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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생 (행 13: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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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경택 목사

사람의 마음에 쏙 드는 것 보다 어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첫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첫인상만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외모 때문에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 마음에 꼭 들기를 바랍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찾기 어렵습니다. 부부간에도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뿅 가면 됩니다. 사랑하면 됩니다.
사람의 가치는 겉에 있는 것이 아니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쏙 들었는데 갈수록 헛점이 보이는 사람이 있고 처음에는 너무나 볼품이 없는 사람인데 사귀어 보면 볼수록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보는 기준과 하나님이 사람을 보는 기준은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안 들면 하나님 마음에도 안 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안 들어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처럼 외모를 보신다면 절망에 빠질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은 여러분을 어떻게 보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두말 할 것도 없이 마음에 쏙 들어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다윗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사울과 다윗 두 사람이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사울 집과 다윗 집의 등장을 통해서 서로 비교되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삼하3: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생을 생각하기 위해서 사울과 다윗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똑같이 사십 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집안은 점점 쇠퇴해 갔지만 다윗의 집안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점점 강성해져 갔습니다.

1. 처음에는 사울도 겸손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의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버려서 아들 사울에게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사환과 함께 암나귀를 찾아 나섭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길이 막막한 가운데 사무엘 선지자가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그때 사환이 이렇게 말합니다. ‘기왕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선지자가 계신 곳까지 왔으니 선지자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시지요.’ 그래서 수중에 조금 있는 돈을 예물로 하고 선지자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날 이미 사무엘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사울이 오거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입니다.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습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다니다가 사무엘 선지자를 만났다가 졸지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의해 최초로 공식적으로 임명된 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필이면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을까요? 사울의 배경을 보면 그는 그다지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외모는 모든 사람보다 준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삼상9:2)
훤칠한 키, 늠늠한 사나이 . . 성품도 겸손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사울은 왕의 후보자들 가운데 도저히 끼일 수 없는 불리한 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그 당시 베냐민 지파는 수도 적고 보잘 것 없는 족속이었습니다. 그의 집안 또한 가난하여 볼품이 없었습니다. 재력도 없었습니다. 유명세도 없었습니다. 사울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결코 왕이 될만한 자격은 못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사울의 성품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했습니다.
처음에 사울은 겸손했습니다.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지파 출신으로 베냐민 족속이 아니니이까? 또한 내 가족은 베냐민 지파의 온 가족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니이까? 그런데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라.”(삼상9:21)

사울은 기름부음 받았지만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자기 삼촌에게 이르되, 그가 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이 말하던 왕국의 일은 고하지 아니하니라”(삼상10:16).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기분이 좋아서 우쭐 대고 이리저리 말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사울은 신중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이는 어느 육체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어찌 보면 우리가 사울처럼 부름 받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잘 나서도 아닙니다. 특출해서도 아닙니다. 약한 나를 부르셔서 강하게 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나를 부르셔서 부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찬양 약한나로 강하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얼마든지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 겸손할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계속 겸곤한 자가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겸손히 하나님 말씀을 따라 실천하고 사는 사람들은 복을 받습니다. 짐승들의 경우를 보면 사나운 짐승들의 수명이 온유한 짐승들보다 짧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따라 순종하며 온유와 겸손으로 사는 자들은 겅강하고 장수하는 복이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교만이 들어오면 인간은 삽시간에 타락할 수 있습니다.

2. 타락은 삽시간에 밀려듭니다.

미국의 신학자 니버(Reinhold Niebuhr : 1892-1971)는 “교만은 천사를 떨어뜨려 마귀가 되게 하고, 겸손은 사람으로 천사가 되게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천사 같은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교만하면 그 사람은 마귀 같이 떨어지고, 아무리 마귀 같은 삶을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겸손하면 그 사람은 천사 같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5C 로마의 라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 354 - 430)는 “교만은 인간이 빠지기에 가장 쉬운 것인 동시에 인간이 극복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13C 중세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 1225 - 1274)는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원인 것입니다.
사울 왕은 언제 부터인가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순종할 때는 반드시 승리가 있었지만 타락하자 불행이 닥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첫 번째 전쟁을 치룰 때, 암몬족속과의 전투에서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힘이 펄펄 넘쳤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습공격으로 암몬 족속들을 대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백성들의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전에 사울이 왕이 될 수 없다고 떠들던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겠습니다.” 그 때 사울은 “오늘을 그런 일 제발 하지 말아 주십시오. 오늘은 우리 백성들을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살려 주신 날이 아닙니까? 그러시면 안됩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겸손은 계속 되었습니다.

두 번째 전쟁 때입니다.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모래알보다 더 많은 수많은 블레셋 군대들이 이스라엘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병거 삼만대, 기병 육천 명, 백성이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그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세우신 사무엘선지자가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승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과 약속하였던 시간이 지났습니다. 사울은 7일 동안이나 기다렸습니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사무엘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고민을 합니다. 급하기는 하고 . . . 금방 블레셋이 쳐들어 올 것 같습니다. 사울은 결국 자기가 제사를 집례 해 버리고 맙니다. 전에 가졌던 겸손과 신중함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첫 번째 전쟁에서 사울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했기 때문에 사무엘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이긴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교만이 점점 밀려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개구리들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저 새들처럼 하늘을 한번 훨훨 날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그 중에 호기심 많은 개구리가 독수리를 찾아가 사정합니다. “나도 너처럼 멋있게 하늘을 날고 싶다. 너의 다리를 붙잡고 한번만 날게 해다오” 독수리는 개구리의 요청을 받아들이고는 드디어 개구리는 독수리의 다리를 붙잡고 꿈에도 그리던 하늘로 날아올랐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 풍경은 환상적이었습니다. 땅에 있는 개구리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하늘의 개구리를 바라보았다. 그중 한 개구리가 하늘의 개구리에게 물었다.
“누가 그런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니?” 그러자 그 개구리는 우쭐 해서 독수리를 붙잡은 손을 놓으며 “내가 했지” 그 순간 개구리는 여지없이 땅으로 추락했습니다.
교만은 패망을 낳습니다 사무엘에게 호된 책망을 받습니다. 사울의 순간의 교만함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는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기회가 있습니다.

세번째 전쟁이 아말렉 족속과 일어납니다. 이 전쟁을 사울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전에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죄악들을 용서 받고 사울의 삶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명령하십니다. “만군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숨어 그를 기다린 일을 내가 기억하나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진멸하고 남기지 말며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와 젖먹이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삼상15:2,3). 아말렉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공동체를 군사적으로 공격하여 괴롭힌 첫 번 째 족속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으로부터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르비딤에서 광야를 행진하는 피곤하여 뒤쳐진 이스라엘 족속들의 후미를 쳤습니다. 배고프고 목마르며 지쳐 뒤로 처진 사람들을 예고 없이 후방에서 공격한 교활하고 전술에 능하고 기민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야비한 족속들을 심판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전쟁에서 전리품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자신이 보기에 좋은 것은 남겨두고 나쁘고 가치 없는 것은 진멸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 때 책망하는 사무엘에게 회개하지는 않고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것이며,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실 줄 알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도둑질 하려다가 들키면 옆에 옮겨드릴려고 했다고 하고 안들키면 가져갈려는 얄팍한 도둑의 마음입니다.

만일, 그 때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더라면 용서받는 길이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 사무엘은 이와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태우는 헌물과 희생물을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겠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숭배와 같음이니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더라.”(삼상15:22, 23)

사울의 타락의 주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사울은 성직을 무시했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자기가 사무엘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또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사람의 말로 듣고, 이렇게 저렇게 잔 머리를 굴렸습니다. 결국 이렇게 살던 사울은 엄청난 불순종의 죄를 짓고 만 것입니다.
사울왕은 이제 완전히 타락했습니다. 막가고 있습니다. 이후에 다윗 왕을 시기하고 죽이려고 하는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고,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자결하고 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잔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순종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순종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유혹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언제나 ‘너도 할 수 있어, 너도 하나님같이 할 수 있어’ 하고 유혹합니다. 그럴듯합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본래 하나님이 주셨던 그 겸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끔씩 성도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이 말은 제가 하는 것이 아니고 교인들이 하는 말입니다. 지금 교회 여론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 . "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바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잘못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고쳐 주는 사람이 바른 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버리십니다. 교만할 때 악신이 괴롭히게 됩니다. 극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그를 번뇌케(삼상16:14) 했습니다. 사울도 전에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교만하는 순간부터 악신이 그를 통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3. 마음을 관리하십시오.

성경은 우리 마음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잠언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사람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타인보다도 자신을 세우는 행위이고, 타인을 무시하는 자세입니다.
교만은 어느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자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죄로 인간을 무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도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가 다음의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남이 타협하면 야합, 내가 타협하면 양보.
남이 가난하면 게으른 탓, 내가 가난하면 주위 환경 탓.
남이 한 우물을 파면 우물 안 개구리, 내가 한 우물을 파면 전문가.
남이 좀 검은 피부면 야만적, 내가 좀 검은 피부면 야성적.
남이 빗나간 사랑을 하면 스캔들, 내가 빗나간 사랑을 하면 로맨스.
남이 말을 많이 하면 수다, 내가 말을 많이 하면 다양한 화술
남이 나서면 교만, 내가 나서면 개성.
이것은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데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존귀는 높은 지위를 얻게 되고, 부유하게 되고, 명예롭고, 존경할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마음먹는 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꾸라는 말입니다. 잘 관리하라는 말입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의 마음에는 끊임없이 죄의 유혹들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머리가 좋으면 마음의 죄가 일어나지 않을 까요? 아닙니다. 한국은 물론 선진국에서도 가장 유능한 검사나 수사관들이 몰려 있는 곳은 경제와 문명의 중심지인 대도시라고 합니다. 머리 좋고 고학력자들인 화이트칼라 범죄를 척결하기 위해서입니다. 범죄 수사관들의 말에 의하면, 소위 폭력범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증거를 제시하면 금방 자기 죄를 순순히 자백하는데 고학력 범죄자들은 명백한 증거가 드러나도 좀처럼 자기 죄를 잘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더 끔찍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것은 교육이 속을 변화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9-20).

다윗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겠습니까? 그가 일류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입니까? 그는 단지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는 목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다윗은 키도 작았습니다.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이와 관계없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를 보면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눈에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만 경외하며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다윗은 학교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여덟째 막내입니다. 집안에서 기대도 하지 않는 자식입니다. 그냥 양이나 키우고 밥이나 먹여주는 . . . 모든 사람들은 ‘큰 것은 힘이 있다 큰 것은 무섭다. 그런고로 골리앗도 무섭다’라고 생각할 때 다윗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크기 때문에 물매가 맞을 확률도 크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기 때문에 지혜로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담대했고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난 후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고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올 때 어린 아이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지극했습니다.

“다윗”이라는 이름의 뜻은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면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음을 알게 됩니다. 양을 치던 목동의 시절에도, 전쟁에 나가 싸울 때에도, 사울 왕을 피하여 방랑할 때에도, 왕이 되어 평안히 거할 때에도 다윗은 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왕의 궁전은 백향목으로 지어 살고 있고 하나님의 법궤는 휘장 속에 거함에 대해 얼마나 가슴아파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전쟁에서 너무나도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나봇의 타작마당을 사서 성전터를 준비했습니다.
현관, 본당, 성전 둘레의 창고들, 다락방들, 골방, 지성소가 들어 있는 설계도를 솔로몬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조금도 어려움 없이 성전을 짓도록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 돌, 쇠 나무, 금, 은, 동, 철 . . . 큰 못들까지 준비했습니다. 레위인, 제사장, 성가대원들, 성전 문지기들의 직무성전 창고의 경비성전의 행정직의 직무와 조직들을 편성하고 성전을 건축하면 온전히 예배를 드릴 수 있게 제반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그 마음을 보시고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축복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 (흐뭇). .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 . .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삼7;1-9)

그러나 다윗도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또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왕이 그런 정도의 죄를 지었다고 뭐가 그리 잘못된 죄인가? 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민감했습니다. 사울처럼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썩도록 회개. . . 변명하지도, 부인하지도 않고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 철저하게 회개
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신앙적인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미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핑계하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책임 전가 하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 보려고 힘쓰고 애쓰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 보면 아버지는 아버지를 도와 충실하게 일을 하고 섬긴 맏아들보다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한 삶을 살면서 그 모든 재산을 버리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기뻐하셨고,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을 보더라도, 다윗은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지 않았고, 사울은 별로 흠이 없었지만 버림받았습니다. 야곱과 에서에 관한이야기에서도, 에서는 야곱보다 여러 면에서 훌륭하고 대범했고 아버지를 기쁘게 하며, 아버지 명을 어기지 아니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비뚤어지고 잘못된 야곱을 깊이 사랑하셔서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25:22-23)고 말씀하신 것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사55:)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여러 부분이 다르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보다도 마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도둑질 하려는 마음, 간음하려는 마음을 죄로 간주하십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육체로’ 간음을 행하는 것은 굉장히 큰 죄로 여기지만,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의로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을 부으려고 이새의 집에 가서 용모가 특출하고 키가 크고 잘 생긴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으려 하는 사무엘에게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시지만, 인간들은 어느 누구도 마음 중심을 모르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면만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이야 어떠하든지 간에 외형적으로 유순하게 보여지면 유순한 자로, 겸손하게 보여지면 겸손한 자로, 정직하게 보여지면 정직한 자로 판단해 버립니다.

인간은 자기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음에는 미운 마음을 품고, 더러운 생각을 품고, 음란한 마음을 품고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합니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더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치중하고 겉을 꾸미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의 눈을 주셨습니다. 영의 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신앙이 시종일관되도록 관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만 겸손해서는 안됩니다. 처음에만 은혜충만해서는 안됩니다.
타락은 삽시간에 밀려듭니다. 항상 순종하기를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순종은 제사보다도 낫습니다. 예배보다도 낫습니다. 먼저 예배하기 전에 순종부터 배워야 합니다.
마음관리를 잘 하십시오. 마음에 성벽을 쌓아 사단이,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꼭들어서 자자손손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다윗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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