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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하지 말라 (마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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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지난 주일에는 오늘 본문의 바로 앞의 말씀으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염려하는 그러한 습관이 자기도 모르게 지속되다보면 결국은 삶에서 하나님보다는 재물을 섬기게 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씀인 줄 압니다. 오늘은 “비판하지 말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지난 주일의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씀과 연관이 된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염려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비판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일종의 염려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을 향해 잔소리하거나 비난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럴 경우, 상대방에 대한 염려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건 다 네가 잘 되라고 하는 소리야!” 이렇게 상대방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잔소리도 하게 되고, 이것이 지나쳐서 비난하는 모습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지나치게 되면 오늘 본문에서 금지하는 비판하는 일도 서슴없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판”이라는 말은 원문이 “크리노(krino)”란 말인데, 이는 “무엇인가 판단하거나 판정(judge)하여 결정(decide)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비판이라는 말에는 결정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말과 관련하여 우리는 두 종류의 판단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사실판단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판단하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빨간 색을 보고 “빨갛다”고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사실판단은 판단을 내리는 당사자의 주관이 들어 있지 않은 판단입니다. 또 하나의 판단은 가치판단입니다. 예를 들어, 빨간 색을 좋아한다거나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은 빨갱이다”라고 판단을 내리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판단은 판단을 내리는 사람의 주관이 깊게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가치판단에 속하는 영역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씀의 의미는 가혹한 판단이나 성급한 정죄를 하지 말라는 뜻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대소사를 막론하고 성급한 결정이나 판단으로 상대방을 어려움에 빠뜨리는 일을 금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눅 6:37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예수님의 명령을 좀 더 알기 쉽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이렇게 비판이란 말을 정죄라는 말과 함께 사용함으로써 이 비판이란 말을 예수님이 어떤 의도로 사용하셨는지를 좀 더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살아가는 현실에 있어서 “사실판단”은 잘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삶에는 우리의 판단에 근거한 결정이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식적인 사실판단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혜롭게 잘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사실판단을 잘 지님으로 우리는 어떤 결정에 대한 바르고도 책임적인 자세와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의 사이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Reinhold Niebuhr 목사의 이러한 기도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여, 나에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태연함(Serenity)을 주시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용기(Courage)를 주시고, 그리고 이 둘을 잘 구별할 수 있는 지혜(Wisdom)를 주옵소서.”("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우리들도 이 기도문을 통해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자세와 태도가 무엇인지를 먼저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판단하는 일은 우리들의 대인관계에 있어서 아주 깊은 영향을 주가 때문입니다. 특히 가치판단으로 이루어지는 일일수록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이가 아주 좋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오해를 하여, 판단을 그르치게 되면 아주 원수같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판단을 하건, 비판을 하건, 중요한 것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당사자, 곧 자기 자신을 잘 살피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취지를 가지고 제자들을 향해 “비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대인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당시에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면서 지내셨는지에 대해서 상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겸손이란 어떤 모습인가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I. 우리들의 대인관계의 자세는?

우리들의 대인관계와 관련하여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왜 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비판한다는 것은 주로 잘난 사람이 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높은 사람이나 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성격의 일입니다. 스스로 볼 때, 못났다고 생각하거나, 지위가 낮다고 생각하거나 힘이나 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불평은 할지언정 그렇게 쉽게 비판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크리스천으로서의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우월감을 경계하는 의도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자기도 모르게 어떤 우월 의식을 가짐으로 이러한 우월의식으로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게 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크리스천으로서 지녀야 할 대인 관계의 자세는 어떤 자세여야 하겠습니까? 크리스천의 대인 관계는 한 마디로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대인관계를 이루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즉,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으시는 사람, 곧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장 대신 손님을 모시러 나가는 회사 직원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기 회사의 사장을 대신하여 그 손님을 깍듯이 맞이하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이웃을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만나고 접촉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께서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자세를 가지고 대인관계를 이루어나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대인관계를 해 나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떤 우월의식에 사로잡히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입장에서 우리의 대인 관계에서 나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자세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과 배경으로 인간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이러한 모습이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자세로 대인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눅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among you / within you)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엉뚱하게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 안에” 곧 “우리들의 인간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러한 바른 인간관계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알고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II. 예수님의 대인관계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인간관계를 이루어야 하겠습니까? 사실,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사이가 좋을 때에는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부부사이도, 친구 사이도, 또 같은 교회의 교인사이도 서로 사이가 좋을 때에는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인간관계가 다 이렇게 사이좋게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갑자기 사이가 나빠진다든지, 관계가 깨질 상황에 놓이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당시 종교 지도자,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대할 때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좋은 관계에 있었다기보다는 안 좋은 관계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였는지를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나와 있는 내용을 흔히 “논쟁기사”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논쟁기사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대할 때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으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이들을 대하고자 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과 적지 않은 마찰도 생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 7:16절 이하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그리고 25절에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소개됩니다. “이 사람은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더냐?” 이렇게 예수님은 갈등의 상황에서 자기의 주장이 아닌, 보내신 자, 곧 아버지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고자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러한 불편한 대인관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난 곳이 바로 마 23장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말씀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 말씀하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라고 복수 인칭으로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어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개인을 향해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 그룹, 바리새파 사람들이라는 공적으로 모인 단체를 향해 꾸짖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적인 단체란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지닌 집합체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공적인 단체에서는 개인적인 의견이 용납되기 어려운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구조적인 힘에 대항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어떤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모습이기에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더욱 단호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어떤 개인을 향한 판단의 경우에는 아주 신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요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향한 예수님의 판단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을 향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렇게 개인을 향해 어떤 판단을 할 경우에 있어서 그 판단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어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때, 과연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판단을 내리는가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누구를 비판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책임져야 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비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판함의 근거되신 하나님이신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III.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크리스천의 겸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의 깊은 의미는 겸손한 대인관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겸손에 대해서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기독교가 없어질 수 있을지라도 크리스천의 겸손은 남으리라”라는 말을 했고,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기독교인의 제일 첫째가는 덕목은 겸손이다. 둘째도 겸손이고,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했습니다. 겸손이란 바로 이렇게 우리 기독교를 대표하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의 3-4절을 깨닫는 모습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또 이 주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바로 겸손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말씀을 적용하고자 하는 곳이 바로 크리스천 공동체 즉,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이 바로 우리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겸손하다는 것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부단히 살핀다는 점에서 우리 개신교회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개신교회 즉, 개혁교회란 영어로 Reformed Church라고 합니다. 이 말은 개혁되는 교회란 의미인 동시에 늘 개혁하는 교회(Reforming Church)라는 의미입니다. 즉 교회는 이 마 7:3-4의 이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 우리 교회 안에 있는 들보를 발견하여 빼 내고자 노력할 때에야 비로소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회의 기본적인 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늘 산모의 고통이 있는 것이고, 이러한 교회에 몸담고 있는 크리스천은 이러한 산모의 고통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골 1:24에서 “내가 이제 여러분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아프더라도 우리 스스로에 뿌리 박혀 있는 들보를 캐내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5절에서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기 쉬운 교회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개혁하는 자세를 지닐 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잘못된 것을 빼낼 수 있는 자격과 권세를 주신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 나 자신을 향해서는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적용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염려하고 걱정하는 나의 모습이 발견될 때마다 “염려하지 말라”하신 주님의 권고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염려와 걱정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나를 지키는 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적용하면서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판단이 사실판단인지 가치판단인지를 먼저 구별하고, 사실에 바로 접근한 판단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는 자세를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견지해 나갈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와 우리의 모든 대인관계를 바르게 잘 지켜나갈 수 있게 됨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이루는 모습으로 향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의 대인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우리 스스로에게 만족되지 못한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들로 하여금 잘 판단해야 할 것은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하여주시고, 비판하지 말아야 할 것은 비판하지 않는 자세를 허락해 주셔서 우리들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늘 겸손하여서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향하기에 앞서, 그 시선을 나 자신에게 먼저 향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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