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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쓸 것을 썼다! (요 19: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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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 1
일전에 흥미로운 책 한 권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헨리어트 앤 클라우저 박사(Henriette Anne Klauser, Ph. D.)가 쓰고 안이순 씨가 번역한 <종이 위의 기적, 쓰면 이루어진다!(Write it Down, Make it Happen!)>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의 책인데요, 저자는 15년 이상의 강의 경험과 전 세계에서 수집한 다양한 사례를 통하여, 이 책의 제목이 결코 허위 선전이거나 과대광고가 아님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 책에서 조금 인용해 봅니다. “당신이 이루고 싶은 일들을 종이에 쓰는 순간, 당신의 삶은 마법으로 빠져 든다. 놀라지 말라, 당신이 펜을 드는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꿈이나 소원을 종이에 적는 행위는 우주에 신호를 보내는 것과 같다. 이제 세상은 당신의 소원에 화답하기 위해 가동된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모든 일들은, 실은 자신이 세상을 향해 보낸 무의식적인 메시지들에 의해 일어나는 <필연>이다.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듯, 열망은 담은 메모 하나가 당신의 인생에 기적을 가져다 줄 것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꿈을 기록하는 방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저 기록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담아, 열정적으로 펜을 움직이면, 그것은 스스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된다. 당신의 손으로 당신의 삶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삶은 기록한 대로 펼쳐진다. 자, 이제 출발해 보자. 믿음을 가지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한 마디로 꿈과 소원을 종이 위에 적으라는 거지요.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 펜을 들어 종이 위에 쓰는 순간, 그 꿈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는 거지요.

그러면서 꿈을 기록해 가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하는데요, 한 대목만 인용해 봅니다. “나중에 머리를 쥐어짜는 일이 없도록 지금 바로 자신만의 목표를 담은 목록을 작성하라. 아늑한 커피 전문점에서 카페라떼 한 잔을 앞에 두고, 혹은 내 집 식탁에서 녹 차 한 잔 앞에 두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어서 기록하기 시작하라. 종이를 앞에 두고 머뭇거리지 말라. 목표가 너무 거창해서 실현 불가능할 것 같아도, 무조건 기록하고 그 옆에 별표를 해두어라. 원하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아도 움츠러들지 말고 기록하라. 그 꿈을 달성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이 전혀 없어 보이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기록하라. 계속 적어 내려가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원들을 원하는 만큼 적어라.”

그러면서 저자는 수많은 예화 가운데 가정 먼저 영화배우 짐 캐리(Jim Carry)의 경우를 소개합니다. 책에서 소개한 대로 전해드립니다. "짐 캐리는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무명시절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한동안 집도 없이 지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렇게 살아갈 순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할리우드에서 가장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수표책을 꺼내어, 거기에 출연료라 적고, 스스로에게 천만 달러를 지급했다. 그 후로 그는 그 수표를 지갑에 넣고 다녔다.

놀랍게도 정확히 5년 후, 짐 캐리는 <덤 앤 더머 Dumb & Dumber>와 <배트 맨 Batman>의 출연료로 자신이 스스로에게 지급했던 금액보다 더 많은 1,700만 달러를 받게 되었다. 그 영화 이후 그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졌고, 이제 그는 영화 한 편당 2천만 달러 이상의 출연료를 받는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다. 5년 전에 스스로 적어 놓았던 꿈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 2
저 자신, 동광 교회를 섬기면서 비슷한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남자 제2기, 그리고 여자 제3기 제자 훈련반의 입학식이 있는 참 좋은 날인데요, 이 분들의 선배, 곧 제1기 제자 훈련을 시작할 때의 일입니다. 제자 훈련 첫 시간에 우리는, 금번 제자 훈련과정을 통해 꼭 이루고 싶은 소원 한 가지씩을 종이에 적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우리는 거기 꿈을 적어 두었다는 사실을 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년 동안의 제자 훈련이 끝날 즈음, 거기 적어 놓았던 꿈과 소원들이 다 이루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적어 놓았던 꿈들이 다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꿈에도 그리던 새 집을 장만하기도 했습니다. 10년 만에 꼭 필요한 새 차를 구입하게 된 분도 있었습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에 응답을 받은 분도 계셨고, 남편과의 관계가 회복된 분도 계셨습니다. 어떤 분은 사업의 문이 열리기도 g했고, 어떤 분은 자기 삶의 목표를 발견하면서 생의 활력을 되찾기도 했습니다. 정말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적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얼마 후, 앞에서 소개한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종이 위의 기적, 쓰면 이루어진다!>라는 이 책의 광고를 발견한 순간, 저 자신 반가움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럼, 이루어지고말고! 믿음으로 쓰면 이루어지고말고!> 여러분, 우린 펜 끝에 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종이 위에 임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정말입니다. 쓰면 이루어집니다.

# 3
오늘 말씀의 제목은 <나의 쓸 것을 썼다!>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2절에 기록된 빌라도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요, 지금 로마 총독이 유대인 대제사장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그런데 로마 총독이 유대인 대제사장들에게 하는 말 치고는 좀 이상합니다. 천하의 로마 총독이 일단 썼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식민지 나라 백성에게 굳이 내가 쓸 것을 썼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체 무엇을 써 놓고 나의 쓸 것을 썼다고 하는 걸까? 좀 이상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짧은 대답 속에 많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대답 속에서 주시는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우선 빌라도가 적어 놓은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확인합니다. / 19:19 / (읽기) /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한 마디로 여기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 20절에 보니, 이 말을 히브리말과 로마 말과 헬라 말로 기록했다는 점이지요. 당시 사람이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당시 공용어였던 세 가지 언어로 적어 놓았다는 뜻인데요. 이로써 총독은 자기도 모르게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요, 거기 19장 21절을 보니, 유대인이 대제사장들이 들고 일어나 총독에게 항의하는 말,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저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는 주장이지요. 십자가에 처형당한 죄인이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러니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고쳐 적으라는 거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유대인들의 거친 항의에 대하여 총독 빌라도가 대답한 말, <나의 쓸 것을 썼다!>는 겁니다.

총독 빌라도가 어떤 마음으로 나사렛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었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나의 쓸 것을 썼다!>고 대답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총독 자신이 어떤 동기에서 그렇게 적었고, 또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대답했든지 간에, 일단 그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적고 나니까, 놀랍게도 거기 적은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랬습니다.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 적을 때만 해도, 세상은 예수를 왕이라 여기지 않았었습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 당신이 우리의 왕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형 방법 중에서도, 가장 고약하고, 가장 참혹하고, 가장 비인간적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형수, 곧 죄인 중의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로마 총독이 그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적고 난 후, 놀랍게도 그 말 그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해서 이젠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라 고백하게 된 것이죠.

해서 급기야 이 고백을 가지고 많은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요, 그 가운데 <예수 우리 왕이여!>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본래는 아일랜드 독립 운동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복음 노래인데요,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많이 불려지고 있고요, 우리 교회에선 주일 예배 개회 찬송으로 부르고 있지요. 아일랜드계 미국 음악가인 폴 카일(Paul Kyle)이 만든 노래, <예수 우리 왕이여!> 우리도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이 시간, 함께 불러 보고 싶습니다.

<예수 우리 왕이여, 이 곳에 오셔서, 보좌로 주여 임하사, 찬양을 받아주소서,
주님을 찬양하오니, 주님을 경배하오니,
왕이신 예수여 오셔서 좌정하사 다스리소서!>

# 4
기독교를 가리켜 <십자가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모든 교회의 상징이요, 또한 우리 신앙의 핵심 내용이기도 한 십자가, 이젠 그 십자가를 우리 주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피해가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더 이상 공포의 대상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이젠 십자가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 받는 상징이요 로고가 된 셈입니다.

그러나 본디 십자가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도, 그렇게 낭만적인 것도, 또한 우리가 액세서리로 달고 다닐 만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사형수를 처형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형의 기원은 옛날 파사 국, 곧 페르시아 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저들은 땅을 신성시한 반면, 죽은 사람의 시체를 불결하게 여긴 까닭에,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땅에 묻지 않고, 나무에 매달아 놓거나 망대 위에 올려놓아, 독수리 등의 맹금류들이 날아와 쪼아 먹게 했습니다. 이런 풍습이 사형수를 처형할 때에 적용된 것이 십자가형인데, 장례식과 사형의 차이는 죽은 다음에 내거느냐 아니면 살아 있는 상태로 내거느냐 하는 점이었습니다. 사형수는 산 채로 십자가에 내다 걸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가의 형이 마침내 로마까지 전해졌던 것인데, 로마 당국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겐 십자가형을 언도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형이 너무 잔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도망치다 잡힌 노예나, 반정부 정치범들이나, 혹은 흉악한 살인범들을 처형하는 사형 틀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일단 십자가형이 확정되면 먼저 사형수를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 때 사용된 채찍은 손잡이에 가죽 줄을 매어놓은 것으로, 쇠붙이나 뼛조각이 박혀 있어, 그 채찍으로 맞을 땐, 자기 몸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그런 채찍으로 몇 대만 맞아도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채찍에 맞다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채찍으로 다 때린 후에는 사형수의 목에 죄목을 적은 패를 걸고,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게 하고는, 동네 한 복판을 가로질러 처형 장소까지 끌고 갔습니다. 처형 장소는 대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있었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일벌백계의 효과를 노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처형 장소에 도착하면, 십자가를 땅에 내려놓고, 사형수의 옷을 벗긴 후, 십자가 위에 누이고는 양손과 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못만 박아 놓으면 십자가를 세웠을 때 손이 찢어지기에 손목을 십자가에 묶어 놓곤 했었습니다. 그 때 벗긴 사형수의 옷을 로마 군병들이 나누어 갖곤 했지요.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는 짧게는 10시간, 길게는 2~3일이 지나서야 숨을 거두곤 했습니다. 심한 경우 1주일을 버티기도 했는데요, 거기 십자가 위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대낮에 내리쬐는 태양 볕과, 피 냄새를 맡고 날아온 새들, 그리고 땅에서는 기어 올라온 독충들이었다고 합니다. 해서 당시 로마의 세네카는 <십자가형이야말로 인간이 구상해낸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이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십자가는 본디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 5
그런데 죄 없으신 우리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바로 저 십자가형에 처해야 한다고 덤볐던 것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던 저들에겐 사형 언도권이 없어, 저들이 예수를 붙잡아 로마 총독에게 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형할 하등의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심문을 해 보아도, 저 잔혹한 십자가형에 처해야 할 만한 죄를, 예수님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해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무죄 방면하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오직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할까요? 오히려 로마 총독은 예수님을 살리려 하고, 유대인 동포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정말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처참한 사건인 동시에 부끄러운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살기로 충만해진 유대인들, 신앙적 양심도, 민족적 자존심도 다 내버리고, 이 세상에 우리가 섬길 왕은 오직 로마 황제 한 분 뿐이라고 낯 뜨거운 맹세를 하면서까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그 때 상황을 전하는 요한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니다. / 19:12-16 / (읽기)

결국 대제사장을 앞세운 유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총독은 예수님을 저들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결국 우리 예수님, 하나도 빠짐없이 십자가형의 모든 절차를 따라 고통당하시고, 마침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 때 저들은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 옆에 두 강도의 십자가를 같이 세웠습니다. <예수는 왕이 아니라 여기 흉악범들과 같은 사형수일 뿐!>이라는 주장이었지요.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모든 수치와 모욕과 고통을 다 당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 그것은 수치와 모욕과 그리고 실패의 상징이었습니다.

# 6
그런데요,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토록 부끄러운 십자가의 도가 오히려 점점 퍼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마저도 두려워 가까이 가지 못했던 십자가였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그 십자가의 도가 점점 더 왕성하게 퍼져 나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적어 놓은 총독 빌라도의 고백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총독이 적어 놓은 글을 그대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바울이라는 인물의 가슴 속에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그의 인생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직접 들어봅니다. / 고전 1:18, 22-25 / (읽기) / 그랬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당시 미련하고 부끄러운 것, 앞길에 거치는 장애였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 약한 것, 거리끼는 것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난 사도 바울, 그 부끄러움의 상징을 붙잡고는, 이 십자가의 도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적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조롱하고, 또 모두가 회피하는 그 십자가를 높이 들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 갈 6:14(310쪽) / (읽기) / 지금 무어라 고백합니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거기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은혜가 되는군요. 세상은 부끄럽다고 하나, 그러나, 세상은 미련하다고 하나, 그러나, 세상은 걸림돌이라고 하나, 그러나, 네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자랑이 없다는 겁니다. 내 평생 유일한 자랑, 그것은 십자가뿐이라는 거지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을 집필한 곳은 주로 감옥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신 십자가 때문에 죄수로 붙잡혀 지금 고초를 당하는 중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자랑스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믿음으로 적었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곧 능력이요, 십자가가 곧 지혜요, 십자가가 곧 구원이요, 해서 십자가만이 내 자랑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적어 놓은 지 2천년이 지났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사도 바울이 그렇게 외로운 상황에서 적어 놓은 이 글들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젠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가 능력이요 십자가의 도가 지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젠 누구 하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종이 위에 써 놓았던 것, 그대로 다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 7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나는 펜을 들어 무엇을 적고 있습니까? 내가 쓰는 글들, 어떤 내용의 글들입니까? 여러분, 펜을 들어 어서 나의 꿈을 종이에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한번 이상, 펜을 들어 내가 이루고 싶은 일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안타까운 점은,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글 쓰는 이의 익명성이 보장되자, 아무 말이나, 아무 글이나 막 써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흉악한 글들만 잔뜩 써 놓으니 우리 사회가 점점 흉악해져 가는 겁니다. 그렇게 음란한 글들을 자꾸 써 놓으니 우리 사회가 점점 음란해져 가는 겁니다. 불법과 탈법을 부추키는 사악한 글들을 써 놓으니 우리 사회가 점점 불법과 탈법으로 무너져 내리는 겁니다. 아니오, 이젠 좋은 글을 더 많이 써야 합니다. 좋은 생각을 글로 남겨야 합니다. 사악한 무리가 남김 사악한 글들을, 우리 성도들이 나서서 주님의 말씀으로 덮어 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좋은 생각을 글로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글로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앞장서서 블랙 메일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음란한 글, 사악한 글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 대신 꿈과 비전이 가득한 글, 주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글, 축복의 통로가 되는 글들을 자꾸 써야 합니다. 내 안에 떠오르는 생각이 없을 땐 주님의 말씀만 적으셔도 됩니다. 왜? 주님의 말씀을 적어 놓으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다. 내가 쓰는 글이 형편없기에 내 인생이 형편없게 되는 겁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일단 펜을 들어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펜 끝에 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기적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단, 글을 쓰시되, 꼭 써야 할 글들을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늘 글을 가까이 하며 한 평생 사시다가, 하늘나라 가시는 날, 나의 쓸 것을 다 썼다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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