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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 (막 1: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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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무 목사

  예수님의 하루일과는 주로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기도하시고 나아가서 회당이나 길거리에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또 각색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시는 모습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늘 하셨던 일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와 전도입니다. 기도가 영적 습관이라면 전도는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나가서 전도하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 하나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기도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장 21절 이하에 보면 안식일에 매우 분주한 삶을 사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당에 들어가셔서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끝나기게 무섭게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으로 누워있는 그녀를 만져주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쉴 시간도 없이 또 집에 돌아오셨는데 예수님이 거하시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했습니다. 각색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이 모여와서 고침 받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33절을 보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근 각처에서 구름떼 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 정도면 예수님의 삶이 얼마나 분주하고 바쁘셨을지, 피곤하셨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는 것은 하는 일이 별로 없어도 참 피곤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날 밤에 푹 주무시고 새벽 늦게까지 쉬셨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다음날 새벽에도 또 일찍 일어나셔서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기도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 35절 말씀 한번 더 읽겠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아멘! 예수님이 늦잠을 주무신다고 누가 뭐라고 불평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의 삶의 원리는 “오히려 바쁠수록 더 기도하시 것, 피곤할수록 더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쁘고 피곤할 때 늘 시험이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며, 마귀의 공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힘을 공급받기 위해서 하나님과 단독자의 모습으로 서서 기도하시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반대로 생각할 때가 오히려 많이 있습니다. “요즘은 너무 바빠서 기도할 틈이 없어요!”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기도를 쉬어야겠어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틴 루터도 늘 “바쁠수록 더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랬기에 분주한 삶을 통해서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더 깨어서 기도했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왜 우리가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될까요?

  첫째는,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탯줄과 같기에 그렇습니다.

  출산하기전의 태아는 산모와 탯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탯줄을 통해서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받고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탯줄이 끊어져 버리면 태아는 사망하고 맙니다. 어찌보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이 탯줄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라는 탯줄을 통해서 하나님께 생명을 부여받고 영적 호흡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 포도나무 줄기에 붙은 가지를 잘라낸다고 생각해봅시다. 잘라내서 잠시 두어도 원래 붙어 있을 때와 그다지 모양이 달라지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를 하루나 이틀을 두면 전혀 모양이 달라집니다. 말라 비틀어지고 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줄기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죽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도라는 영적 탯줄이 끊어져 버린 성도는 점점 그 영혼이 삭막해져가고 죽어가고 맙니다.  우리가 하루 이틀 기도 안 한다고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만, 일주일 동안 기도를 중단한다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진 않습니다만, 그것은 점점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탯줄과 같은 것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를 포기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바로 하나님과의 교재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따라해 볼까요? “기도는 교재의 즐거움을 준다!”

  성경에도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보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과 우리가 하나 되고 일치되는 것 즉,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거기엔 교제의 즐거움, 풍성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만남으로 참으로 안식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도 그렇습니다. 부부가 아침에 헤어졌다가 저녁에 만나면 어떻습니까? 싫습니까? 좋습니까? 물어보나마나 좋습니다. 남편도 직장생활로 피곤하다가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차 한잔 앞에 두고 만나면 좋지 않겠습니까? 집에서 있었던 아이들 이야기, 직장의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나누며 새로운 힘을 얻고 즐거움을 얻습니다.
  만약 부부가 교제가 없다면 월급타서 갖다 주는게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내와의 즐거운 교제의 시간이 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나가서 일해도 힘껏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남편이 퇴근하는 시간에 아내가 그제서야 일어나서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를 하며 시끄럽게 굴면서 남편과 대화할 틈이 없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어느 남편이 좋아하겠습니까? 집안 일은 남편이 오기 전에 끝내놓고, 남편이 오는 순간부터는 남편의 무릎 앞에 앉아서 서로 교제의 즐거움을 나눠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아내입니다. 여러분, 일 하는 아내가 좋습니까? 교제하는 아내가 좋습니까? 저 같으면 100번 교제하는 아내가 좋을 것 같습니다. 따뜻한 아내의 사랑의 위로를 원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거기엔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부엌에서 분주하게 일합니다. 손이 부족했는지 예수님 앞에 와서 항의를 합니다. “저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 듣고 있는데 내 일 좀 도와주게 말 좀 해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마르다야, 네가 너무 많은 일로 피곤하구나. 이것을 하든 저것을 하든 한 가지로 족하니라”고 하시며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마리아를 두둔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교제하는 마리아를 예수님은 더 귀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영적 교제가 바로 기도입니다. 

  성경학자 A.W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는  “열심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잘못은, 하나님의 일에 너무 바빠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너무 게을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느라고 하나님과 교제할 시간이 없다는 문제를 지적한 것입니다.
  집안 일을 열심히 하느라 남편과 대화할 시간도 없다면 그것은 문제이지 않겠습니까? 남편과의 교제의 즐거움이 있을 때 아침에 일어나서 남편을 위해 밥을 짓고 된장찌개를 끓이는 일이 즐거움이 됩니다. 남편과의 교제가 없는 부인은 아침에 일어나면 화부터 납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하나”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을 위한 봉사라면 즐거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위한 봉사라면 그것은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제의 즐거움이 있는 사람은 일도 사역도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없는 사람은 일 좀 시켜 놓으면 불평합니다. “오늘도 나오고 내일도 나오고 힘들어 죽겠어요”라고 하소연 하기도 합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과의 교제부터 회복하고 볼 일입니다.
  교제가 없으면 일이 힘들기 마련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내는 집에서 일하는 것이 식모 같아서 싫을 수 밖에 없습니다. 교제의 즐거움이 있으면 식모가 아닙니다. 여주인으로서 그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학자 토즈는 이런 설명을 달고 있습니다. “교제보다 일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일에 대한 의욕조차 상실하는 위험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주님과의 교제가 이어지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나, 찬양도 따지고 보면 기도입니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일에 아버지 집에 오면 마음이 편안합니까? 불안합니까?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건축헌금 내랄까봐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그건 내일 얘기이고 지금 여기에서는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해야 합니다. 친정에 온 것처럼 말입니다.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곤 합니다. “너무 편안하니까 눈만 감으면 잠이 온다”고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편안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교제의 즐거움 속에 들어오니까 편안한 것입니다. 집에 들어오면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우면 남편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교제의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기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도는 바로 능력을 공급받는 통로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능력을 받고 그 능력을 가지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병자를 고치고 많은 사람을 상담하는 일이 얼마나 지치고 어려운 문제였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잘 감당하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공급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그런 능력을 공급받아야 했다면 우리는 말 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면서 꼭 기도하고 하나님 주신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갈 때 승리한 인생이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기도 안하고 나가서도 잘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한다면 좀더 효율적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에도 더 많은 부와 지혜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을 비유로 들자면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물자의 공급 없이 탄환을 채우지 않고 그저 빈 총만 들고 전쟁하러 나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건 백번 싸워야 백번 지게 되어 있는 뻔한 싸움일 뿐입니다. 우리가 기도라는 무장을 했을 때 하루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마다 능력을 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게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기도는 능력인 것입니다.

  1940년 제 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 30만여명이 해변가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독일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앞은 탱크가, 뒤는 독일 군함과 잠수함들에 가로 막혔습니다. 또한 공중에서는 폭격기들이 맹폭을 펼치고 있어서 꼼짝없이 몰살 위기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때 영국의 처칠 수상이 방송을 통해서 온 국민에게 기도를 호소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웨스트 민스터 교회에 나와 성가대석 바로 앞에 앉아서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그날 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그 지역에 폭우를 내리셨는데 땅이 진흙이 되어 탱크들이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또, 바다에는 태풍이 일어나서 군함과 유보트들이 후퇴하게 됐고, 비행기들도 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국군은 그 기회를 틈타 30만 명이 안전하게 구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국군 진영에는 맑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기후를 주셨고, 퇴군한 영국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새로운 전략을 세워 전쟁을 했고 결국 승리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한사람의 기도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더불어 우리가 마음을 합하여 단합하여 기도할 때에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조지 뮬러 목사님에겐 이러한 간증이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혹독하게 추웠던 어느 겨울날, 하루는 관리인이 와서 보일러에 기름이 다 떨어졌다고 했답니다. 돈도 없고 기름을 얻을 수도 없어 조지 뮬러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밤에 그 추운 겨울이었던 영국이 따뜻한 봄 날씨가 되었다고 합니다. 조지 뮬러의 기도를 들으시고, 고아원의 불쌍한 아이들을 생각하신 하나님께서는 영국 전체의 기후를 바꿔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상 이변의 놀라운 일들이 역사 속에 수도 없이 증언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가 기도 했더니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또 기도 했더니 비가 왔습니다.
  기브온에서 여호수아는 싸우다가 태양을 머물게 해서 승리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초인적인 역사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성경 통독 새벽 기도회를 통해서 새벽에 나와 기도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기도하는 것을 탓하지 않겠습니다만 함께 나와 기도하면, 서로 기도의 격려가 되고 도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집이 멀어서 못 나올 수도 있지만 할 수만 있으면 나오시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고, 새벽에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위대한 일들은 주로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여리고성이 새벽에 허물어졌고, 홍해가 새벽에 갈라 졌습니다. 시편 46편 5절에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번 새벽 집회를 통해서 여러분의 삶의 놀라운 새벽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우리의 향(香)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8절에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기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은 마치 성전에서 피워지는 향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는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전도를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38절 39절을 읽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아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전도를 위해서입니다. 누가 복음 19장 10절에도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란 말씀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서 구원하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의 존재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전도하지 않고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그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성도의 사명은 바로 전도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내가 너희를 가치 있게 하려고 너희를 부른다고 하시기 전에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전도자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전도자가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인데도, 많은 교우들은 전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상을 찡그리고, 전도를 피했으면, 이런 부담 좀 갖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전도는 우리의 본질이기 때문에 피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 하나님이 성도를 이 땅에서 죄 가운데 구원하시고, 죄를 씻어주시고, 저들에게 사명을 맡기신 목적이 전도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의사가 있습니다. 그 의사의 취미는 피아노 연주입니다. 연주회를 일년에 2번 여는데 연주회하는 일주일 동안은 병원 문을 닫고 환자가 와도 돌보지 않습니다. 그는 본업인 의사의 행위에 충실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음악가가 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학생이 공부하라고 부름 받았듯이 의사는 환자를 진단하고 약을 투여하고 돌봐야 합니다. 이처럼 사업가는 생명을 걸고 사업을 해야 하고, 과학자는 열심히 실험에 실험을 거듭해서 인류에게 행복을 줘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하는 일에 열심과 최선을 다 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전도를 포기해선 안 되는 이유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8장 19절 이하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삶을 살 때 주님이 우리와 동행 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유언이고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이라면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제외시키고 다른 삶에 열심이면서 잘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늘 힘써야 될 일은 바로 전도의 사명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말 중에 대학 졸업하고 직장 못 구하고 기다리며 놀고 있는 사람을 ‘백수’라고 합니다. ‘백수’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적인 백수’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것이 ‘영적인 백수’입니다. 여자 분은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영적 백조’라고 할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라면, 유언이라면 우리는 기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일이 맘에 들고, 안 들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의 명령이라면 우리는 그 일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도만이 영혼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도를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고백 했습니다. 복음 전도만이 구원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길은 전도 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전도하는 것이 미련해 보입니다. 지금 같은 세상에 전도지 들고 전도 하는 것이 미련해 보입니까? 남에게 가서 예수 믿으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무식해 보이기도 합니까?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오늘도 영혼들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전도는 꼭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이웃 동네에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세요. 친절하게 대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시면, 그 분들을 조금씩 조금씩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란 말을 안 해도 사랑을 베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분은 복음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신다면 더 좋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권사님은 정기적으로 산책을 해서 건강관리를 하시는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보니까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내가 산책은 매일 빠지지 않고 가면서 전도는 쉬는 날이 얼마나 많은가?’하는 가책이 들어서 산책 할 때 마다 교회 주보대 위에 있는 전도지를 가져가서 나눠주기 시작했답니다. 어떤 사람은 기쁘게 받기도 하고, 또 냉정하게 거절하기도 하고, 받아서 쓰레기통에 구겨 넣는 사람도 있지만, 상관없이 열심히 전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1년에 한두 명씩은 그 전도지를 받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감사하며 그 일을 꾸준히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아들이 성장해서 결혼할 배우자가 있다고 해서 데려 오라하니 한 참한 아가씨를 데려 왔습니다. 가정이 어떻고 예수를 믿느냐고 하니 예수을 믿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믿게 되었냐고 물으니 그 아가씨가 고등학교 때 이 권사님이 전해주는 전도지를 받고 그날따라 마음에 감동이 와서 가까운 교회에 한번 두 번 나가게 된 것이 교회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 권사님의 아들을 만나게 되어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며느리 될 사람을 권사님이 전도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는 우리의 삶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포기할 수 없는 사역입니다. 옆에 분들하고 한번 다짐합시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 합시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이고, 복음을 증거 하는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통독 새벽 기도회에 나오셔서  말씀을 듣고, 기도해서 힘을 공급받고,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이웃에게 복음을 증거 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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