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막 13:28~37)

  • 잡초 잡초
  • 376
  • 0

첨부 1


- 설교자 : 김양인 목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상황은 여러 방면에서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을 생각나게 합니다. 지난 연말에 인도네시아 아체 주에서 발생해서 서남아시아의 여러 해안 도시를 파괴했던 쓰나미 재앙은 온 인류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지질학자들은 심해에서 일어난 지진이 이번 쓰나미 해일의 발생 원인이라고 규명했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번 사건을 성경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지금 세계 도처에서 민족 분규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0세기에만 해도 세계 대전이 두 번 일어났고, 한국동란과 베트남 전쟁, 유고 내전, 걸프 전쟁 등이 일어났으며, 지금도 중동을 비롯해서 세계 여러 곳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연재해 역시 날이 갈수록 그 심각성을 더해 갑니다. 지진의 활동이 더 활발해지고,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세계 여러 곳에서 농토의 사막화가 급속히 진행되어서 수많은 사람이 기근으로 죽어가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과 같이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왜곡 선전하는 이단과 사이비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짓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은 역사의 종말이 이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 역시 지금 선교사들의 헌신과 방송과 문서, 인터넷 등 여러 방도로 활발하게 이루어져 가는 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류의 역사가 끊임없이 지속될 줄로 알지만 성경은 종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을 통해서 지금 이 시대가 종말의 때에 매우 가까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에 근거해서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에 관해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성도들은 시대의 징조를 분간하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 하심은 밤에도 잠자지 말고 뜬 눈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는가 하면, 1992년도에 우리 사회에 시한부 종말론으로 인해 소동이 일어났을 때 매일 밤 자정에 모여서 날이 밝기까지 뜬 눈으로 지새우는 자들이 있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밤에 잠자지 말고 뜬 눈으로 지새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세상일에 마음 빼앗겨서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는 것은 영적으로 잠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는 시대의 징조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지 못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서두에서도 언급한 대로, 지금 우리는 여러 가지 시대의 징조를 대합니다.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일어나고, 민족 간의 분쟁과 국가 간의 전쟁 소문을 듣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활동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나가는 것을 봅니다. 그 외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식어가고 돈을 사랑하는 것을 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들은 이와 같은 시대상을 바라보면서 지금이 어떤 때 곧 주님의 강림이 가까운 때임을 알아챕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천재지변을 통해서, 인류 역사를 통해서, 거짓 종교가들의 출현을 통해서, 사람들의 타락상을 통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리고 계십니다.

작년 연말에 있었던 재난의 경우에, 만일에 인도양상에 쓰나미 경고 시스템이 있어서 쓰나미의 징조를 미리 감지했더라면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재앙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해 드린 대로, 성경은 우리에게 말세에 무슨 징조들이 있을 것인지 소상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라야 이 징조들을 보고 때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때 아닌 한파가 밀어닥쳐서 강원도에는 폭설이 나리고, 남쪽 지방에도 한겨울처럼 기온이 차갑습니다. 그러나 도로 겨울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봄이 오는 징조를 보아서 알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추운 날씨에도 농사 준비를 위해 분주히 움직입니다.

시대의 징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마지막 때의 징조들을 수없이 관찰할 수 있습니다. 시대의 징조를 알아차린 성도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주님 만날 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1절로 14절에 이르기를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다 죄악의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곳곳에서 술 취한 자들의 주정과 잠자는 자들의 잠꼬대 소리가 들려옵니다.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한 것과 같이, 내일 아침이면 불과 유황으로 멸망할 줄도 모르고 롯의 집을 에워싸고 두 손님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던 패역한 소돔 사람들과 같이, 세상 사람들은 번영에 취하여, 세상 향락에 취하여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고, 겨울이 깊으면 봄이 가깝듯이, 죄악의 밤이 깊으면 그만큼 재림의 아침이 가까운 것입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 입고 허리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손에 쥐고 주님의 재림을 고대해야 할 때입니다. 아직 주님을 믿지 않고 있는 부모, 형제, 남편이 있거든 속히 전도해야 할 때입니다. 또 우리 주위에 사는 불신 이웃에게도 속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금은 주님 앞에 설 때 받을 상급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 영적으로 깨어서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는 슬기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세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4-36)고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방탕한 생활에 빠져 살고, 술을 즐기고, 생활의 염려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그것은 그 마음이 둔해졌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이 둔해졌다 함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전에 티비에서, 한 밤중에 술 취한 사람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길가에 쓰러져 있는데 소위 아리랑치기 범들이 다가가서 도와주는 척하면서 지갑을 빼가는 것을 방영해 주었습니다. 지갑을 빼가도 술 취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헛소리만 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자신의 안위를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은 술만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면 “사업이 너무 바빠서 신앙생활을 할 시간이 없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일에 취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업을 잘 할 수 있을까, 무슨 사업에 진출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머릿속이 자나 깨나 사업구상으로 여념이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일에 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은지 예수 믿을 겨를도 없습니다. 사업에 힘쓰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영혼의 문제를 도외시할 정도로 사업과 일에 취해서 살아가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연구에 몰두해서 예수 믿을 겨를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자가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학문을 자기 영혼보다 귀한 줄 아는 것이 잘못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인 가운데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일에 취해서 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잠자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잠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면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행복을 위해 살아갑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상태로 만족합니다. 그리하여 어찌 보면 기독교인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을 따라 나선 것은 참으로 잘 선택한 것입니다. 그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와 지내는 동안 그만 물질에 대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삼촌을 떠나 물과 목초가 풍부한 요단 들판에서 대대적인 목축을 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문화생활도 하고 세상 즐거움도 맛보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가나안에서 문화가 가장 발달한 도시인 소돔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소돔은 경제적으로는 윤택하고 선진 문명을 자랑하는 도시였으나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원래 롯은 경건한 사람이었으므로 소돔 사람들의 타락상을 보면서 신앙양심에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돔 생활을 청산하고 경건한 생활을 위해 빈들에서 천막을 치고 지낼 결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가 소돔에서 지내는 동안 세상 안일에 빠져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입니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소돔이 주는 안일함과 편리함에 젖어서 그곳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언제까지 그랬느냐 하면, 소돔이 하늘에서 내리는 불과 유황에 멸망하기 직전까지 그곳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들을 보내어 롯과 그의 처와 두 딸을 이끌어내지 않으셨다면 롯과 그의 가족 역시 소돔 사람들과 함께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말세에도 그리스도인 가운데 롯과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4절로 15절에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했는데, 여기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을 사람들’이 그런 신자들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타성에 젖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주님을 섬기는 것이 즐겁고 행복했는지 몰라도 지금은 처음 사랑이 다 없어지고 그저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주님을 섬기고 믿음의 형제들을 섬기기보다는 손님 노릇으로 만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마귀가 즐겨 사용하는 무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핍박이 아니라 안일함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차차 믿으라고 합니다. 믿기는 믿되 적당히 믿으라고 합니다. 세상 재미도 보고 천국도 가면 좋지 않으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고 했습니다. 깨어 있으면 마귀를 대적하여 물리칠 수 있지만, 졸고 잠자면 마귀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세상의 유혹에 마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성도들은 강림하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약속이 많이 나옵니다. 먼저, 당사자이신 예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모르게 강림하시는 것이 아니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게끔 오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27)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위엄과 영광으로 오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29)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종교재판소인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의 일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죄를 뒤집어 씌웠으나 예수님께서는 시종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이사야가 예언한 것과 같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사 53:7).

그러나 대제사장이 말하기를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침묵을 깨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천사들의 증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사도들과 오백 여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예언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고 하였습니다. 또한 야고보 선생은 “7)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고 했습니다. 이외에도 신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약속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강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성도들은 시험과 핍박을 견디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성도들이 부활의 몸을 입게 됩니다. 그런 다음, 공중으로 올라가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행한 일에 대하여 결산을 보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 날에 주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매우 후한 상을 주실 것입니다. “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보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성도들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주님께서 주신 건강과 재물과 시간과 재능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은 상은 고사하고 무서운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집 주인은 곧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종들은 예수 믿는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믿는 자들 가운데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깨어서 자기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하는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임무를 잊고 자는 자들입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해당하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점검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므로 지금까지의 불충한 것을 회개하고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긴다면 얼마든지 지난날의 부진을 만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어진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언제 강림하실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언제 집에 돌아올는지 알 수 없듯이 주님께서는 예기치 않은 때에 강림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에 도적 같이 오시지만 깨어 주님 맞이할 대비를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도적 같이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예수님과 요한이 주고받은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자 사도 요한이 화답하기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계 22:). 이 말 속에는 주님의 강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요한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께서 언제 어느 시에 강림하시더라도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르신 때입니다. 언제 문을 여시고 들어오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이신 주님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십니다. 주님의 강림이 언제일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언제라도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 곧 죄악의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나태와 게으름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세상일에 빼앗긴 마음을 돌이켜서 신앙생활에 열심내야 합니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을 놓치면 내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사랑으로 권면하실 때 회개하고 영적으로 깨어있읍시다.

그리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시대의 징조를 분간하며,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을 위해 살아가며, 주님 언제 강림하실지라도 기쁨으로 영접하여 주님 앞에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