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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모호성 (고전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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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존 스토트 박사

변명의 말씀을 한 마디 드립니다. 루이스 팔라우 박사님이 제가 여기 있기 때문에 위협을 느낀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루이스 팔라우 박사님이 여기 계시기 때문에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루이스 박사님의 특유한 유머의 한 부분이라도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분의 유창한 라틴 아메리카적인 웅변술의 한 부분이라도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결국 루이스 팔라우 박사님과 저는 피차 위협을 느끼면서 여러분들 가운데 있습니다. 한 말씀 더 드린다면 지난 토요일 저녁 루이스 박사님이 영국 랭케스터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 좀 무례한 말씀을 한 것입니다. 랭케스터 지역 사람들이 별로 똑똑하지 못하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랭케스터 지역 출신입니다…. 그 정도 웃었으면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십시다. 고린도전서 1장 1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 케직에 모인 여러분들을 하나로 묶는 위대한 것은 교회입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에 속해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해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다양한 종족과 다양한 나라와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교파에서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적인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 이기를 바랍니다. 신약성경은 교회에 속하지 않은 괴물과 같은 신자는 세상에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해야 합니다. 

1 서론: 교회의 모호성

고린도전서가 묘사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모호합니다. 교회의 중심에는 역설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교회가 반드시 지녀야 하는 모습과 교회가 실제로 나타내 보이고 있는 모습 사이에는 고통스런 긴장이 존재합니다. 신적인 이상과 인간적인 현실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낭만적인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모습과 비낭만적이고 순결하지 않고 추한 우리들의 모습 사이에는 너무나 큰 긴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영광스러운 하늘에서의 모습과 현재의 영광스럽지 못한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 사이에는 고통스러운 긴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 교회의 모호성(ambiguity)이라고 부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절과 2절에서 사도 바울은 편지의 저자인 바울 자신과 편지의 수신자인 고린도 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합니다. 편지의 수신자들을 가리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사도란 말이나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은 매우 고상하고 존귀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란 말은 첫째로 단회성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를 직접 본 증인을 말합니다. 셋째로 성령의 특별한 영감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는 단회적인 독특한 직분과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는 특별한 권위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약은 사도들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경솔하고 어리석은 말을 합니다. 바울은 1세기의 신학자이고 나는 21세기의 신학자이며 바울이 신학적 권위를 가졌다면 나도 똑같은 신학적 권위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어떤 신학자는 최근에 말하기를 우리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다고까지 무모하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우리는 사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성경을 쓴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에게 성경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결국 바울은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도적 사역은 수행할 수 있지만 사도는 될 수는 없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고린도는 전략적인 도시로 제조업과 무역의 중심지였고 아프로디테와 아폴로의 신전이 서 있는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린도는 또한 부도덕의 도시였는데 고린도인이 된다는 말은 부도덕한 삶을 산다는 뜻이었습니다. 고린도는 에에게 지역의 수도였습니다. 바쁘고 부요하고 부도덕한 도시였는데 상인들과 순례자들과 운동 선수들과 여행가들과 창녀들이 우글거리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교적 도시 안에 적은 무리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공동체 속에 신적인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사는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 섞여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향기로운 꽃이 냄새 나는 진흙 속에 피어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여기서 우리는 이미 교회의 양면적 모호성(ambiguity)을 보게 됩니다.

2 교회의 거룩성과 풍족성과 일체성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에 인사를 했고 그 다음 감사를 했고 그 다음 호소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인사와 감사와 호소의 편지 가운데서 교회의 본질적인 특성인 모호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의 인사 가운데는 교회의 거룩성을 지적했고 그의 감사 가운데는 교회의 풍족함을 지적했고 그의 호소 가운데는 교회의 일체성을 지적했습니다.

1) 첫째 인사 부분에서(1-3) 사도 바울은 교회의 거룩성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거룩하여진 사람들, 과거 완료형의 시제로, 과거에 이미 거룩하여진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동시에 성도가 되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거룩하여짐을 입었지만 동시에 아직은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교회에 적용됩니다. 교회는 거룩성과 함께 비 거룩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모호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거룩하여짐을 입은 하나님의 교회인 동시에 아직은 거룩해지지 않은 머뭇거리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싸움과 교만과 안일함과 부도덕과 비방함과 무질서와 자만심이 가득한 불완전한 공동체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양면적 모호성(ambiguity)이 드러납니다.

2) 둘째 감사 부분에서(4-9) 사도 바울은 교회의 풍족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회의 은혜 받음과 축복 받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내용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실입니다. 그들이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5절에서는 그들이 풍족하게 된 것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모든 일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전도에 있어 풍족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7절에서는 그들이 영적인 은사를 충만히 받아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된 것을 지적합니다(7절). 참으로 놀랄만한 감사의 조목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사를 받아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족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완전한 교회처럼 보입니다. 모든 면에 충족하게 되어 아무 일에도 부족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개인개인이 모든 은사를 충족하게 받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역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모든 은사들을 골고루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야기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가 은혜를 받았고 은사를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풍족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물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충만한 은사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온전하게 될 날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사의 부분에서 이렇게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그들은 아직까지 책망할 것이 많은 불완전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완전한 자로 만들어질, 지금은 불완전한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미쁘심과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하나님의 미쁘심과 신실하심에 근거해서 우리는 그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완전한 자로 변화될 것입니다.

3) 셋째 호소 부분에서(10-17)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체성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도 모호성이 드러나는데 교회는 하나가 되었지만 여전히 갈라져 있는 존재였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합니다. 2절은 교회의 일체성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에는 여러 개의 가정 교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하나의 교회, 갈라지지 않은 하나의 교회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바울은 거듭해서 말씀했습니다.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교회가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의 교회, 성령의 전인 하나의 교회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한 아버지가 있는 것처럼 한 가족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한 분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에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도 하나밖에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믿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기 때문에 한 분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에게 접붙임을 받은 교회도 하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한 교회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갈라져 있습니다. 우리들이 갈라질 수 없는 교회를 여러 갈래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호소의 부분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지적하며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0절과 11절에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호소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아버지를 믿는 형제들과 자매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하나님께 속한 형제 자매들 이였는데도 불구하고 피차 모순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의 호소의 근거는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이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근거해서 호소했습니다. 그 이름보다 더 높은 이름이 없는 그 이름, 그 이름에 의해서 모든 신자들이 세례 받은 그 이름,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근거해서 바울은 호소했습니다. 저들은 인간들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베드로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저들이 주장하는 인간들의 이름들로부터 오직 한 이름으로 저들의 관심을 되돌리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으므로 서로 갈라지면 안 된다고 호소했습니다. 비록 다투는 일이 있을지라도 분열하면 안 된다고 호소했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12절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다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을 따르고 어떤 사람은 아볼로를 따르고 어떤 사람은 게바를 따르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며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들 여러 종류의 집단들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이 있었습니다. 19세기 독일 신학자 F. C. Baur는 초대교회는 바울을 따르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집단과 베드로를 따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으로 극명하게 갈라져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모든 문제를 바울파와 베드로파의 극단적인 대결의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F. C. Baur의 주장의 근거는 고린도전서 1장 12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이 말씀을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어떠한 신학적인 입장이나 교리의 차이로 갈라져 있었다는 근거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성격의 문제 때문에 갈라져 있었습니다. 어떤 원리에 의해서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파당심에 의해 갈라져 있었습니다. 자만심과 질투심과 자랑이 저들을 여러 갈래로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분열상에 접하며 마음이 매우 무거웠습니다. 바울이 저들의 형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저들의 주인이 아니라 저들의 형제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형제들의 분열을 바라보며 바울은 마음이 상했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에 속한 형제요 고린도 교회 신자들도 그리스도에 속한 한 형제들 이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분 그리스도에게 속한 형제 자매들입니다. 그들의 분열의 원인이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문제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분열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적인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3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첫째 질문은 그리스도가 나뉘어 졌느냐라는 것입니다. 즉 한 분 그리스도 이외에 또 다른 그리스도가 있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뉘어 져서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분들을 각각 소유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라는 강한 부정이었습니다. 나뉘어 지지 않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만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바울이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박혔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힌 바울을 믿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라는 강한 부정의 답변이었습니다. 그런 말은 신성 모독적인 말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게만 우리의 구원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그들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도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라고 답변했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의 표시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표시였습니다. 결국 저들의 분열은 중요한 교리의 손상까지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의 분열은 그리스도가 한 분이심을 부인하게 되어 결국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이름이 손상을 입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14절 이하에서 바울은 세례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저들은 세례를 베푼 사람들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세례를 받아 접붙임을 받게 된 그리스도 자신보다 세례를 베푼 사람들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자기가 세례를 별로 베풀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잠시 기억을 더듬으면서, 자기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와 그리고 스데바나 집 사람 외에는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세례를 베푸는 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세례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로 세례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가 바울을 사도로 삼으신 것은 세례를 베풀라고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세례의 중요성을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주어진 특수 사명은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고 개척자적 설교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전문성은 복음에 있었지 복음을 가시화하는 성례에 있지 않았습니다.

3 완전주의도 패배주의도 아닌 현실주의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교회의 모호성(ambiguity), 이것을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속해있는 지역 교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서적 그리스도인들은 완전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 완전한 교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빌리 그래함 박사가 자주 한 말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완전한 교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완전한 교회를 발견하고 그 교회에 속하는 순간 그 교회는 이미 완전한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성서적 그리스도인들은 완전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반면에 성서적 그리스도인들은 패배주의자도 아니고 비관주의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공동체 안에 죄와 허물을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완전주의자들을 향해서 교회의 순수성과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은 옳지만 이 땅에서 완전한 교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 이전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를 흠 없고 점 없는 완전한 교회로 드러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패배주의자들과 비관주의자들에 대해서 교회 안에 죄와 허물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옳지만 죄와 허물을 묵인하며 완성을 향한 훈련을 게을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결함을 입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악가운데 있으며 거룩해지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교회는 풍성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허물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교회는 하나가 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한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불필요하게도 분열되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두 시대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 도래한 왕국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왕국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신적인 이상과 인간적인 현실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 까지는 이상이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에야 모든 모호성이 사라질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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