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요 14:8 ~ 8)

  • 잡초 잡초
  • 377
  • 0

첨부 1


- 설교 : 강구원 목사

요즈음 젊은 부부들이 도시를 등지고 할 일 없이 한적한 산골에 가서 사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생산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장차 그곳에서 여생을 마칠만한 삶의 철학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조 때 자유분방한 사상과 행동으로 미치광이로 취급받기도 했던 허균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그의 성격상 이 세상에서는 벗이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죽은 사람 셋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첫째 사람은 진나라 처사 도연명을 택했고 둘째 사람은 당나라의 한림 이태백을 택했고 셋째 사람은 송나라 학사 소동파였습니다.

그는 당대의 화가 이정(李楨)에게 명하여 이들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그가 친히 찬(贊)을 지어 당대에 명필 한석봉에게 해서(楷書)로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북쪽 창에다 세 군자의 초상을 펴 놓고 거기에 자신이 끼어 합하여 넷이 되니 그가 집을 지어 사우재(四友齎)라고 했습니다.
그가 유배생활을 하며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을 그는 어진이가 겪는 불행이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 군자들은 어떤 경우에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자신이 의인인 줄 알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장황한 서두를 견강부회(牽强附會, 억지로 말을 끌어다 붙여 조건이나 이치에 맞도록 함)라고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변화산의 영광 앞에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에게 홀연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마 17:4-5).
예수님은 땅에 집을 지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군자와는 달리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현실 도피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땅에 집을 짓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빌립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제자들을 자상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아랫사람에게 따뜻한 정으로만 상대하는 이른바 온정주의자(溫情主義者)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요 14:9). 그리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일하신다고 했습니다(요 14:10).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믿으라고 했습니다(요 14:11).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는 말씀은

Ⅰ. 예수께서 행하신 초자연적인 능력이 제 자들을 통하여 계속될 것을 말하는 것입 니다.

본문 14장 12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믿는 자』는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곧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말입니다(요 1:12). 믿음의 결과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요 1:12). 그 결과는 영생입니다(요 3:15,16). 그래서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요 6:47). 성경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행 13:48).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는 믿을 수밖에 없다는 불가항력적인 은총입니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경험에 대한 단순한 지적 합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믿는 자가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결단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보은의 역동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한다"는 말은 예수의 대속사역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절대선언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행하셨던 복음 전파사역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그의 제자들에게도 나타났던 사실들이 이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 『저도』라는 카케이노스( )는 '그 사람도 역시'라는 말입니다.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는 말씀은

Ⅱ. 보혜사 성령을 통한 복음운동의 우주적 확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14장 12절에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은 그의 승천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더 큰일을 한다는 조건으로 나타나는 것은 승천 후에 임하실 보혜사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에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6-18절에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큰 것도 한다는 말은 질적인 의미에서 이적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성령강림과 필연적으로 관계있는 복음전파사역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의 총체적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1) 잘못된 견해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신비주의자들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보다 실제로 더 큰 이적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 없는 공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지상사역과 승천하신 후의 사역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질적 사역인 십자가의 구속사역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사역입니다. 제자들이 백번을 십자가에 죽어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대한

2) 바른 견해가 있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일은 예수께서 육체에 계셨을 때 행하신 일보다 큰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부활을 증거 하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에 약속대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고 구원받기로 작정된 택자들에게 그 성령의 역사가 적용되는 사실을 두고 하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을 하리니』라고 하신 말씀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대로 복음전파의 세계적인 확산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봉사사역 즉, 택자들을 불러내시는 교회 운동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을 받아 주께서 하신 일을 계속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7절에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고 전파할 때 많은 귀신을 좇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했습니다(막 6:12-13).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고 했습니다(행 5:12). 이보다 더 큰 것은 택자 구원의 완성을 향한 예수님의 구속역사의 우주적인 확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는 말씀은

Ⅲ. 우주적인 복음전파의 실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더 큰일은 복음을 통한 세계 선교운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 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라는 말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시간적으로 더 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3년입니다. 그러나 주의 제자들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평생토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지역적으로 더 넓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국한된 복음전파였습니다. 주의 제자들은 팔레스틴 지역 정도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를 포함한 땅 끝까지 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말입니다.

3) 종족적으로 모든 종족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상당수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은 이 세상에 언어와 풍습을 달리하는 각 족속과 방언과 나라와 백성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성령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수많은 능력을 행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뛰어 서서 걸어가게 했습니다(행 3:1-10). 솔로몬 행각에서 전도할 때 남자만 오천이나 되었습니다(행 3:11-26; 4:4). 베드로는 허다한 병자를 고칠 때에 병자들은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병자 위에 지나가기를 바랐습니다(행 5;15, 16).
베드로는 룻다에서 8년 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쳐주고 욥바에서는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렸습니다(행 9:32-43).

바울은 바나바와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제 1차 전도여행에 나섰습니다. 그는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구브로 섬을 경유한 후에 소아시아에 건너갔습니다. 밤빌리아의 버가, 비시디아, 이고니온, 루스드라와 더베 등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제 2차 전도여행에는 실라와 함께 안디옥을 출발했습니다. 그는 드로아 바다를 건너 유럽에 들어가서 마게도냐 지방의 빌립보, 데살로니가, 아덴, 고린도에 이르러 1년간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에베소를 지나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행 16:1-18:22).

제 3차 전도여행에는 소아시아의 내륙지방인 갈라디아, 브루기아 지방을 지나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약 3년 동안 머물면서 선교했습니다. 그 후에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을 포함한 주의 사도들은 그들이 순교할 때까지 예수님보다 시간적으로 더 많은 시간, 지역적으로 더 많은 지역을 선교했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으로 인하여 본격적인 기독교 조직운동이 촉진되었습니다. 교부시대에 들어오면서 기독교박해는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 시기에도 복음전파는 계속되었습니다.

중세기 로마 카톨릭의 박해 속에서도 복음 전파는 계속되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를 거치면서 복음운동은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마침내 1884년 알렌이 우리나라에 입국했습니다. 그리고 1885년 미국 북장로교의 언더우드와 북감리회의 아펜셀러와 스코랜톤이 입국했습니다.
계속되는 미국교회들의 한국에 대한 선교운동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 땅에 교회운동을 가능케 했습니다.

1890년에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비록 작은 나라지만 선교지 분할정책을 구체화했습니다. 1893년 1월 28일 북장로교 선교사 빈톤(Dr. C. C. Vinton) 의사 집에서 한국에 주재하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회집하여 장로교 정치를 쓰는 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했습니다. 이 선교공의회가 중심이 되어 선교지 분할 안을 채택했습니다.
이것을 보통 예양협정(禮壤協定, Comity Agreement)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준하여 다음과 같이 한반도를 분할했습니다.
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미국연합장로교)는 평양, 신천, 제령, 강계, 서울, 청주, 안동, 대구 등 평안도와 황해도와 경상도 지방에 분포되었습니다.
②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지방에 분포되었습니다.
③ 캐나다 선교부(현재 캐나다연합교회)는 함경도 지방에 분포되었습니다.
④ 호주 장로교 선교부는 부산과 경남일대에서 각각 선교운동을 활발히 했습니다.
다른 교단들 즉, 침례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은 분할에 관한 협의가 없었으므로 전국에 흩어져 선교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명실 공히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세계 50대 교회가 작은 나라 한국에만 20개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1,000만 성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만 해도 국내교회보다 해외에 파송된 선교사 교회가 더 많습니다. 2005년도 우리 고려신학교도 신입생 중에 10%정도가 외국인입니다. 이들은 불가불 영어로 강의를 해야만 합니다. 금년부터 고려신학교 재학생은 NIV영어성경을 사용토록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신학교 교수 1명을 단독지원하는 고려신학교 이사교회가 되었습니다. 파키스탄의 임재성 선교사를 단독지원하는 선교교회가 되었습니다.
파키스탄은 우리나라의 1960년대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곳의 GNP는 450불 정도입니다. 우리교회가 약 만 불 정도의 교회당 건물공사를 지원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미 예수님 시대보다 시간적으로 지역적으로 더 많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맹자는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일정한 재산이 없으면 마음을 정하여 쓸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맹자의 이 말은 우리에게 의미적 부여에 공헌을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실제 가치적 의미로써는 합당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모아서 주의 일을 못하는 것은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막 9:23).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뜻이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선교는 교회운동의 핵심이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택자를 찾으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자! 우리 모두 양적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시간과 공간에서 머물지 말고 시간적으로 우리 자신과 함께 오고 오는 자자손손 대대에 이르도록 그리고 공간적으로 지구촌에 살고 있는 65억의 인구를 향해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고 동서남북을 바라보면서 지금보다 교회운동의 열정의 폭과 깊이를 더해 갑시다.

과학지식은 없어도 바람 냄새로 봄을 아는 아낙네처럼 역사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거창한 말은 몰라도 뙤약볕 아래 땅을 일굴 줄 아는 아낙네처럼 사랑을 위해서라면 세상 끝까지 맨발로 가는 여자가 이 시대 우리의 신랑 되신 주님이 요구하는 여자 곧 오늘의 교회상 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의 처소는 주님이 예비하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이 땅의 집은 복음전파용으로서 최소한의 그 기능을 가질 뿐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