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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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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고양이가 쥐를 쫓고 있었습니다. 처절한 레이스를 벌이다가 그만 쥐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슬아슬한 찰나에 쥐구멍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쥐구멍 앞에 쪼그려 앉은 고양이가 갑자기 "멍멍 멍멍멍"하고 짖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뭐야, 이거. 바뀌었나? 개가 쫓아왔나?" 쥐가 궁금하여 머리를 구멍 밖으로 내미는 순간 그만 고양이 발톱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의기 양양하게 쥐를 물고 가면서 고양이가 하는 말이 曰.
"요즘처럼 불경기에 제대로 먹고살려면 적어도 2개 국어는 해야지."
생후 2, 3개월에서부터 6개월 사이의 어린아이는 많이 웃을수록 건강하고 좋은 성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아이가 웃으면서 즐거워 할 때는 근육의 활동이 강해집니다. 또한 혈관근의 긴장이 높아지고, 체내의 신진대사가 활발하게 되면서 아이에게 필요한 뇌의 산소공급이 원활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웃음이 많은 아이 중에는 자폐아나 말 못하는 아이, 성격 장애아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 하나를 더 하고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어떤 젊은 청년이 실연을 당했습니다. 이제는 살 가치도, 일을 해야 할 보람도 찾지 못한 그는 이 세상을 하직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나 같은 놈이 살아서 무얼 하나?" 그러다가 이제까지 내가 예수를 믿은 사람으로 죽기 전에 성경이나 한 줄 읽고 죽어야겠다고 다짐하고서는 성경을 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이게 무슨 변고입니까? 하필이면 성경을 펼친 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이 말이었습니다. "유다가 나가서 목 매어 죽으니라(마 27:5)" 어차피 나는 죽어야 할 목숨인가 보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성경을 펼쳤습니다. 이번에는 누가복음 10장 37절의 말씀이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 청년은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그래도 목매어 죽으라니 그럴 수 없다. 다시 한 번 찾아보자. 모든 것은 삼세 번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면서 성경을 폈습니다. 이번에는 열왕기상 18장 2절이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다 시든 꽃들도, 다 죽어 가는 생명들도 하나님의 사랑만 받으면 살아날 것입니다. 사랑으로 정복하지 못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옛날에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가슴이 울렁거려요"♬ 왜 가슴이 울렁거립니까?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도 사랑 앞에서는 멍청해 집니다. 영리한 사람도 사랑 앞에서는 바보가 됩니다. 사랑은 우리의 모든 논리나 상식을 초월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성의 능력도 마비시킵니다. 사랑은 모든 위선의 탈을 여지없이 거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으로 정복되지 않는 것은 이 땅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축복을 탐내십시오.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힘껏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사람을 감화 감동시키는 능력입니다. 모든 영혼이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진실한 사랑의 능력을 시간마다 때마다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려울 것이 없는 오직 이 한 길, 그것이 사랑입니다. 아무쪼록 올 때의 사랑과 갈 때의 사랑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랑에 정복당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여 온통 하나님의 사랑에 떠있게 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주님의 사랑에 불타십시오. 사랑만 불타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의 공통 분모가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 분모가 무엇일까? 가만히 보면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실패하는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이 하기 싫은 것을 좋아서 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다만 남이 갖지 못한, 남이 보지 못한 그런 감정 관리 능력이 있습니다. 억누를 수 있는 감정 관리 능력이 그들 속에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 여정을 살아가면서 돈을 잘 관리하는 것도 좋은 능력입니다. 남들보다 탁월한 건강을 관리하는 것도 좋은 능력입니다. 그러나 감정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좋은 능력은 없습니다. 자기 감정을 관리하지 못하는 막대한 재산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감정을 관리하지 못하는 건강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솔직히 자기 감정, 자기 성질을 한 번 잘 못 부려서 자신도 불행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불행하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감정, 자기 성질, 혈기,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어 매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아래에 묻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일어난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자기 반응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일들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인생 여정에서 비바람이 칩니다. 눈보라가 칩니다. 이럴 때에 건강한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건강한 반응을 하고 있는 생명들은 자랍니다. 든든해집니다. 반대로 건강하지 못한 반응을 하고 있는 생명들은 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건강한 반응을 할 수 있는 내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당장 일어난 조그마한 실수, 당장 일어난 눈물의 일 때문에 팔팔 뛰면서 무엇이 안돼서 그렇다, 누구 때문에 그렇다면서 원망하고 절규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감정입니다. 사람이 넘어지는 것도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감정에 실패해서 원망하고 절규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감정과 신앙은 기가 막히게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렇게 많은 실수 투성이였지만 이 실수로 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자기 선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시대의 어려운 가운데 어떤 실수와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실수로 내 인생이, 내 기업이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고 하는 위대한 자기 선언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반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전한 반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반응을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소망의 반응을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기가 막힌 일을 당해도, 내 지혜와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잡힌 바 된 사명을 놓지 마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합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는 건강한 반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가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역사를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던 그날 이른 아침부터 예루살렘 성에는 커다란 흥분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왕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메시아가 왕과 같은 자로 오시리라고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 23장 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 똑 같은 오늘 본문의 기사가 나오는 마태복음 21장 4절과 5절에서는 구약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말하면서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한다"라고 선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진실로 공평과 정의를 약속할 수 있는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런데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큰 나귀도 아닌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입성한 것이 아니라 민중들과 어린아이들의 "호산나 호산나"라고 외치는 환호 속에서 입성합니다. 여기에서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주여, 여기서 지금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외면적인 왕으로서의 구원을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내면과 존재를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분적인 통치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통치자로써의 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이 정말 뒤바뀌고, 개인의 삶이 정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내면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진정한 왕으로써의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지금, 여기서, 나를 구원하소서!" 이 외침이 우리의 외침이 되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바뀌고 이 사회가 변화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내 인생에 진정한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그분을 영접해야 합니까?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에 진정한 구원자로 영접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획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어떤 상황이라는 말은 우리의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라도 나를 향한 그분의 계획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우리가 성경 속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우연한 행진의 한 결과가 아니라 계획된 하나님의 섭리의 행진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다 라고 말합니다. 옛날 구약의 유월절에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죽어야만 했었던 어린양과 같은 존재로 그는 세상의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어린양으로 오셨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유월절을 앞둔 엿새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가 정확한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입성하시기 위해서 그는 먼저 감람산 쪽의 산을 오르십니다. 이 산 마루에는 두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하나는 벳바게요, 또 하나는 베다니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감람산의 등선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 예루살렘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집니다. 거기에 오르신 예수님은 이제 한 마리의 나귀를 찾고 계십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그 다음 2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어린 나귀 새끼의 등장, 이것은 구약의 예언 즉,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였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520년 전의 구약성경인 스가랴 9장 9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바로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귀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타셔야 할 나귀가 정확하게 어디에 있었는지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저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거기에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있을 것이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계획하셨고 알고 있었습니다.

3절에 보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그 때 이렇게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고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에 주인은 즉시 순종해서 주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저와 여러분에게 우뢰와 같은 소리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이천년 교회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은 이 음성을 듣고 순종했던 사람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하나님의 사역에 언제나 기쁘게 순종하는 사람을 들어서 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도 "주가 쓰시겠다" 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쓰시려고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나를 쓰시려고 찾고 있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여기에서 '쓰시겠다'는 말은 헬라어로 '필요 불가결한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서 필요 불가결한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에게 쓰임 받고자 하는가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파악해야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지 않으면 결국 나는 마귀가 써야 합니다. 내 시간을 하나님께서 쓰지 아니하면 마귀가 빼앗아 갑니다. 내 재능을 하나님께서 쓰지 아니하면 사탄이 침략해갑니다. 나의 물질을 하나님께서 쓰지 않으면 사탄이 빼앗아 세상에 다 탕진하게 합니다. 내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아니하면 사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을 "아멘"으로 붙잡으시기를 축복합니다.

4절에 보면 제자들이 가서 본 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서 무엇을 하려느냐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말대로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까 이에 허락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임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귀 한 마리를 쓰실 계획을 갖고 계신 주님이라면, 만물의 영장인 여러분과 저를 향한 계획은 없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대로 쓰여지는 보람찬 인생을 살려면 내 인생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인생의 길을 가게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오늘 이런 인생의 길에 서있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오늘 이 땅에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살고 있습니다. 인생의 성패는 단순히 세속적인 어떤 성공이나, 혹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잘되는 그 정도의 인생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그 계획 속에서 오늘 하루하루의 삶이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왕 되신 하나님, 내 인생에 왕이라고 선포하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내 인생이 쓰여지고, 내 삶이 다하는 날 후회 없이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여, 지금 여기서 나를 구원하소서" 이 고백이 내 인생에 진정한 고백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나를 향한, 내 가정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내가 온 것은 내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니라" 그렇습니다. 그 분은 내 삶이 허무와 갈등과 고뇌에 가득 찬 인생으로 허우적거리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대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나를 향한 주님의 놀라운 계획을 신뢰하십시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에 진정한 구원자로 영접하기를 원하신다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뜻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 나와서 그것을 길에다가 놓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놓기 시작했습니다. 겉옷을 벗는 행위는 왕에 대한 예절이었습니다. 그를 왕으로 기대했다는 예루살렘 군중들의 기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드디어 찬송소리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본문의 9절을 다시 다같이 읽겠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주여, 여기서 지금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는 이 찬양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구원에 대한 기대를 볼 수 있습니다. 주여, 여기서 지금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그들은 구원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기대했던 구원에는 다소간 오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구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걸었던 메시아로서의 기대는 영적인 메시아보다도 다분히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메시아는 로마 정권을 때려부수고 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걸어야 할 기대는 단순한 정치적인 자유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왔던 나사렛 예수, 그러나 그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런 유명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염려마시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우리는 이 말의 뜻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관련이 없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세속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휠씬 더 중요한 나라입니다. 휠씬 더 본질적 의미를 담고 있는 나라입니다. 표면적인 것만을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내면을 통치하는 왕입니다. 그 분은 어떤 정치나 경제나 외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내 좌절과, 내 부조리와, 내 절망을 아시고 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를 바꾸어 주실 수가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깊은 만남을 경험한 사람은 인생관이 바뀝니다. 삶의 목표가 바뀝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여정에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입니까?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미쳐 사는 것입니다. 미쳐 보십시오. 초대교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미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밥을 먹어도 예수, 꿈을 꾸어도 예수, 잠을 자도 예수, 길을 가도 예수, 앉아도 예수, 서도 예수, 돈을 벌어도 예수, 잠꼬대도 예수…. 이렇게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은 우리가 거기까지 미칩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 크게 미친 사람들을 크게 증거 합니다. 크게 미친 사람을 크게 씁니다. 미칠 것이 없어서 미치지 못하고 사는 것처럼 불행한 비극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우리가 할 일도 많습니다. 해야 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이상으로 귀한 일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일도 없습니다. 큰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미쳐보십시오. 결코 피해가지 마십시오. 구경꾼이 되지 마십시오. 도망가지 말고,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덥석 미쳐 버리십시오. 미치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애정을 느끼지 못하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구경꾼이 되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건의 주역들이 되시고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체념이 너무 많습니다.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몇 가지만 해보면 "그만 두지 뭐" "다시 하지 뭐" 낙심이 너무 많습니다. 좌절이 너무 많습니다. 포기가 너무 많습니다. 불만이 많습니다. 결국은 인생의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생의 활기도 상실했습니다. 무엇이나 따분하고 시들하고 흥미가 없고 재미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자꾸 괴롭힙니다. 자기 심령에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되면 정말 큰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공허감이라고 합니다. 내면이 비어있는 것입니다. 이 내적 공허는 세상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이 음식점에 가서 먹고 내일은 저 음식점에 가서 먹고, 오늘은 이것을 붙들어 보고 내일은 저것을 붙들어 봅니다. 오늘은 이 사람 찾아보고 내일은 저 사람을 찾아봅니다. 그러나 내적 공허감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붙드는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 공허감에서 해방되려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구원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속에 아무쪼록 신령한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 여정을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땅에도 외모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땅이 기름져서 비옥한 땅은 농사가 잘 되고, 경치가 좋은 곳은 관광지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무지 같은 땅은 그 속에 지하 자원이 풍부합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땅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면서 관광하지만, 외모가 보잘 것 없는 땅은 그 속에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 자신을 볼 때에 외모가 없습니까? 화려한 학력이 없습니까? 돈이 없어서 가난합니까? 그렇다면 속이라도 채우시기 바랍니다. 인물이 잘 생긴 사람들, 출세한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길거리를 헤매니까 사람들이 밟고 다닙니다. 구경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들은 주께서 "내가 네 속을 쓰겠노라. 네 속에서 성령의 능력이 솟아오르게 해서 인류의 가슴마다 불길이 타오르게 할 것이다. 네 가슴 속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빼서 인류에게 희망을 줄 것이니 능력 없는 자들아 이리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존재를 살펴서 세상에서 별 것 없다고 생각한다면 주님 전에 와서 속을 채우십시오. 은혜를 채우십시오. 그래서 성령의 불길이 솟아오르게 하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쓰겠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나를 쓰실 때에 나는 주님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보잘 것 없는 나귀였습니다. 등에 가마니나 덮고 주인의 채찍을 맞으면서 짐이나 날라야 했던 나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쓰시니까 제자들의 부드러운 옷이 그 위에 덮어지고 주님이 그 위에 타십니다. 그리고 나귀가 걸어갈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옷을 던지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칩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서 받으시지만 나귀는 덤으로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비록 쓸모 없는 존재일지라도, 허물 많은 존재일지라도 내 등에 주님만 태운다면, 주님께서 쓰시게 한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기적적인 영광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내 허물까지도 주님께서 쓰시도록 그 위에 태우십시오. 내 허물, 내 죄악을 나 혼자 가지면 망합니다. 그러나 그 허물까지도 주님이 타시면 그 허물을 들어서 큰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초라한 존재라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내 입을 쓰시고자 할 때에 입을 열고 복음을 외치십시오. 내 손을 들어서 쓰시고자 원할 때에 내 손을 들어서 섬김으로 일하십시오. 내 발을 필요로 할 때에 복음을 들고 평화의 사도로 가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은 높은 자를 쓰시기도 하지만, 보잘 것 없는 새끼 나귀 같은 존재도 들어서 타시고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소동했다'는 말은 지진이 일어나듯이 천지가 진동했다는 말입니다. 흔들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내 등에 태우고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이 소동해야 됩니다. 직장이 소동해야 됩니다. 마을이 소동해야 됩니다. 우리가 비록 초라한 존재지만 주님을 태우고 천국으로 입성할 때 천군 천사와 하늘이 진동하는 그 날을 상상하십시오. 영광스러운 그 날을 그리워하십시오. 우리가 천국에 입성하는 날 천국에 소동이 나도록 해야 합니다. 비록 나는 나귀 새끼같은 존재일지라도 내가 가진 재능, 재산, 시간, 이 몸으로 주님을 모시고 입성할 때에 주님을 영화롭게 한 그 일로 대 환영하는 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베다니 마을의 산너머에 아무도 타보지 못한 당나귀 새끼가 있었습니다. 매인 나귀는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할 나귀입니다. 주인에게 매여서 주인을 위해서 일하고 팔리는 나귀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를 주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풀어오라는 것입니다. 묶였는데 풀어놓아 끌고 오라. 주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매인 나귀를 풀어서 주님께로 끌고 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세상 죄악에 매여 있습니다. 세상 마귀에 매여 있습니다. 이 결박을 풀고 오라 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해도 우리가 전혀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주께로 못 가도록 무엇인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풀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기 원하십니다. 푸십시오. 무슨 줄에 매여 있습니까? 어디에 결박되어 있습니까? 풀어놓으십시오. 예배를 방해하는 것을 푸십시오. 기도를 못하게 하는 것을 푸십시오. 전도를 못하게 하는 것을 푸십시오. 그래서 주님께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동네 사람들, 그것을 키운 사람마저도 이것이 쓸만한 당나귀인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니까 그는 주님 때문에 존귀한 나귀가 되었습니다. 나귀 등에 예수님께서 타셨기 때문에 나귀도 덩달아서 환영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에 한 번도 쓰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주께로부터 쓰임 받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스스로 연약하다고 쓰임 받기를 주저하는 분들, '내가 이것을 이루고 나면, 이것을 하고 나면' 이라면서 미루기만 하는 분들, 그 모습 그대로 주님께 쓰임 받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잘 나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나는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등에 타시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인생이 되겠습니까?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과거를 묻지 마십시오. 현재 남은 이대로 주님께 쓰임 받기를 사모하십시오.
"주여! 지금 여기서 나를 구원하시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 구원의 역사가 우리 속에 강하게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생포되는 역사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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