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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 (삼상 8:1-9, 롬 11:13-21, 요 19: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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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1. 주전586년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면서 이스라엘은 나라 잃은 유랑민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역사는 1948년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을 회복하여 독립된 국가를 세우기까지 2천 5백 여 년을 지속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나라가 망하고 주권을 잃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왕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렘23:5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예언은 나라 잃은 국민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숱한 고난의 역사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왕이 속히 오셔서 유다를 구원하고 이스라엘에 평화 주시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세월이 지난 어느 날 헤롯 왕궁에 동방박사 3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는데 그분이 어디계시냐? 우리는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하는 폭탄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가장 놀란 사람은 당시 분봉 왕이었던 헤롯이었습니다. 그가 놀란 것은 물론 왕이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장차 자기 신변에 미치게 될 불길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더 흥분한 것은 이 소문을 들은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이었습니다. 수 백 년 동안 하나님이 보내실 “그 왕”을 기다려 온 그들로서는 “왕이 태어났다”는 이 소식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소동은 마치 일과성 태풍같이 한동안 소문꺼리가 되었으나 이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한 세대가 흘러갔습니다.

무척이나 어수선한 세상에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등장했고, 곧 이어서 나사렛 사람 예수가 나타나서 한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며 전도행각을 벌렸습니다. 결국 예수는 당시 교권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어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죄수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심문한 말이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말은 유대 역사의 핵심부분과 관련되는 질문임과 함께 예수님에게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올무가 되었습니다.

심문을 마친 빌라도가 예수님을 끌고 백성들 앞에 섰습니다. 그가 백성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란 말이냐? 이번 유월절에 죄수 한 사람을 특사할 터인데, 여기 바라바 예수라고 하는 살인강도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 두 사람 중에 너희가 한 사람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살인강도 바라바 예수를 석방하고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아 사형토록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유대인들은 한 마디 더 붙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 왕이 없나이다”.  가이사는 당시 유대를 지배하고 있던 이방을 대표하는 로마 황제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만 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를 요구하고 이방 왕인 가이사를 선택하므로 유대나라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제외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이스라엘 역사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만 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버린 대가였습니다. 삼상2:30에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한 말씀 그대로입니다.

2.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체제는 특수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신정정치(Theocracy)였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정치체제라기보다 종교체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특수형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우리도)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요구를 들으면서 우리는 나중에 예수님을 거부하고 이방 왕 가이사 만이 자기들의 왕이라고 주장했던 유대백성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물론 여기 당시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이런 요구를 하게 된 몇 가지 그럴듯한 이유가 있습니다.

(1) 5절에 “당신은 늙고...”라고 했습니다. 즉 사무엘이 나이 많아서 사사로서 또는 선지자로서 그 직무를 감당하는데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말입니다. 일견 타당한 이유 같으나 이것은 한갓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속셈은 엉뚱한데 있었습니다. 7절에 보면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 풍속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세상 법을 따라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표방하는 명분은 사무엘이 늙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도, 그리고 왕성하게 사역할 때에도, 지금 나이 많은 때에도 그 자신의 지혜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겉으로 나타난 인간 모습을 보고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이런 요구 배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소위 신앙인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케케묵은 옛날이야기이기 때문에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떠벌립니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의 변화하는 추세에 맞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대의 성녀로 추앙받는 마더 데레사에게는 한 가지 변할 수 없는 신조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 말씀대로 실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2) 왕을 요구하게 되는 두 번째 이유는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처럼 사무엘도 역시 자녀 교육에는 성공하지를 못했습니다. 참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도자들의 가정이 이러하니까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하는 명분을 삼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교역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당사자만이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좋은 협력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서신인 딤전3:4에 교회 지도자의 자격 가운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사무엘의 가정적인 문제를 빌미로 내세워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의 지도자인 사무엘의 가정 문제를 까발려서 공개적으로 성토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내세워 자기들의 잘못을 은폐하고 정당화 하려고 했습니다. 여기 저들의 부정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전제로 해서 서로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교역자든지 어떤 가정이든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마치 무슨 자랑꺼리라도 되듯이 공개하고 성토하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도 아니고 성도들이 취할 자세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이 남의 눈의 티를 보고 왈가왈부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런 일을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눈에 다른 사람의 허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이해하고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어집니다. 교회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교회나 교역자 또는 교회 지도층에 대한 불만만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만들게 됩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교회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성경적 원리와 방법에 투철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일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우리 왕으로 우리 가운데서 다스리시게 됩니다.

(3) 셋째로 왕을 세워달라고 한 이유로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우리도 모든 나라와 같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 정체성을 포기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교회의 질서가 있고 교회의 법이 있습니다. 이런 질서와 법은 다 성경에 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의 법과 질서를 존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교회에서도 세속적인 방법을 절대시하여 그 방법을 따른다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사결정의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 다수결 원칙입니다. 찬성하는 사람이 많은 쪽의 의견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것이 다름 아닌 다수의 의견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수의 힘에 굴복하여 양심도 법도 무시하고 십자가형을 선고하고 말았습니다. 다수의 의견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단순한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선택할 때 표를 많이 얻는 사람이 당선이 됩니다. 그래서 이 목표 달성을 위해서 온갖 비 신앙적인 방법이 동원된다면 비록 자기 목표는 이루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왕 되심은 거부한 것입니다.

특히 노회나 총회에서는 대부분의 임원들을 선거로 뽑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맡고 싶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자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목표를 당선에만 둘 때, 거기에는 하나님도 없고, 성경도 없고, 신앙도 양심도 없습니다. 당선되어야한다는 일념뿐입니다. 그래서 세상 선거를 뺨치는 온갖 비리들이 횡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하게 됩니다.

3.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그럴 듯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입니다. 그들의 속내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럴듯한 명분으로 자신들의 속내를 포장하고 있습니다. 위선이요 가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십니다. 아무리 겉으로 화려한 말을 하고 훌륭한 제스쳐를 취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 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폐일언하고 지금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진정 왕이십니까? 여러분은 우리 왕이신 주님의 다스리심을 즐겨 받기를 원하십니까? 지금도 빌라도는 여러분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하십니다. “예수 바라바냐? 예수 그리스도냐?” 일마다 때마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몫으로 남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그 피의 책임을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토록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확인하십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하십시다.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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