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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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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성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자주 이용하는 유명한 성서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8장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게 하심이라”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영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할 때,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는 이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떡 즉 먹거리가 필요치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사는 이상 그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먹거리가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매일의 생활은 이 의식주 즉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얻기 위한 노력이며 그 준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 “치사하게 먹는 것 때문에”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먹는 것은 중요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곧 삶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잘생긴 미인이라도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도도한 학자라도 먹어야 합니다.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치고 이 먹거리에서 자유함을 얻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러한 생활을 위한 물자만 가졌다고 해서 만족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기 때문”(15절)입니다.

옛말에 ‘의식이 족해야 예의를 차랄 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확실하고 소중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살기 편해진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진리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먹고 사는 것이 너무 풍족해서 불만에 빠지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예화를 주의해서 읽어봅시다.
어떤 부자의 밭에 곡식이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궁리 끝에 속으로 말했습니다.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어 더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쓰기에 넉넉한 좋은 물건들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너는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 어리석은 사람아, 바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런데 이 비유가 나온 배경을 보면 유산 문제였습니다.
13절에 보면, “선생님 네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그렇게 보면, 이 부자의 밭은 본래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산이었습니다. 물려받은 것입니다. 여기에 이 부자의 어리석음이 시작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빛부터 시작해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목숨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내 힘으로 되어진 것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는 것도 내 힘만으로 된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시편 139편 13절, “주께서 나의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그리고 우리의 목숨은, 무엇보다도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보호, 나아가서는 사회의 많은 사람들의 여러 가지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 것은 모두 주어진 것입니다. 처음부터 여러분 것 있어요? 다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 것인 양 주장하고, 자신의 영혼만을 위해 먹고 마시고 즐기고자 하는 것, 그것이 곧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대단하지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야, 성공했구나.”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 어리석은 자여”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세계적 문호 톨스토이가 그의 53세 되던 1881년에 발간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어느 날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한 여인의 영혼을 거두어 오라는 분부입니다. 그래서 지상에 내려가 보니 그 여인은 몹시 쇠약한 몸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여인은 방금 쌍둥이를 낳았고, 그 남편은 숲에서 일하다가 나무에 깔려 죽어서 바로 엊그제 장례를 치른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천사에게 애원을 합니다.
그래서 천사는 그냥 하늘나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여인의 영혼은 거두어 오지 못했습니다. 여인의 남편은 나무에 깔려 죽고 여인은 방금 쌍둥이를 낳은 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저를 보고 울면서 애원했습니다. 제발 영혼을 거두어 가지 말아 달라고 말입니다. 제발 자기 손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있게 해 달라면서 부모가 없으면 그 갓난아이들은 살 수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차마 그 여인의 영혼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분부하셨습니다.
“내려가, 산모의 영혼을 거두어라. 그러면 세 가지 말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의 내 부는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세 가지를 알게 되는 날 너는 하늘나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천사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가 산모의 영혼을 거두었습니다. 그 때 죽은 여인의 몸이 침대 위로 쓰러지면서 한 아기를 덮쳐 그만 한 쪽 다리를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천사는 두 날개가 부러져서 지상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들판에 버려져, 추위와 굶주림으로 겨우 교회 뒤쪽으로 피해 웅크리고 앉아있던 천사는 구두를 만드는 세몬 이라는 사람을 만나 그 집에서 살게 됩니다.
그가 미하일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동안 세 번 웃었습니다. 구두 만드는 세몬의 부인이 처음 자기를 맞이해 줄 때와 어느 한 사나이가 좋은 가죽을 가지고 와서 1년을 신어도 망가지거나 찢어지지 않을 장화를 주문했을 때, 그리고 6년째 되는 날, 한 부인이 두 쌍둥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가게를 찾아온 날입니다.
구두장이 세몬의 부인이 처음 저녁밥을 챙겨주며 권할 때, 천사는 “인간의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 여인의 속에 있는 사랑이 자신을 살려 준 것입니다.
1년을 신어도 망가지지 않는 신발을 주문하는 사나이가 사실 그날 죽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혜였습니다. 그 지혜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으신 겁니다. 그 사나이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이었습니다. 오늘 죽으니까요. 그러나 그 사나이는 그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죽을지도 모르고 1년을 살 거라고, 1년 동안 신어도 망가지지 않는 구두를 주문하는 겁니다.
그리고 6년째 되는 오늘, 한 부인이 쌍둥이 여자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그 아이들이 누군지 알아보았습니다. 6년 전, 그가 아이들의 어머니 영혼을 데려갔던 겁니다. 그 때 그 어머니가 없으면 아이들은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을 말씀을 거역했고, 그 때문에 이 땅에 떨어졌던 겁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무사히 잘 자라고 있는 겁니다. 아이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여인이 그 아이들을 맡아 잘 키우고 있는 겁니다.
이윽고 천사의 모습으로 바꾸어진 천사가 말합니다.
“나는 이와 같은 일을 깨달았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걱정하는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어머니에게는 자신의 아이들이 살아가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부자 또한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어떤 인간에게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살아서 신을 장화인지 죽은 뒤에 신을 슬리퍼인지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인간이었을 때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이 내 일을 여려 가지로 걱정하고 염려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과 그 아내에게 사랑이 있어 나를 가엾게 여기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다.
두 고아들이 잘 자라온 것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염려해 준 덕분이 아니라 한 여인에게 사랑의 마음이 있어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각자 자신의 일을 염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제 다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보아 주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분은 인간들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시며 그래서 자신과 모든 인간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계시하신 것이다.
이제야 말로 나는 깨달았다. 각자 자신을 걱정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들의 착각일 뿐 진실로 인간은 오직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에 사랑이 가득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말을 마치자 천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의 등에 날개가 돋아나 활짝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구두장이 세몬이 정신을 차렸을 때 집은 옛 모습 그대로였고 방 안에는 그의 가족만 있었습니다.
톨스토이가 이 책에서 말하려는 것은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한 것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사랑으로 더불어 살 때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일에만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겁니다. “내일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도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점점 자기 밖에 모르는 삶을 사는 겁니다.
그러나 실상 그 자기의 일에 대해 해결은 다른 사람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역시 내가 가지고 사랑 안에 있는 거고요. 그래서 사람은 뿔뿔이 흩어져서 제 각각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우러져서 돕고 돕는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갓 태어난 아이들.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그 어머니마저 죽으면 누가 키울 겁니까? 그렇다면 그 어머니의 죽음은 곧 아이들의 죽음입니다. 천사 미하일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키우는 사랑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 아이들 내가 신경 안 써도 누군가 키울 거라는 그런 생각 마십시오. 이 이야기는 내가 가진 사랑으로 남을 사랑 하자는 겁니다. 빌립보서 2장 4절의 말씀처럼 “각각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남의 일도 돌보아 주자”는 겁니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일은 매우 신경 쓰면서도 남의 일이라면 무관심하고 소홀하기가 쉬운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9-37절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유대인이 강도만나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보자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임시 치료 해주고, 또 여관까지 데려다 주고, 치료에 드는 돈까지 주었습니다.
이 비유의 시작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입니다. 그래서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이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고난당하는 이들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여기 제사장과 레위인이 왜 피해갔겠습니까? 못 보았을까? 본문을 보면 보았습니다. 보았으니까 피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긴 보았는데 결국은 못 보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문제입니다.
보았으면서도 못 보는 것,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욕심이란 무엇입니까? “학교에서 일등 하겠다.” 그것도 욕심입니다. “나 돈 많이 벌어야겠다.” 그것도 욕심입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이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그 삶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있어야 합니다.
욕심이란,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을 보고도 못 본체 하거나 피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더불어 산다고 하는 것은 내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때문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된 사마리아인은 손해 보았습니다. 감람유와 포도주, 그 귀한 것을 그 상처에 부어야 했습니다. 여관까지 데리고 가야 했습니다. 당시 이틀 품삯인 두 데나리온이라는 돈도 주어야 했습니다. 가진 것, 돈, 시간 다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손해라고 생각하고 돌보지 않을 때, 그는 욕심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 그는 유산으로 받은 것으로 그 형제와 더불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형제의 삶을 보고도 못 본체 했으며 피해갔습니다. 오죽하면 그 형제가 예수님께 그 유산에 대해 재판 해달라고 요청까지 하였겠습니까? 더불어 살아야한 형제를 보고도 못 본체 하는 것 그것이 그 부자의 어리석음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가게 된 이유는 다른 것 아닙니다. 그는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거지의 삶을 보고도 못 본체 했고 피해갔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들은 정작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세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서 내린 이 모피 외투를 입은 신사가 내민 가죽은 정말 좋은 가죽이었습니다. 그 신사는 그 가죽으로 1년을 신어도 모양이 망가지지 않고 꿰맨 자리가 뜯어지지도 않는 장화를 만들라고 말합니다. 만약 장화가 1년 안에 망가지거나 찢어지기라도 하면 감옥에 쳐 넣을 거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치수를 받아든 천사 미하일은 그 가죽으로 밋밋한 슬리퍼로 만들었습니다. 주인 세몬이 깜짝 놀라서 미하일을 야단치는 순간, 그 신사의 하인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장환지 구두인지 이젠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나리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구두를 맞추고 돌아가는 길에 죽은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겁니다.

예수님은 천하를 다 가져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냐고 말씀 하셨는데 사람들은 천하를 얻으려고 발버둥칩니다. 천하가 아니라 돈 몇 푼에도 생명을 내 놓습니다.
그럴 겁니다.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생명을 위해 이러는 겁니다.”
그런가요? 1950년대 정말 힘든 때였습니다. 보릿고개 넘기기가 힘들어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럴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생명을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시지 않으면 죽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생명 걸었습니까?
“그래도 목사님 그 때보다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 때, 그 힘들고 어려울 때, 그래서 하나님께 생명 걸었을 때를 한 예로 보면, 주일 낮 예배나 저녁 예배나 수요예배 참석 인원이 별 차이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주일 낮에 비해 오후 예배는 절반이고, 수요예배는 주일 오후 예배의 절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생명을 건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을, 가져야 할 많은 것 중 하나로 생각 하는 겁니다. 부자 청년 같이, 돈도 있고 관직도 있고 그렇게 가진 것에 또 하나 필요한 것이 영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신앙을 하나의 보험을 생각합니다. 훗날 천국과 지옥이 없으면, 없으니까 그만이고, 있다면 그래도 예수 믿는다고 해 놓았으니 천국은 갈 거라는 그런 생각들입니다.
정말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칩니까? 생명을 위해 있는 힘을 다 쏟고 있는 겁니까?
우리 중 고등학교 시절, 지금 말하면 등록금을 못 내서 학교에 쫓겨나고 그랬습니다. 그때는 사는 걸 걱정했어요. 그런데 지금 그것 걱정합니까? 아이들이 무슨 걱정 합니까? 적어도 사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도 안 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돌아다보십시오.
조금만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벌써 예배 참석이 줄어듭니다. 먹고 사는 게 좀 나아지면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할 것 같은데 먹고 사는 게 좀 나아지면 오히려 수요예배나 주일오후예배 빼먹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아프고 힘들면 모든 예배 뿐 아니라 새벽 기도도 하고 그러다가 조금만 여유가 생기고 평안해지면 하나 둘 빼먹기 시작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신앙생활 곧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생활의 넉넉함, 내 마음의 평안함을 위해 했다는 결론인 겁니다.
신앙의 가장 기본이 뭡니까?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 그분이 지금 나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 그분이 지금 나에게 복을 주시기도 하고 화를 주시기도 한다는 겁니다.
내가 애쓴다고 더 오래 살거나 애쓰지 않는다고 빨리 죽는 것 아닙니다. 내가 애쓴다고 화가 복이 되고 애쓰지 않는다고 복이 화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고 그것이 진정 행복입니까? 은행 통장에 잔액이 쌓인다고 그것이 진정 행복입니까?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다고 그것이 여러분을 평안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 할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15절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있지 않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겁주시나 그리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망하게 하실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겁을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생명 주시길 원하십니다. 평안과 기쁨 주시길 원하십니다. 다만 그 복과 생명과 평안, 기쁨, 이런 것은 재산의 차고 넘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범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누가?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래요.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21절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기 쉽게 시간을 따져 봅시다.
1주일 동안, 여러분 자신을 위한 시간과 하나님께 드린 시간 어느 쪽이 많습니까? 물론 예배당에 나와 앉아있는 시간만 하나님께 드린 시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만큼은 구별해 드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시간마저도 날 위해 쓰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누가복음 오늘 읽은 본문에 뒤에 나오는 말씀이 22절 이하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 공중을 나는 새도 지켜 주시는 하나님,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너희야 더 잘 해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겁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을 더 하여 주신다는 겁니다.
어머니의 영혼을 불러 가면 그 두 갓난아이도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그 아기를 돌보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돌보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하는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하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함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요, 그 사랑으로 사는 것이 구원이요 생명인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또한 이웃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부요한 삶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부요하십시오. 그것이 참 행복입니다.
이 행복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늘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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