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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예고편 (레 16:6~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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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문수 목사

지금은 교회 절기로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四旬節, Lent)은 부활절 7주 전 40일 동안 진행되는 절기입니다. 부활절을 준비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고 신앙을 새롭게 다지는 기간입니다. 7주 가까운 기간인데 40일인 이유는 주일을 제외하고 계산하기 때문입니다.(주일을 제외하는 이유는 주일은 어디까지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므로 십자가 수난과 구별함) 그리고 사순절은 수요일부터 시작됩니다. 그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르는데, 재는 죄의 회개를 상징합니다. 사순절이 어떤 절기인지 그 성격을 암시하는 명칭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혹시 매년 부활절과 사순절의 날짜가 달라지는 이유에 대해 궁금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어느 해에는 부활절이 4월이었는데, 어느 해에는 3월이고 ... 예를 들어 작년에는 부활절이 4월 11일이었는데, 금년에는 3월 27일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양력으로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리고 둘째는, 부활하신 날이 주일인데 양력으로 지키면 평일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논란을 거친 끝에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부활절 날짜를 다음과 같이 지키기로 결의했습니다. “춘분을 지난 만월(보름) 바로 다음 주일을 부활절로 지킨다!”(금년 기준으로 말하면, 3월 20일이 춘분, 24일이 만월, 그 직후 주일인 27일이 부활주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연유로 매년 부활절이 달라짐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각설하고, 사순절이 이제 3주 가량 남았는데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보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세 번에 걸쳐 십자가와 관련된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십자가 예고편」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 수천 년 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준비되고 예언되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요, 신약 성경은 그 성취이다.” 더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구약은 예수님에 대한 예고편이요, 신약은 본편이다.” 정말 구약 성경을 잘 살펴보면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예고편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의 특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의미를 시각적으로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예를 두어 가지만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유월절 어린 양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풀어주지 않는 바로왕의 기를 꺾고자 하나님이 열 번째 장자 죽음의 재앙을 시행하십니다. 집집마다 장자가 죽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비방을 알려줍니다.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그대로 한 이스라엘은 모두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넘어간다(pass over)는 의미로 유월절(Passover)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 어린 양의 피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는 피를 예표한 것입니다. 또 민수기 21장 보면, 불뱀 사건이 나옵니다. 불신앙과 원망으로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불뱀으로 징계합니다. 온 몸이 퉁퉁 부어 죽어갑니다. 울부짖는 백성을 위해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이 비방을 알려줍니다. 놋으로 동일한 모양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면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난다는 겁니다. 그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들은 정말 다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는 사실을 암시하는 예고편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십자가 예고편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죄일(贖罪日)에 거행된 속죄제사입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십자가 구원의 은총을 풍성히 누림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구약의 속죄일 : 온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 제사의 날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지금의 양력과 다른 종교력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유대력’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대력으로 매년 7월(티쉬리) 10일에 ‘속죄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속죄일은 온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많은 절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하이라이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속죄일에 드리는 제사 절차는 꽤나 복잡합니다. 그 모든 절차를 간단하게 간추려 놓은 구절이 본문 6절~10절입니다. 그 중에 6절을 먼저 보시죠.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 대제사장(본문에서는 초대 대제사장 아론)이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한 속죄 제사를 먼저 드립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을 대표해서 속죄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자기도 역시 죄인이므로 먼저 자기 죄를 위한 속죄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속죄일의 중심 제사는 아니고, 정말 중요한 핵심 부분은 7절 이하입니다. 7절.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 ” 이 ‘두 마리의 염소’를 가지고 속죄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2] 두 마리의 염소 : 속죄제 염소와 아사셀 염소

속죄일에 드려진 ‘두 마리의 염소’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8절 이하에서 살펴봅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두 마리 모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십자가 예고편이었습니다.

8절.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두 염소는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염소를 골라야 합니다. 물론 ‘흠 없는 수컷’을 선정해야 됩니다. 그 이유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죄가 없어야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대속할 수 있습니다. 두 마리 염소는 각각 구별되어 색다른 모습으로 드려집니다. 각각을 구별하기 위해 제비를 뽑습니다. 대제사장은 제비를 뽑아서 각각의 염소 머리 위에 올려놓습니다.

9절.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하여 선택됩니다. 그것이 곧 ‘속죄제 염소’입니다. 흠없는 염소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고 죽어갑니다. 대제사장은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에 뿌립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속죄가 이뤄집니다. 대속의 원리입니다. 물론 여기서 염소의 피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러니까 속죄제 염소의 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흘리실 대속의 피를 예표합니다.

10절.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나머지 한 마리의 염소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로 구별됩니다. 아사셀 염소는 산 채로 두었다가 광야 벌판으로 보냅니다. 이것 역시 다른 한 마리 염소와 더불어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시각적으로 설명해 주는 십자가 예고편입니다.

[3] 아사셀 염소 : 십자가를 통한 완전한 속죄의 상징

① 명칭 :

아사셀 염소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먼저 그 명칭에 관해 알아봅니다. ‘아사셀’은 성경 원어 히브리어로 ‘에즈’(염소)라는 말과 ‘아잘’(떠나다, 보내다)이란 말의 복합어입니다. 그래서 아사셀은 ‘떠나가는 염소’ 혹은 ‘보냄을 받은 염소’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염소(scapegoat)라는 뜻입니다.

② 머리 위에 안수 :

21절~22절.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대제사장은 먼저 아사셀 염소의 머리 위에 두 손으로 안수합니다. 동시에 백성의 죄를 회개하며 고백합니다. 이것은 백성의 죄를 무흠한 염소에게 덮어씌우는 ‘죄의 전가’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무흠한 염소의 의가 백성에게 전가됨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덮어쓰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겁니다. 동시에 믿는 자에게 그의 의를 덧입혀 줍니다. 즉 ‘의의 전가’입니다. 말하자면 서로 바꾸기(exchange)를 한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이중전가’(二重轉嫁)라고 부릅니다. 고후5:21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애매하게 몰려서 로마 총독 빌라도 법정에 섰습니다. 빌라도가 아무리 살펴봐도 무죄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의 반란이 두려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덮어쓰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대속의 원리요 이중전가의 원리입니다.

아주 오래 된 이야기입니다. 무명의 미국인 선교사 한 분이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름 모를 전염병이 유행하여 수많은 중국인들이 죽어갑니다. 그는 의료선교사로 의학 지식이 있었지만 속수무책입니다. 안타까워하던 그는 급히 전염병 병균을 유리병에 담아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항에 상륙하려고 하는데, 검역소 직원들의 검색이 철저했습니다. 발각되면 면역체고 뭐고 헛수고라고 생각한 그는 고민 끝에 병균을 삼켜버리고 유리병을 버렸습니다. 온몸에 병균이 퍼지면서 열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서 의사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숨을 거두었고, 그 희생의 대가로 전염병의 면역체가 만들어져 수많은 중국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처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덮어쓰고 대신 희생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대속의 은혜입니다.

③ 광야에 버려짐 :

안수 절차가 끝난 후 아사셀 염소는 광야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무인지경에 이르면 거기에 버려집니다. 무인지경은 인적이 없는 단절의 땅이요 멸망의 땅입니다. 아사셀 염소는 그곳으로 가서 혼자 방황하다가 맹수에게 찢겨서 피 흘리며 죽어가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고독하고, 얼마나 비참했을까 상상해 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떠나가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뭐라고 증거합니까? 요1:29 “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러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예수님의 모습 상상해 보십시오. 당시 사형수들은 법정에서부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시내를 통과하고 성문 밖으로 빠져나가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예수님의 수치, 고통과 고독을 상상해 보십시오.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군중들은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 장면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히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아사셀 염소를 한번 떠나면 결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속죄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Gone with the Wind)는 말이 있죠. 아사셀 염소는 죄와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Gone with the Sin!) 예수님이 그러신 겁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사라져 가심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4] 완전한 속죄의 은총을 받은 성도들 : 영생, 평안, 승리

예수님의 완전한 속죄의 은총을 받은 성도들은 추호의 의심 없이 확신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이 흔들리거나 낙심하는 것은 십자가의 완전한 속죄를 불신하는 잘못입니다. 여러 가지 확신이 있어야 하겠지만,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 확신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① 구원의 확신 : 영생과 천국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그리고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롬6:23) 그런데 육체의 죽음도 심각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영원한 사망입니다. 육체적인 죽음 이후 지옥에 가서 영원한 형벌을 당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부터, 천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죄인 된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존재이다.”

그런데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죄를 고백함으로 모든 죄가 전가됩니다. 그래서 속죄 받고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것은 영원히 취소되지 않습니다. 방해와 유혹이 있어도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말하자면 절대 구원, 절대 보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어도 천국입니다. 부디 구원의 확신 속에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사죄의 확신 : 평안과 기쁨

절대 구원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 이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범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회의가 생기고 믿음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런 문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인 된 것은 삶이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된 것뿐입니다. 법적으로는 의인이고 자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문제에는 전혀 하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여전히 죄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죄와 마귀의 유혹을 받곤 합니다. 그러다가 때때로 넘어지고 실수하게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자백하면 주님은 얼마든지 우리의 실수와 범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요일1:9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더욱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대언자이십니다. 요일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렇게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시 103:12~14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러한 사죄의 은총은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큰 부자가 은행에 엄청난 액수를 예금해 둡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필요할 때 마음껏 꺼내 쓰라고 합니다. 너무 많아서 아무리 꺼내 써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사죄의 은총은 마치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이 있기에 우리는 죄에 눌려 살지 않고 죄에서 해방되고,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사죄의 은총이 무한하다고 마음 놓고 죄를 지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죄의 은총은 우리에게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죄의식 때문입니다. 사람이 소유나 권세가 부족해서 불행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식이 없는 사람은 매사에 담대하고 평안합니다. 그러므로 초막이나 궁궐이나 천국에서처럼 살아갑니다. 아무리 소유가 풍부해도 죄의식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혹 육신적으로 편리할지는 몰라도 그 영혼이 평안할 수 없고, 결국 불행합니다.

일제 시대 때 고승 효봉 스님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본래 판사였는데, 오판해서 무죄한 사람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 하다가 그는 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평생 속죄하는 심정으로 살았지만 마음에 얼마나 평안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임종시에 두 마디를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무(無)로다! 무(無)로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가 만일 예수님의 사죄의 은총을 입었다면 죄의식에서 벗어나 승화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함부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되지만 연약함으로 범죄하고 실수할 때 얼마든지 용서하시는 사죄의 은총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누리기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입니다.

③ 승리의 확신 : 담대함과 용기

십자가는 실패가 아닙니다. 죄에 대한 승리이며 마귀에 대한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가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의지하면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들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공격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는 근심, 걱정, 고통, 질병, 재난, 사고, ... 이런 일들이 늘 닥쳐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승리의 주님을 의지하면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요일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성도 여러분! 이 사순절에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말씀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묵상하고 그에 합당한 우리의 신앙과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살펴본 십자가 예고편 아사셀 염소가 보여준 의미를 기억하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확신하며 영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연약한 우리를 늘 용서해 주시는 사죄의 은총으로 기쁨과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승리의 주님을 의지하면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용기로 날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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