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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웰빙 (요삼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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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요즘 우리 사회에 ‘웰빙’(well-being)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2000년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 말이 우리 나라에도 이제 모든 것에 웰빙이란 말이 붙어 다닙니다. ‘웰빙’이란 말은 행복, 안녕, 복지 등으로 정의합니다. 하지만 가장 알기 쉽게 말한다면 ‘잘 먹고 잘살자’는 것입니다.

  웰빙을 추구하는 사람을 ‘웰빙족’이라고 부릅니다. 적어도 웰빙족은 몇 가지 그들이 따르는 규칙이 있다고 합니다. 우선, 인위적이고 도시적인 것보다는 자연적인 것을 가까이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요가나 단전호흡, 명상과 관련된 운동을 통해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외식이나 인스턴트식품, 패스트푸드(fast food) 보다 슬로푸드(slow food)를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육류를 피하고 생선과 유기농산물을 많이 먹는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화학조미료나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행이나 레저, 스포츠 등을 통해 삶의 여유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한다고 정말 웰빙이 되는 것일까요? 진정한 웰빙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 의미에서 웰빙은 크리스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를 향하여 웰빙을 말합니다. 본문은 성경적인 웰빙을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특히 2절에서 잘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범사가 잘되고 육체가 강건하고 모든 것이 형통한 삶이 웰빙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가르치는 웰빙은 ‘우선 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강건이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고, 범사가 잘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선 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먼저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웰빙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으로 말하는 이 말씀에는 세 가지의 우선 순위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첫째, 영혼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조는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웰빙을 육체에만 치중하고 영혼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웰빙은 육체보다 영혼이 먼저입니다.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 집니다. 육체가 강건하더라도 영혼이 병들면 많은 어려움이 생깁니다. 아무리 모든 일이 형통하고 잘되어도 영혼에 문제가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보다 영혼이 훨씬 중요합니다.
20세기에 미국에서 그야말로 웰빙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에델 듀퐁’이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버지인 ‘유진 듀퐁’으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갑부였습니다. 또한 그녀는 아주 뛰어난 미모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댄 훌라워 라는 미술가는 그를 가리켜 미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미인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셋째 아들과 결혼해서 큰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 여자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부귀와 미모와 권세까지, 정말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남부러울 것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49세의 젊은 나이에 자기의 집 목욕탕에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갖춘 여인이었지만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육체는 웰빙했지만, 영혼은 웰빙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여인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영혼이 잘되어야 육체가 잘되는 것입니다.

  왜 영혼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육체의 특징으로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3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이 말은 곧 우리의 육체를 욕심과 연결시켜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육체의 특징입니다. 육체는 늘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요, 끝없는 욕망의 분출구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는 욕심이 늘 지배합니다. 사람들이 여기에서 좀처럼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육체의 만족을 채우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욕심에 끝이 없습니다. 있는 것으로 족할 줄 모르고, 받은 것에도 감사하지 못합니다. 소유의 기준은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적은 사람은 적다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많이 가진 사람은 자족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더 인색하고, 더 가지려고 합니다. 이것이 육체를 가진 인간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먹을 것이 넉넉하고, 지금 사는 삶이 좋아서 더 가지려고 분주하게 지냅니다. 그는 육체의 웰빙만을 신경을 쓰고, 영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부자를 오늘밤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가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으면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다 놓고, 그냥 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욕심만 통제되고 점점 없어져도 우리 인생은 성공입니다. 그 욕심을 통제하고, 자족하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바로 영혼의 힘입니다. 영혼이 건강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자에게 이런 힘이 있습니다. 영혼이 잘되면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영혼이 잘되면 육체의 욕망보다 영혼의 만족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웰빙을 위하여 우리의 육체보다 영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내 영혼이 잘 되는 길을 위해 육체에 투자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 투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속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말씀하는 ‘범사’나 ‘강건’은 모두 인간 삶의 겉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우리의 속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잘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을 안다면, 이제 속이 먼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웰빙은 겉보다 속을 가꾸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웰빙은 겉을 가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겉이 탄탄해도 속을 가꾸지 않으면 마치 빈깡통처럼 요란할 뿐입니다. 속부터 채워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웰빙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이 부분에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보면 나무랄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은 더러운 탐욕과 욕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을 주님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아무리 무덤에 회를 칠해 환하게 보여도 그 속은 송장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겉이 아니라고 속이요,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속을 잘 다듬기 위해서는 겉과 속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겉 사람도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후패 한다는 것입니다. 점점 늙고, 낡아집니다. 새 자동차가 나중에 중고가 되어 자꾸 고장이 나는 것처럼, 우리의 겉도 처음에는 윤기가 흐르듯 번듯해 보이지만 세월이 가면 고장이 납니다. 여기에 순응하고,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합니다. 우리가운데 아무도 늙고 싶어 늙지 않습니다. 세월이 후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 후패하는 속도가 나이가 먹을수록 더욱 빨라집니다. 그래서 세월의 속도를 자동차의 속도와 비교하여 말합니다. 20대에는 20키로로 가고, 50대에는 50키로 간다는 것입니다. 점점 가속도가 붙습니다. 이렇게 빨리 겉 사람은 후패합니다. 늘 느끼는 것처럼,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머리도 희어지고, 민첩성도 떨어지고, 조그만 뛰어도 숨이 차고, 잠자고 일어나면 어깨와 허리가 쑤시고, 왕성하던 젊음의 열기가 점점 없어집니다. 마음은 모든 것을 할 것 같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처럼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그러나 속은 더욱 새로워지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고린도 후서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속이 건강해야 합니다. 속을 가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웰빙입니다.

  어떻게 속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성경은 그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33절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소망으로 삼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이제 여호와를 앙망하는 새 힘으로 독수리같이, 청춘같이 그렇게 속 사람이 강건해 지시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보이지 않는 것이 먼저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와 영혼을 비교해 보십시오. 육체는 보이는 것이요, 그러나 영혼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고 가꾸는 것이 진정한 웰빙입니다.

  보이는 것도 특징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그 중요한 특징을 말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요, 순간적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인들이 이것에 철저하게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1998년에 미국인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던 영화가운데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의 내용이 아주 독특합니다. 트루먼이란 서른이 된 남자가 있었는데, 간호사인 아내와 보험회사에서 일을 합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익사현장을 목격한 뒤 물에 대한 공포증이 생겼지만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아버지가 살아오고, 난데없이 하늘에서 조명등이 떨어지는 등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그는 의심해 본 적 없는 일상에 물음표를 던지기 시작합니다. 알고 보니 그는 태어날 때부터 방송사에 의해 길러져 왔던 것을 알게 됩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까지 조정되는 거대한 스튜디오 마을에 갇혀 곳곳에 숨겨진 5천여 대의 카메라를 통해 그의 24시간, 365일의 삶이 전세계에 생중계 되어 왔던 것입니다. 30년을 애인이나 친구와 길거리 행인까지 모두 연기자들 속에 진짜이자 가짜인 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라 연출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지금까지 쇼 아닌 쇼의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이 영화가 나온 뒤, 어떤 평론가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인공 이름이 '트루먼' 즉 '진실한 인간'(True man)인 것은 다분히 상징적이라는 것입니다. ‘진실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 미디어가 생활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시대에서 인간이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을 이 영화는 트루먼이란 주인공을 통해 던지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보아야만 믿는다’고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현대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허점을 가진 현대인을 속이기는 아주 쉽습니다. 무엇이든지 보여주기만 하면 무조건 믿기에 정치인들은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여론을 이끌고 갑니다. 기업인들은 이런 약점을 적극 활용하여 광고에 수십 억씩의 돈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모두 진실입니까? 기술이나 컴퓨터나 특수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시대에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실상인지 허상인지를 가리기가 어렵고, 무엇이 진실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TV에서 진짜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가짜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깨우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믿던 모든 것을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은 큰 것이 좋은 것이라고 믿었는데, 작은 것, 작은 자가 귀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큰 길이 좋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주님은 작은 길에 생명이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좋은 것이라고 믿고 어떻게 하든지 부자가 되려고 했는데, 주님은 오히려 천국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권력이 좋은 것이라 믿고 그것을 얻으려고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주님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믿었는데, 주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날마다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웰빙입니다.

  특히 어려움과 고난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바울이 ‘보이는 것이 잠깐’이라고 말한 것의 중요한 의도는 바로 고난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지나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어려워도 지나가고, 영원한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이요, 이것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것이 진정한 웰빙입니다. 지금의 고난은 앞으로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 지나갑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 앞에 영광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간섭과 해결과 축복과 은혜가 영원히 임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보이는 것에만 고정되었던 시선을 보이지 않는 세계로 향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를 가두어 놓았던 고정관념의 울타리를 벗어나 넓은 하나님의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진짜 같은 가짜에 속지 말고 성령이 보여주시는 영적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우리가 진리를 알았다면, 그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여 부르신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일입니다. 이제 진정한 웰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육체보다 영혼이 먼저이고, 겉보다 속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진리 안에서 이 진리를 따라가면서, 우리의 삶이 건강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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