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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좌우와 동서남북 (창 1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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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학교에서 시험을 칠 때 ‘사지선다형’ 문제를 많이 보게 됩니다. ‘다음의 보기들 중에서 맞는 것을 골라라.’하고 네 개 중에 하나의 정답을 찾는 형식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롯 앞에 그런 문제가 주어진 한 사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를 선택하는 ‘이지선다형’의 문제로서 일이삼사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사지선다형’ 문제보다는 일견 쉬워 보였지만, 내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정답은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라 아예 문제 바깥에 있는, 아주 맞추기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틀린 사람에게는 그 인생에 엄청난 마이너스가 따라오게 되어 있는 반면에, 이 한 문제만 제대로 맞추면 그 사람에게는 그 인생 전체에 만점이 주어지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본문 창세기 13장 1절부터 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남방」을 거쳐서 「벧엘」 즉 가나안을 향하여 돌아오는 여정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정착생활을 시작했던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에게 곧 아주 중요한 인생 선택의 문제가 닥쳐왔습니다. 그 문제에 대하여 롯은 어떤 오답을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어떤 정답을 찾았는지를 상고해 보면서, 저와 여러분이 인생의 여로에서 자주 맞부딪히게 되는 선택의 기로에서 과연 어떤 올바른 선택을 내려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눈앞의 현실 이익에만 집착하고 자신과 가정의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인생 선택입니다.

창세기 13장 5절부터 9절의 말씀에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롯 역시 장성하고 아브라함을 따라다니는 동안 자기 재산을 많이 불렸습니다.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다」라는 말은 그들의 주된 산업이었던 목축업을 하는 동안 제한된 공간 안에서 목초를 찾고 가축 먹일 물을 찾으려 하니 자연히 갈등과 다툼이 생겼다는 뜻인데, 그 발단은 쌍방의 목자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때 우선 아브라함은 그 목자들 간의 다툼이 당사자들 간의 다툼으로 발전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라고, 롯을 불러서 말했던 것입니다.

흔히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아내들끼리의 싸움이 남편들끼리의 싸움으로 쉽게 발전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서로 다른 구역원들 사이의 불화가 담당 교역자들 간의 불화로, 교인들끼리의 철없는 다툼이 목사와 장로들 간의 싸움으로 발전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집니다. 정말 그런 유치한 마귀의 수법에 간단하게 말려들어간대서야 신자로서, 교회로서 얼마나 창피한 일이겠습니까?

그런 싸움을 방지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택한 방법이 바로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선택권을 양보한 것이었습니다. 목축업에 있어서 목초지를 양보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돈 잘 벌리는 가게자리를 양보하는 것과 꼭 같은 것으로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문제라면 몰라도 돈이 걸려 있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핏줄이고 뭐고 다 뒷전으로 밀어버리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돈보다는 혈육의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하고, 친구지간의 우정이, 이웃 간의 정분이, 성도 간의 의리가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좀 기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양보의 미덕’이 점점 사라지고 오히려 ‘양보하면 손해’라는 사고방식이 판을 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기독신자들까지도 그런 사고방식에 물들고 있는 것은 정말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아저씨가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면서 ‘조카 먼저’하고 나왔을 때, 그 조카는 ‘아저씨 먼저’라는 빈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자기가 좋은 쪽을 데꺽 먼저 집어 먹었습니다. 10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롯은 당장 ‘오른쪽이 좋은지 왼쪽이 좋은지’ 열심히 계산하기 시작하면서 ‘요단 들판’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땅은 그의 눈에 당시 풍요의 땅 그 자체로 유명했던 「애굽 땅」처럼, 그리고 「여호와의 동산」 즉 마치 말로만 듣던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고 기름지게 보였습니다. 즉 그는 세상 불신자들과 꼭 같은 관점과 판단을 가지고서, 세상 불신자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동일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롯이 간과했던 맹점은 바로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라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직전까지는 도무지 ‘장망성’으로 보이지 않았으며 그 주변의 경치는 오히려 ‘여호와의 동산’처럼 아름답게 보이기만 했던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답을 선택하자마자 롯은 당장 새 사업처가 있는 곳으로 이사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고 했는데, 이 말은 처음에는 소돔성 주변의 작은 동네들에 살다가 점점 더 가까운 쪽으로, 결국 소돔성 안까지 이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점점 더 돈을 많이 벌게 되니까 더 큰 아파트도 있고 더 좋은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대도시 안으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업처의 선택과 그런 이사 과정에서 롯이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던 사실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이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이나 자녀의 신앙교육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눈곱만큼도 생각해보지 않고, 그냥 돈 잘 벌리는 직장과 재미있게 살 수 있어 보이는 동네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최악의 오답이었고 롯의 인생은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결국 그는 전 재산을 다 잃고, 그의 아내와 사위들은 불신앙 가운데 멸망하고, 그의 딸들은 아버지와 근친상간까지 저지르게 될 정도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단 한 문제 틀린 결과 롯의 집안과 사업과 자녀교육에는 엄청난 벌점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롯과 같이 순전히 세속적인 축복관을 추종하고 세속적인 성공 비결을 따라서 선택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선택 과정에 그 어떤 영적인 고려, 본인과 가족의 신앙생활에 미칠 영향에 대한 고려는 조금도 없이 그저 어찌하든지 돈 잘 벌 수 있을 것 같은 길만 쫓아다니고 그 다음에는 그 돈 가지고 마음껏 향락할 수 있는 생활만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도 하나님께서 최후심판을 가지고 ‘멸하시기 전까지’는 ‘이게 바로 천국 아닌가?’ 싶은 곳처럼 보일 수도 있고, 그저 돈만 많이 벌어놓으면 자신만의 ‘에덴동산’을 이룩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현혹되어 그 쪽을 정답으로 찍으면 그 장망성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는 날 같이 망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과 사업을 찾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숙고하십니까? ‘어느 회사에 들어가면, 어떤 업종을 선택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 이것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녀 결혼시킬 때 며느릿감, 사윗감 고르는 기준은 어떻습니까? 정말 평생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순결한 반려자가 될 사람을 찾습니까, 아니면 불신부모들 하고 꼭 같이 인물, 학력, 재력만 따져서 결정해 놓고 ‘신앙생활은 저절로 어떻게 되겠지.’하고 어물쩍 넘어가고 계십니까? 출석할 교회를 고르는 문제는 본인과 전 가족의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짓게 되는 정말 중요하기 짝이 없는 선택인데, 과연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십니까? 그냥 거리 가까운 교회, 혹은 아무 부담 없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교회를 찾아다니십니까, 아니면 그 교회가 어떤 교단에 속하였고 어떤 신조를 가지고 있고 어떤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인지를 먼저 알아보고 나서 최종 결정을 내리십니까?

‘맹모삼천지교’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처럼 불신자들도 적어도 자녀 교육만큼은 염두에 두고 이사를 한다는데, 교인들 중에서도 ‘이 선택이 나와 내 자녀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하는 점은 도무지 안중에 없고 그저 돈, 고급 아파트, 좋은 학군, 일류대학, 이런 것들만 그 눈에 ‘여호와의 동산’처럼 보이고 무조건 그 쪽을 선택해 놓고 보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 그런 오답을 찍은 행위에 대한 결과는 결국 찾아오게 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바로 불신자들, 장차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는 악한 소돔 사람들이 찍은 것과 같은 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답을 선택한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이, 개인의 인생을 망치고 재산을 날리게 되고 자녀가 타락하게 되는 치명적인 벌점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택이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세속적 조건, 현실적 이익에만 끌려서 마음대로 판단, 결정 다 내려놓고서, 그것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여호와의 동산’ 같이 되게 해 달라고 염치없이 바라다가 결국 모든 것 다 잃고 말았던 ‘롯의 오답 인생’의 전철을 결코 다시 밟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생활에 최우선을 두고 나머지 인생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최선의 인생 선택입니다.

창세기 13장 14절 이하 18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고 했습니다.

원래부터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좌우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한다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즉 롯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그 결과가 아브라함의 선택에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눈앞에 보이는 ‘좌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장은 그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래까지 오직 하나님의 판단에 맡겨 놓고 그 말씀의 인도하심만을 따라서 살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대신 선택해 주신 땅도 그 ‘좌우’ 중에 롯이 먼저 택하고 남은 한쪽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아브라함을 위하여 친히 땅을 선택해 주시면서 하신 말씀은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다 주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땅이니 ‘좌우’에 보이는 땅은 물론 당연히 포함되는 땅이었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이지선다형’에는 들어있지도 않던 땅들까지 아예 ‘몽땅 다’ 합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브라함더러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가나안 땅은 그때까지는, 그리고 사실 아브라함의 전 생애가 끝날 때까지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축복의 ‘약속’에 불과했지 축복의 ‘실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땅을 마치 자기 땅처럼 활보하면서 살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소유권을 이미 받은 사람처럼 마음껏 음미하고 실컷 즐기면서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자기 인생의 구심점으로 붙잡은 아브라함은 이제 가나안 땅의 남쪽 중심부에 위치한 헤브론에서 새 생활 터전을 잡게 됩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또다시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은 것」이었습니다. 아까 4절에서도 아브라함이 애굽을 떠나 「벧엘과 아이 사이」에 도착했을 때 이전에 거기에 쌓아 두었던 단을 중심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했었습니다. 즉 어디를 가도 일단 예배생활 중심, 신앙생활 중심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살기 좋아 보이는 장소부터 고르다가 신앙생활을 결국 망치고 말았던 롯과는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입니까? 인생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따르고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저 교회 중심으로 사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선택이었고 틀림없는 정답이었던 것입니다.

강철왕 카네기에 대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린시절 어머니를 따라서 식료품 가게에 간 어린 카네기는 아주 맛있게 생긴 빨간 앵두가 담겨 있는 그릇 앞에 서서 군침을 삼키면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주인아저씨가 “얘야, 먹고 싶으면 한 주먹 가지고 가렴.”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카네기는 꼼짝하지 않고 계속 앵두를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어머니도 “아저씨께서 허락하셨으니 어서 한 줌 집으렴.”하고 말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그 주인이 직접 자기 손으로 한 움큼 가득 앵두을 집어서 주자 카네기는 자신의 모자를 내어 받았습니다. 가게에서 나왔을 때, 어머니가 카네기를 보며 “아까 주인아저씨가 집어 가라고 할 때는 왜 안했니?”라고 물었습니다. 카네기의 대답이, “그 아저씨 손이 제 손보다 훨씬 더 크거든요. 제가 만일 제 손으로 한 움큼 집었더라면 조금밖에 못 가졌겠지만, 아저씨가 집어 주시니까 제 모자에 받아 담을 정도로 많이 주셨잖아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롯처럼 내 손으로 붙잡겠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은 기껏 해 보았자 자기 손 한 움큼 만큼밖에 못 쥐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에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큰 손으로 자기에게 집어 주시기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받아 둘 곳이 차고 넘치는 축복, 그 영육 간의 기업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쫙 퍼지는 최대최고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성도는 이처럼 성경 중심으로 살게 되어 있고, 진짜 성경 중심으로 사는 성도는 또한 반드시 교회 중심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장로님께서 당신의 아드님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온 천지에 좋은 학교들이 많이 있는데도, 그 두 아드님들을 제가 살고 있던 동네 부근에 있던 아주 작은 기독교 중고등학교에 보내셨습니다. 그 아드님들의 실력이나 장로님의 재력을 가지고서는 정말 얼마든지 유수한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으셨는데, 그런 전혀 뜻밖의 결정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 장로님 내외분께 여쭈어 보았더니, 그 아드님들이 미국 가서도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가까운 학교를 찾다보니 그 학교가 되었다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들의 마음 속에는 당신의 자녀들을 유학 보내면서도 어찌하든지 교회 중심으로 살도록 해야 하겠다는 그 일념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분들이 발견했던 정답은 ‘오른쪽 학교인가 왼쪽 학교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학교를 가도 일단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이 최우선’이라는 데에 있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선택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장로님 부부를, 그런 자녀들을 ‘동서남북에 보이는 땅’ 전부로 축복하지 않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인생 문제를 선택하는 것은 ‘롯의 약삭빠른 선택’보다는 아주 굼뜬 선택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것은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도저히 이길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는 비현실적 판단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신앙생활’ 중심의 판단과 결단들이야말로 문제의 출제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정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답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그 인생에 ‘만점’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어떤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더라도 만사 다 제쳐 놓고 일단 신앙생활을 최우선으로 두고 나머지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에 맡김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통하여 좌우뿐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펼쳐진 기업을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 역시 이 인생 여로에서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선택은 알쏭달쏭하고 난해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그냥 ‘운수에 맡기고’ 아무 쪽이나 찍어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경우에 아브라함처럼 정답을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정답을 ‘둘 중에 하나에서 자기가 찾으려’ 하지 않고, 그 대신에 ‘문제 내신 분이 정답을 아실 터이니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기막힌 발상을 했습니다. 실로 우리 인생에 그런 어려운 갈림길을 주시고 선택의 순간에 서도록 하신 하나님이야말로, 그 문제에 대한 정답을 정확하게 잘 알고 계실 것이 너무나도 틀림없으니, 그것은 정말로 현명한 문제풀이 자세였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정답은 우리의 눈앞 현실세계에서 보이는 ‘두 개의 보기’에 들어있지 않고 문제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른쪽 답인가, 왼쪽 답인가?’에 있지 아니하고 ‘무조건 신앙생활 중심’, 바로 여기에 항상 정답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회사에 들어가야 장래가 있을까?’ 할 때, 그 정답은 ‘이 회사인가, 저 회사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가든지 주일성수부터 확실히 하는 바로 여기에 정답이 있습니다. ‘어떤 장사를 해야 돈 잘 벌까?’ 할 때, 그 정답은 ‘이 업종일까, 저 업종일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일단 하나님의 것 십일조 바치는 생활부터 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어떤 과외선생한테, 어떤 학원에서 공부를 시켜야 우리 애가 좋은 대학에 갈까?’라는 문제의 정답은, 일단 주일 예배생활과 S.F.C. 성경공부에 부지런히 참석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어떤 동네가 살기 좋고 집값 오르는 곳인가?’라고 질문하기 전에 참된 교회를 먼저 찾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 터전을 잡고 살아야 만이 그 장막터가 사방으로 펼쳐지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둘 중에 하나’를 바로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그 둘 다 정답이 아니고, 진짜 정답은 늘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여기에만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답은 어떤 문제가 나와도, 그 어떤 인생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에도 항상 정답이 되는 기가 막힌 답입니다. 만병통치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신앙생활 중심’이야말로 ‘만제해결답(萬題解決答)’ 즉 ‘만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답’인 것입니다. 좌우만 비교하면서 고르고 고른다는 것이 기껏 소돔성에 이르고 결국 다 잃게 되는 어리석은 ‘오답 인생’이 아니라, 매사를 ‘오직 신앙생활 중심’이라는 이 한 가지 정답으로 해결함으로써 동서남북에 펼쳐 주신 하나님의 큰 기업을, 가정과 생업과 자녀를 통하여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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