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유쾌하게 삽시다 (딤후 1:16-18)

  • 잡초 잡초
  • 607
  • 0

첨부 1


- 설교 : 송기현 목사

  유대인들의 탈무드에 보면 "부모가 돌아가셨어도 한 달 이상 슬퍼해서는 안 된다. 재판소에서 벌금을 물었어도 나올 때는 휘파람을 불고 나오라"는 가르침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할 수만 있으면 유쾌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쁨은 인생의 오일입니다. 자동차에 오일이 있어야 움직이듯이 인생도 기쁨이 있어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기쁨은 우리를 치료하는 양약입니다. 잠언서 17장22절에도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의사 밀레투스는 '웃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겔로스(gelos)는 헬레(hele)에서 왔고 그 의미가 건강(health)'이라고 했습니다. 많이 웃으십시오. 웃음은 종양과 바이러스까지도 무기력하게 합니다. 세상이 나에게 웃음을 주지 못한다면 내가 세상을 웃겨 살면 됩니다. 바로 그것이 '건강'입니다. 더 이상 웃음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세상은 우리에게 웃을 일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을 웃겨 보십시오. 그러면 세상이 나를 웃음으로 맞이합니다. 나아가 누군가에게 '웃음 꽃'을 나누어 보십시오. 세상은 금방 기쁨의 향기로 가득차고 맙니다. 이제 나눔의 철학은 물질적인 것에서만 아니라 정신적 가치로도 찾아져야 합니다.

  유쾌하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상표인 것입니다. 인간은 죽기 전에 일반적으로 세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좀 더 참을 걸"하는 후회입니다. 대체로 많은 불행이 참지 못해서 일어난 경우들입니다. 그래서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두번째는 "좀 더 베풀 것을"하는 후회입니다. 이것 저것 움켜쥐기만 했지 나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지 못한 그 인색함이 후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좀 더 유케하게 살 것을" 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공연한 일에 짜증내고 시기하고 다투고 할 것이 없었는데, 괜시리 나 괴롭고 남 괴롭고 하는 일을 많이 했구나 하는 후회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오늘 특별히 관심을 갖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쾌하게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산다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정말 유쾌해져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자신뿐 아니라 남을 유케하게 하는 사람이었던 오네시보로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딤후 1:16 "원하건데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에는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라고 했습니다.
  역본들을 7~8개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역본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현대어성경에 보면 "주께서 오네시보로와 그 가족을 보살펴 주시기를 빕니다. 그는 종종 나를 찾아와 격려해 주어 마치 신선한 공기를 가득히 들이마신 때처럼 내게 새 힘을 얻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나를 찾아올 때 조금도 꺼려하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유쾌함이란 말이 "격려" "용기를 붇돋아줌" "생기를 돋워줌" "격려해주어 마치 신선한 공기를 가득히 들이마신 떄처럼 내게 새 힘을 얻게 해줌"등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오네시보로라는 이름의 뜻은 "유익의 전달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한줄기 시원한 공기와 같이 힘을 솟아나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스스로도 유쾌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만 또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스처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유쾌해질 수 있도록 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그리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사실은 내 자신 스스로에게 이제 좀 유쾌하게 살자구나 그리고 한번이라도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을 만났더니 유쾌해졌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자구나 하는 생각을 강하게 가졌습니다. 즉 이 설교는 내게 하는 설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유쾌하게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왜 자꾸 불쾌하게 살고자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정말 유쾌하게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사니 우리는 정말 유쾌해 질 수 밖에 없어야 옳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유쾌하게 사십시다.

  그러면 유쾌함은 어디서 부터 오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유쾌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 유쾌한 날과 유쾌한 삶은 주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기쁜 소식을 들을 때 유쾌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기쁜 소식이며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기쁜 소식 자체이십니다. 주님 없는 삶은 결코 유쾌할 수 없습니다. 주님 없이 유쾌해지려는 노력은 결국 더 깊은 죄악 속에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뻐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소원이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시고, 예수님도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잘못되어 가고 있고, 기뻐할 이유라고는 하나도 없는데어떻게 기뻐하란 말입니까?"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평소에 사소한 문제나 실망이 있어도 기뻐하는 훈련을 쌓으면 큰 재난이 다가오거나 예기치 않은 비극이 다가오더라도 주안에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초월적 기쁨은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입니다.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사람에 의해서 사람은 유쾌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유쾌하게 사는 것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극복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이 갇히게 되자 그것을 부끄러워해서 다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네시보로가 자신의 매인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그를 떠나지 아니했을 때 유쾌해졌습니다.
  성형수술이 마음에 안든다고 자살하는 여대생이 있는가 하면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11번의 수술을 하고서도 삶의 강한 애착을 가지고 살아 있음을 감사하는 여성도 있습니다. 
  자신의 핸디캡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열등감이나 자신에게 있는 약점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에 신경조차도 쓰지 않습니다. 괜시리 자신이 그것에 매여 해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쓴들 무슨 대숩니까?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을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주님이 날 부끄워하시지 않는데 내가 날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람은 격려를 받게 될 때 그리고 격려자가 될 때 유쾌해지는 것입니다. 격려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격려해줄 자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격려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격려주는 이 없을 때는 스스로 자신을 격려하시기를 바랍니다.

  겉과 속이 같을 때 유쾌해지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중에 잠언 23:16에서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입술로 진리를 말하고 책임 있게 진리를 고백하고 진리를 생활에 옮겨 실천하여 진리를 입술로 증거하는 삶을 살 때 유쾌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반드시 복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속으로 품는 생각과 겉으로 들어나는 행실이 다름이 없을 때 유쾌해지는 것입니다. 품은 생각과 겉으로 들어나는 행실이 다를 때, 안과 겉이 상반될 때 절대로 유쾌해질 수가 없습니다. 안과 속이 차이가 커질수록 갈등이 커지는 것입니다.

  유쾌함은 회개함의 결과로 오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빚을 정산했을 때 유쾌하지 않던가요? 막혔던 것이 풀릴 때 유쾌해짐을 느낍니다. 행 3:19에서 말씀하신대로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했습니다. 회개하면 유쾌하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회개하지 못한 심령은 불편합니다.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온 심령은 유쾌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를 하고 돌이키는 자는 유쾌한 날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은 죄를 씻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이후로의 삶이야 변화된 삶을 살면 되겠지만 그 이전의 더렵혀진 삶은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씻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이전의 것은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여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망나니 였습니다. 뒤 치닥거리하다가 어느날은 아들을 앞에 세워놓고 "너를 뒤치닥거리 하고 씻기고 하는 것 보다 차라리 하나를 다시 낳는게 낳겠다고" 했습니다. 어찌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면서 그렇게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를 씻기는 것보다 다시 낳는 것이 더 좋은지 모를 그런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아무리 죄로 뒤범벅이 되었을지라도 그것을 씻어주시기를 실증내지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고 유쾌하게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누구나가 한번 주어진 자기의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길은 단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길이며 되풀이 되어 살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번 주어진 이 인생을 유쾌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믿음의 권속들은 한 걸음 한걸음이 유쾌한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든 유쾌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유쾌한 삶과 유쾌한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삶이 늘 유쾌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