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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20)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요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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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주제로 20 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고난주간을 한 주 앞두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가장 진한 사랑은 낭만과 즐거움으로 나타나지 않고 고난과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내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고난과 죽음으로 나타내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그 고난과 죽음의 사랑을 한국 땅에서 가장 진하게 나타내 보여준 사람이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요13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은 고난과 죽음으로 나타내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므로 나타났고 그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서, 아니 지옥의 죽음을 향해서 묵묵히 걸어가시므로 나타났습니다. 요13장에 예수님이 등장하고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아침 우리들의 시선을 요한과 베드로와 가룟 유다에게 맞추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사랑을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 ‘끝까지’란 말을 영어로는 to the last, to the end, to the very end, to the uttermost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양적으로 질적으로 마지막까지, 끝까지, 최후까지, 최고로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그 사랑의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스킬더라는 화란의 신학자는 그 고난과 죽음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내용을 알 수 있는 존재는 온 우주 안에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히 그 사랑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더듬어 살핀다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땅에 내려오신 사랑이었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지옥에까지 내려가신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He descended into hell.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입니다. 지옥에까지 내려가셔서 우리들이 받아야 할 지옥의 저주를 받으시면서 우리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들의 한 평생과 관련해서 더듬어 살핀다면, 우리들의 삶이 끝나는 세상 끝날 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베도로가 너머지고 또 너머지면서 배신해도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 까지 사랑하신 사랑이었고, 유다가 배신의 계획을 꾸미며 은 삼십에 자기를 팔았어도 그에게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시면서 사랑하신 사랑이었고,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불행한 죄수의 삶을 살았어도 그의 마지막 날까지 그와 함께 하시면서 그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비밀을 나타내 보여주신 극진한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요13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특히 요한과 베드로와 가룟 유다와 관련해서 나타난 예수님의 ‘끝까지’의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사랑은 접촉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만지시며 씻어주셨습니다. 사랑은 가까이 와서 접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찌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사46:3,4). 엘리야가 지쳐서 쓸어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그를 어루만져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게 대셨고,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져주셨고,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시고 안수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만지시며 씻어주셨고, 떡을 떼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먹여주셨고, 잔을 가지고 돌리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마시게 하여주셨습니다. 사랑은 가까이 있는 것이고 만지는 것이고 접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4,15장에서 이런 말씀을 반복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리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은 계3:20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사랑은 가까이 있는 것이고 함께 있는 것이고 접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들에게로 가까이 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있으면서 우리들을 만져주시고 접촉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고 쌍방 통행입니다. 요13장에 나타난 요한은 예수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까이 있었습니다. 물리적으로 시공간적으로 예수님에게 가까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가로되.” 요한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뿐이 아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아니 골고다 언덕 십자가 아래에서도 항상 예수님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바라”(요일1:1).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베드로는 요한처럼 예수님에게 가까이 있지 못했습니다. 조금 떨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직접 대화하는 대신 요한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대화를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요한에게] 머리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베드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뿐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후 예수님이 붙잡혀서 끌려가실 때에도 예수님 가까이 좇아가지 못하고 멀찍이 좇아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막14:54). 그리고 조금 후에는 아예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몸도 떨어져 있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를 들으면서도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유다의 마음은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딴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설교를 들으면서도 딴 생각을 하고 딴 짓을 하도록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조금 후에는 마귀가 유다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설교를 들으면서 딴 짓을 하는 사람들에게 마귀가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오셔서 제자들을 사랑하셨는데 제자들은 가지 각색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가까이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었고, 베드로는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유다는 아주 멀리 떠나 딴 생각과 딴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우리들에게 있는가 없는 가를 가름하는 중요한 척도는 우리와 주님과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가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 사랑이고 축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고백했고 야고보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새벽마다 벧엘로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 기도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최상의 방법이고 주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둘째 사랑은 목소리입니다.

  사랑은 목소리와 말 소리를 주고 받는 것입니다. 라디오에서 자주 나오는 광고가 하나 있는데 그 광고에 이런 말로 되어 있습니다. “나와 함께 있어줘, 그대 목소리 들려줘.” 아주 멋진 광고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고 사랑은 그대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었고 제자들에게 자기의 목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주님의 목소리와 음성과 말씀이 어느 책보다 충만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라고까지 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는 세상의 빛이나 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자기의 목소리와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사랑은 목소리와 음성입니다.

  그런데 목소리와 음성은 일방통행이 아니고 쌍방 통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자기의 목소리를 들려주시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씀했습니다. "네 소리를 듣게 하라"(아가2:14).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아가8:13). 요한은 예수님과 속삭였습니다. “그가[요한이]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님도 그에게 속삭였습니다.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요한에게 속삭였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니라.”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왜나햐면 요19:27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은 세상에 사는 마지막 날까지 예수님과 속삭였습니다. 계시록에는 “내가 보니” “내가 들으니” 라는 말로 가득합니다.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과 속삭이지 않았습니다. 직접 말을 하지 못하고 요한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말을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요한에게] 머리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사랑이 없을 때 직접 말을 하지 못하고 간접으로 말을 합니다. 디베랴 바다가에 부활의 주님이 나타났을 때에도 요한은 직접 말을 했지만 베드로는 직접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가가 주시라 하니 베드로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물론 베드로가 말을 도무지 하지 않은 사람은 아닙니다. 큰 소리로 말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사랑의 속삭임이 아니었고, 자기를 드러내는 자기 자랑의 말들이었고,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자기 주장의 말들이었습니다. 사랑은 속삭임의 목소리이지 자기를 들어내고 주장하는 떠드는 말들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유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에게는 침묵만 있었습니다. 침묵이 때로는 금이 될 수도 있지만 저는 침묵이 불행이요 저주요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없을 때 침묵이 있을 뿐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유다에게는 말이 없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캄캄한 밤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유다가 나가니 밤이더라.”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 물론 유다도 살았을 때 말을 조금은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들은 불평과 불만의 말들뿐이었습니다.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던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사랑은 떠남입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최고의 사랑은 떠남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 떠남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이중표 목사님은 이것을 별세라고 강조합니다. 사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이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눅9:31).

  별세는 세상을 떠남을 의미하고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과 자신을 부인함을 의미합니다. 세상과 자신을 버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별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떠남과 별세가 제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떠난다고 말씀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16:7).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길이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므로 우리의 살길이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또 한 가지 우리의 유익은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을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들 앞서 떠나심의 모습을 보이셨으므로 우리도 그저 예수님의 떠나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두려움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애착을 모두 벗어버리고 사명을 다한 후 주님을 따라서 우리도 세상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떠남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모했습니다. 떠남을 세상에 있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까지 고백했습니다. 사실 바로 떠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중표 목사님은 “별세의 행복”이란 제목의 책을 썼고 최근에는 “나는 죽어도 행복합니다”란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떠남과 사랑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일치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13:36). 도마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14:5). 빌립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요14:8).  베드로와 제자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고 부정적이었습니다. 세상에 머물면서 종교적인 왕국과 정치적인 왕국을 이루고 한 자리를 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유다는 밖으로 나가서 정치적인 음모를 꾸몄습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할 수 없이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키도록 하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세상을 떠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읽은 김동리 작품인 「사반의 십자가」에 보면 유다는 정치적인 혁명을 이루는데 만 관심을 기울이다가 결국 그것이 실패하자 자살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요한은 떠남의 삶을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입을 열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5,16).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1,2).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계22:30,31).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은 가까이 있는 것, 함께 있는 것, 접촉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우리 가까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만져주시고 접촉해주셨습니다. 사랑은 목소리를 주고 받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목소리와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사랑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별세하셨고 별세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다처럼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실수를 반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처럼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처럼 주님 가까이, 주님과 함께, 주님을 만지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목소리를 주고 받으며, 주님과 속삭이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십자가와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조만간 주님처럼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행복하게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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