 들어줍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부탁을 하나 하셨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마28:18~20에 기록된 대로 복음 전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친구로 소개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더 큰 사랑은 제일 좋은 친구이신 예수님을 소개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친구 노릇을 한다 해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다음으로 제2, 제3의 친구로 만족해야 됩니다.

여러분! 인생은 마치 망망한 대해에 떠 있는 외딴 섬과 같습니다. 모든 현대인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좋은 친구가 필요합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제일 좋은 친구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그와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과 승리로 가득한 복된 인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 예수님의 손잡고 꼭 천국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친구가 없어 외롭고 힘들게 살아갑니까? 그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무엇보다 제일 좋은 친구 예수님들 그들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도, 그들도, 그리고 온 세상이 예수님을 친구 삼아 승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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