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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리더의 축복을 받는 4가지 길 (딤전 5: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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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 일본을 이기려면 리더를 키워야 합니다 >

요즘 독도 문제가 시끄럽습니다. 일본의 망언으로 다시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이 점차 우경화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고이즈미 수상은 야스꾸니 신사에 가서 나라를 위해 죽어 신이 되었다는 일본군 전사자 앞에서 참배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일본 사람들이 반성을 모르고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향수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감정적인 극일 계절풍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실질적인 힘을 길러야 합니다. 지금 일본은 장기불황에서 탈출해서 다시 일어서고 있습니다. 10간의 불황을 딛고 일어서는 경제력이기 때문에 과거보다 더 체질이 강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경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좋은 리더를 길러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리더의 축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리더의 축복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훌륭한 리더를 길러내야 하고 우리 자녀들을 훌륭한 리더로 키우기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피상적인 반일감정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일본을 알아야 합니다. 일본을 연구해야 합니다. 무조건 싫다고 하지 말고 저들이 왜 지금의 일본이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일본이 지금의 일본이 될 수 있었던 33세에 죽은 한 젊은 청년의 힘이 컸습니다.

< 사카모토 료마의 생애와 비전 >

얼마 전, 일본의 한 유력 언론기관에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지난 1천년 동안 일본에 가장 공헌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 질문에서 1위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였고, 2위는 오타 노부나가(織田信長)였고, 3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였습니다. 이 3명 모두가 사무라이(武士) 출신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일개 유랑 사무라이였지만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명치유신을 이끈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였습니다.

료마는 어렸을 때 울보였고 겁쟁이였습니다. 게다가 글을 배우는 속도가 늦고 경서를 깨우치는 속도도 늦어서 료마의 부모는 “검술이라도 가르쳐보자!”'며 도장에 입문시켰습니다. 그런데 검술에 특이한 재능을 보여 고향에서는 아무도 이 겁쟁이의 검술을 당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부모는 그를 에도의 소치바 도장에 유학을 보냅니다. 그러자 그의 검술실력은 더욱 탁월해져 전국 검술대회를 휩쓸고 천하제일검이 되고 소치바 도장의 학생장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소치바 도장은 존황양이(천황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배척함) 사상을 옹호하며 막부 군부정권을 토벌하자는 토막파(討幕派)에 속해 있었습니다. 일본의 군부정권을 막부 정권이라고 하는 이유는 군부정권의 수장인 쇼군(장군)이 거주하는 천막이 최고의 권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로서 아무 힘도 없이 비참하게 살고 있었고, 대신에 도쿠가와 막부 군사정권이 실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 때문에 한국은 양반 중심으로 신분차별이 있었지만 일본은 사무라이 중심으로 신분차별이 있었습니다. 일반인들은 게다(일본 나막신)도 신지 못하고 짚신을 신어야 했고 길을 가다가 정식 사무라이와 마주치면 무릎을 꿇고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처럼 사무라이들의 행패가 심해지면서 민중들의 원성으로 토막파들이 점차 세력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 즈음에 막부 정권의 카쓰 카이슈라는 신하가 서양식 해군 훈련소를 만든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소치바 도장에서 그를 암살하러 갈 때 료마도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카쓰 카이슈는 암살범들을 보고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막부를 타도해 새 시대를 만들겠다는 것은 좋다. 그러나 서양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제 서양을 배워 일본도 강해져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해군력이 있어야 한다!”

그 말에 료마는 크게 감명을 받고 오히려 그의 제자로 입문하여 해군 훈련소 사감이 됩니다. 그러나 얼마 후, 스승인 카쓰 카이슈가 막부에 의해 근신처분을 받고 해군 훈련소가 폐쇄되자 그는 훈련소를 떠나 가메야마라는 해운회사를 설립합니다. 그 회사가 동양 최초의 주식회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료마의 친구가 넘겨받아 오늘날 미츠비시 그룹의 모체가 됩니다.

그때 막부 정권은 토막을 추진하는 대표적인 번인 쵸슈번을 정벌하려고 했습니다. 만약 쵸슈번이 무너지면 일본은 다시 막부시대로 돌아갈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료마는 중립을 지키던 사쓰마번과 쵸슈번의 중재에 나서 원수지간인 두 번을 하룻밤사이에 친구로 만듭니다. 결국 쵸슈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쓰마에 대량의 쌀을 공급하고, 사쓰마는 만일을 위해 사두었던 서양식 총포를 쵸슈에 제공하며 1866년 1월 8일에 ‘토막 동맹’을 결성합니다.

그처럼 막부 정권과 토막 동맹 사이에 최후의 결전을 앞둘 때 료마는 내전은 나라의 힘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해서 같은 고향 출신의 막부 중신 고오토 쇼지로를 설득시키고, 쇼지로의 설득으로 막부의 쇼군이 통치권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이끌어냅니다. 또한 스승 카쓰 카이슈를 설득하고, 다시 카이슈가 막부를 설득하여 에도성을 무혈개성하게 됩니다.

결국 그가 꿈꾸던 대로 대정봉환이 이루어짐으로 675년 동안 계속되던 막부 정권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천황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게 되는 중앙집권적 근대국가가 되었습니다.

쇼군이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환하던 날 밤, 료마는 토막파 지도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새 시대의 청사진을 제시합니다. 그 청사진에는 내각제, 헌법, 정부, 국회 등의 서양식 국가체제가 그려져 있었고, 각 지도자들이 어떤 관직에서 어떤 일들을 해야 할 것인지가 모두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 청사진대로 명치유신을 통해 각종 개혁을 단행하여 일본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지만 료마는 곧 33세의 나이로 암살을 당합니다.

료마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지금 일본 사람들에게는 이순신 장군처럼 가장 위대한 선각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실질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것은 29세였기 때문에 그는 단 4년만의 활동으로 일본의 가장 위대한 선각자가 되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그런 엄청난 일을 하려면 50세는 넘어야 할 것 같지만 30대 초반의 청년이 그 일을 해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습니까? 그것은 그가 ‘존황토막’이라는 기막힌 이슈를 선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이상의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경제계의 리더가 될 수 있고, 기막힌 이슈를 선점하면 정치적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이기려면 리더를 키워야 합니다.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이기려면 좋은 리더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리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위대한 리더가 되는 길 >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젊은 목사로서 어떻게 교회를 잘 이끌고 갈 것인지에 대해서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리더십학의 교과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에는 좋은 리더가 되는 많은 원리가 쓰여 있는데 오늘 본문에도 위대한 리더가 되는 몇 가지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리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앞선 리더를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리더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리더를 존경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료마가 평범한 사무라이로 있다가 명치유신에 뛰어든 것은 카쓰 카이슈를 암살하러 갔다가 그로부터 해양의 비전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한 때부터였습니다. 그처럼 정적이라도 리더에게 무릎 꿇을 줄 아는 자세가 결국 그를 리더로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도 좋은 리더를 만나지 못하면 좋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누가 좋은 리더를 만납니까? 리더를 존경하고 존중하는 자가 만납니다. 리더를 우습게 알면 리더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재라도 리더를 우습게 알면 리더가 되기 힘들고, 범재라도 리더를 존중하면 리더가 됩니다. 만약 천재가 리더를 존중하면 엄청난 비전을 이루는 폭발력이 나올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이 구절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는 오늘날의 행정을 담당하는 장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은 오늘날의 목사를 의미합니다. 즉 사도 바울은 교회 리더들을 존경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앞선 리더를 존경하는 자에게 리더의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요새 각종 매스컴을 통해 보면 “존경할만한 교회 리더가 과연 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위기입니다. 하나님은 리더가 완벽하고 모범적이어서 존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리더이기 때문에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들은 끊임없이 자기반성을 통해 존경받는 리더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들은 목회자를 최대한 존경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존경을 표현해야 합니까? 본문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 2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리더가 필요로 하는 것을 힘써 채워줌으로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신명기 25장 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곡식을 타작할 때 곡식 단을 마당에 펴고 그 위로 소가 지나가게 함으로 타작을 했습니다. 그때 어떤 인정 없는 주인은 소가 곡식 단을 먹지 못하도록 입에 망을 씌웠습니다. 그런 인정머리 없는 잔인한 태도를 막기 위해 소도 일하면서 곡식 단을 먹을 수 있도록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아예 율법으로 정했습니다. 그처럼 일하는 사람이 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이 있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 당시에 몇몇 교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은혜로 하는 것이지 무슨 사례가 필요한가? 사역자는 배가 고파야 더 기도하게 되고 더 영성이 깊어져!”라고 하면서 풀타임(full time)으로 일하는 사역자의 필요에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그런 태도는 리더를 존경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진정으로 존경한다면 목회자의 필요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지도자를 존경하는 태도로는 지도자에 대한 고소를 주의하는 것입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신명기 17장 6절 말씀을 보면 ‘두 세 증인’은 판결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었지만 장로의 송사와 관련된 경우에서는 ‘두 세 증인’이 송사를 접수하는데 필요한 조건이었습니다.

왜 장로에 대한 송사를 어렵게 했습니까? 리더는 근거 없는 모함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확대 해석하면 리더에 대한 근거 없는 비판이나 비난을 조심해야 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리더를 존중해야 합니다.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면 리더에 대한 인신모독성 글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때로는 리더도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비판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리더를 존중하는 태도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리더의 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리더를 존중해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편견과 편벽이 없어야 합니다

본문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이 구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지도자의 덕목으로 편견과 편벽이 없어야 하는 것을 유달리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지도자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품을 수 있어야 하고, 한 가지에 집착하기보다 언제나 더 좋은 것을 수용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료마는 고베 해군 훈련소가 폐쇄되자 그간 배운 해양지식을 활용해 해외와 상거래를 시작해서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상인을 천시했습니다. 그래서 사무라이가 장사를 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었지만 료마는 그 생각의 장벽을 깼습니다. 그는 단선적인 사무라이 정신을 가지고는 근대화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편견을 깨고 복선적인 상인 정신으로 자신을 무장했습니다. 결국 경제적 성공을 통해 정치적인 영향력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요새 우리 성도들의 경제적인 축복을 위해 많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도전의 말씀을 많이 하기로 했습니다. 사무라이들이 상인을 천시했던 것처럼, 솔직히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부자를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돈을 아예 멀리해야 신앙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생각은 무서운 편견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돈을 멀리하면 돈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 가게 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돈을 잘못 쓰면 인간 공동체의 아픔과 갈등은 치유될 수 없습니다. 그 책임은 어디에 있습니까? 돈을 멀리한 믿는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이 돈을 무조건 멀리하는 것은 사명을 버리는 것이고 책임을 망각한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도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잘 쓰면 됩니다. 우리는 돈이 나쁘다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돈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나쁜 것이 될 수도 있고 좋은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자에 대한 잘못된 편견도 버려야 합니다. 잘 쓰는 부자는 누구보다 존경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복선적인 상인 정신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편견과 편벽에 사로잡혀 있으면 집돼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멧돼지는 살든지 죽든지 그냥 내버려두기 때문에 자생력을 가지고 날렵해집니다. 그러나 반면 집돼지는 집에 가둬 놓고 먹여주고 재워 주기 때문에 위기의식도 없고 미련합니다.

이제는 장벽을 쌓을 때가 아니고 개방을 할 때입니다. 장벽을 쌓으면 점차 죽어가고 개방을 하면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 생겨도 점차 살아납니다. 무엇보다 개방하면 개척정신과 기업가 정신을 얻게 되고, 책임의식은 발전하고, 생명력과 창조력도 늘어나게 됩니다. 반면에 외부세력이 무서워 울타리를 치고 있으면 능력도 후퇴하고 역사도 후퇴하게 됩니다.

이제 설교 강단도 개방되어야 합니다. 교인을 빼앗길 것을 염려해서 자기 성도들이 다른 목사님 설교는 아예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게 하면 결국 그 교인들은 외눈박이 교인, 사팔뜨기 교인, 맹목적인 교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개방해야 목회자 본인에게도 도전이 되고 더 노력하고 더 기도하게 됩니다. 요새는 목회자가 아무리 다른 설교를 못 듣게 막아도 여러 경로를 통해서 다 듣습니다. 차라리 넓은 마음으로 개방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정보화시대입니다. 개방은 대세입니다. 개방을 거부하면 시대의 낙오자가 될 것입니다. 남의 좋은 것은 열심히 받아들이고 응용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정보화 시대의 최대의 무기는 탈피입니다. 벽을 깨뜨리고 껍질을 깨뜨려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 자녀가 리더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면 무엇보다 시야를 넓혀주어야 합니다. “나는 과거에 이랬다!”는 말을 삼가고, 과잉보호와 자식 감싸기를 중단하고, 새로운 것을 많이 보게 해야 합니다. 30만 원짜리 과외를 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30만 원짜리 패키지여행을 보내는 것이 자녀에게 더 많은 배움을 줄 것입니다. 그처럼 열린 마음과 열린 시야를 준비할 때 리더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진지하고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본문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이 구절에서 ‘안수’는 ‘항존직을 임명하는 안수’를 말합니다. 즉 목회자, 장로, 안수집사를 안수할 때 아무나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경솔히 안수를 주어 항존직으로 임명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리더는 진지하게 자기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인품과 도덕성이 탁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리더는 인간적인 매력과 모범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리더는 진지해야 합니다. 국민감정이 고조되어도 리더는 침착해야 합니다. “일본은 없다”는 식의 감정적인 접근은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는 주지만 진지한 자기성찰을 방해해서 오히려 극일(克日)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수시로 도발하는 말에 국민들의 분노는 이해하지만 리더가 침착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혜를 잃어버리고 오히려 일본의 계략에 당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무너뜨릴 때 말 한 마디로 우리의 오장육부를 뒤집어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말이 들려도 침착할 수 있어야 우리는 사단의 전략에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1995년 11월 7일 일본의 에토 다가미 총무처 장관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한국에 좋은 일도 했다”는 망언을 했습니다. 그때 대통령까지 흥분해서 “이번에야말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의 대 일본 외채가 200억 달러가 넘었기 때문에 일본은행이 마음만 먹으면 우리나라는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질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외채 위기가 현실로 다가왔을 때 우리는 재경부 차관보를 일본에 보내 외채 상환 기간의 연장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행들은 자기들의 유동성 확보라는 명목으로 매정하게 돈을 회수해갔습니다. 그것이 외환위기의 시작이었습니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다가 오히려 호되게 당한 것입니다. 국력의 뒷받침이 없는 감정과 허세가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지 모릅니다. 외교의 힘은 경제력과 군사력만큼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오기와 자존심을 가지고 일본을 따라잡는 소중한 에너지로 분출하지 못하고 실익이 없는 감정풀이와 저주로만 분출하면 우리는 계속 일본의 농락을 당할 것입니다. 지도자는 민족감정을 창조적 에너지로 잘 승화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일본의 위치가 어떤지를 냉철히 분석하고, 제 3자들이 일본인과 한국인을 어떻게 비교해서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분석해야 합니다. 그 일이 고통스럽지만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처럼 진지하고 침착한 자세로 사물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리더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4. 항상 떳떳하고 당당해야 합니다

본문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디모데는 유대인의 금욕주의적인 계율(민 6:1-21; 렘 35:5-8)에 따라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만 마셨지만 중동 지방의 오염된 물로 인해서 소심한 성격을 가진 디모데는 위장과 관련된 병에 자주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금욕주의적인 계율에 연연하지 말고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술을 먹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치료 목적이라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 김진태 목사님이 맥주를 취할 정도로 마신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몽골의 김재호 선교사님에게도 맥주를 먹으라고 권고해서 김재호 선교사님도 담대하게 맥주를 한 박스 사서 마셨습니다. 그 이유는 담석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묘한 일이지만 담석을 치료하는데 이뇨성분이 있는 맥주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의 권고로 두 분 다 거의 20년 만에 맥주를 마신 것입니다. 그런 것은 치료 목적이니까 괜찮다는 것입니다.

리더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난받을 일 같아도 떳떳한 일이라면 그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뚝심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비난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행과 악행은 시간이 지나면서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본문 24-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선행도 결국 드러나고, 악행도 결국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 자신만 떳떳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말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료마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자기 부정과 무욕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랑 사무라이였지만 각 영주들에게 당당히 충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자기 부정의 정신으로 떳떳하게 살면 삶의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실제로 명치유신을 성공하고 신정부를 세웠을 때에도 각료의 명단 중에 자기의 이름을 넣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자기 파괴’가 있어야 ‘자기 창조’가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무너지는 삶’을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무너지더라도 십자가 안에서 무너지면 됩니다. 그리고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해 나가면 됩니다. 사람의 판단에도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피와 땀과 눈물은 항상 정직하게 그 대가를 줄 것입니다.

요새 일본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좋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일본 여성들 사이에 한국 남성들은 일본 남성들이 가지지 못한 주관, 추진력, 리더십과 남성다움에 이끌려 국제결혼 대상 1순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여성에 대해서도 미인상의 기준으로 삼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일본은 없다”는 식의 허탈한 부정론에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은근히 잠재해있는 ‘우월감으로 감추어진 열등감’ 때문에 쉽게 감정을 노출하고, 그것 때문에 극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무엇인가 지고 있는 듯한 의식에서 나오는 ‘앙앙대는 삶’이 아닌 정신적인 면에서 이미 일본을 이긴 자로서 ‘당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 일본 사람들이 료마를 1천년 역사상 최고의 인물로 보았겠습니까? 그들은 료마로 상징되는 명치유신을 최고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일본은 명치유신을 떠올리고 있고, 료마를 그리워하고 있고, 료마를 찾으면서 우경화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더욱 깨어 근신해야 합니다. 나라가 약하면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힘도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좋은 리더가 나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녀들 중에서 탁월한 리더가 나오기를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큰손들이 나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이제 온갖 패배의식을 버리고 리더의 축복을 준비하는 복된 교회의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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