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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기본 : 성령충만 (행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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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윤성진 목사

요한 웨슬레는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 한사람입니다. 장로교가 칼빈의 신학 위에 세워져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감리교는 웨슬레의 신학 위에 세워졌습니다. 웨슬레는 가장 위대한 전도자요, 목회자요, 부흥사요, 학자인 참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가 86세에 세상을 떠날 때에 “나에게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하면서 임종했습니다. 1703년 6월 영국의 엡웜(Epworth)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레와 어머니 수잔나 웨슬레 사이에서 19남매 중의 15번째로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웨슬레는 어머니 수잔나의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아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명문대학인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학교에 들어가서 동생과 함께 홀리 클럽을 만들어서 기도와 성경연구에 열심을 귀울였습니다. 얼마나 성경연구와 전도와 기도의 규칙을 정하고 신앙생활을 했던지 ‘규칙쟁이’ 라는 메도디스트(Methodist)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 별명이 오늘날 감리교회라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웨슬레가 32살이 되었을 때에 미국 조지아(Georgia) 주 선교사로 파송 받게 되어졌는데 3년간 선교를 했습니다. 나이가 젊으니까 아주 열정적으로 열심히 전도를 하였지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3년 뒤에 영국으로 돌아올 때는 절망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돌아왔습니다. 영국에 돌아와서 5개월 동안 전혀 기를 쓰지 못하고 낙심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5월24일 저녁에 올드스케이트 모리비안 교도들이 부흥회를 하였는데 우연히 거기에 참여하게 되었다가 뜨거운 성령을 체험합니다. 그 영적인 체험이 오늘날 감리교를 창시한 원동력이 되게 되어졌습니다. 그 체험 이후에 그는 영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여서 암울했던 영국 사회를 완전히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프랑스는 혁명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러시아는 혁명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숙청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웨슬레는 복음으로 온 영국을 변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산업혁명을 일으켰습니다. 한 사람의 성령체험이 이렇게 위대한 삶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한 사람의 성령체험이 나라의 역사까지 바꾸어 놓았습니다. 한 사람의 성령체험이 세계 영적 지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웨슬레가 이런 성령 체험하기 전에도 목사였습니다. 그전에도 선교사였습니다. 그전에도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엄격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위기 앞에서 두려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참된 기쁨을 소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체험을 하고 난 뒤에는 그의 인생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 믿는 것과 성령 세례 받는 것

제자들의 삶을 보세요.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잠을 자면서 생활했습니다. 3년 동안 직접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고 예수님이 하셨던 기적들을 목격하였습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광경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아주 정확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그렇게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면서 너무 만족해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엄청난 축복을 하여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한 것은 자신이 스스로 터득해서 안 것이 아니고 스스로 한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그런 지혜와 깨달음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이런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로 믿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이런 신앙고백을 바로 했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또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이미 예수 믿었습니다. 바로 믿었다고 칭찬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열흘동안 열심히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오순절 날이 되었습니다. 열흘째 되던 날 성령으로 그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황홀했습니다.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려지고 하늘에서는 불의 혀 같은 것이 사람의 머리 위에 입했습니다. 알 수 없는 말들이 입에서 막 터져 나옵니다.  놀라운 삶의 변화를 그들은 경험하게 되어집니다.

이 오순절 사건 전과 후의 제자들의 삶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베드로가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숨기고 부인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에 숨어서 문을 잠그고 두려워서 밖에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옛 생활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나니까 그의 입에는 알 수 없는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모든 두려움과 의심이 사라졌습니다. 믿어졌습니다. 담대해졌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성경말씀이 저절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잡아죽이는 그 장소에서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엇이 베드로의 삶을 이렇게 만들어놓았습니까? 성령으로 세례 받았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종교 지도자들이 베드로를 잡아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판결한 바로 그 자리, 그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세우고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그 장소에 세워놓고 이제부터 도무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이 옳은가 판단하여 보라 나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담대히 이야기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습니다. 무엇이 제자들과 사도들을 이렇게 변화시켜 놓았습니까? 성령세례였습니다. 성령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좀 보세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할 때에 에베소에 들렸습니다. 에베소는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던 아데미 신전이 있는데 가장 크다고 하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가 더 큰 신전입니다. 아데미 신전으로 말미암아서 에베소 도시가 형성되었을 만큼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우리가 읽었던 말씀 조금 전에 18장 24절 말씀에는 아볼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볼로는 에베소에 와서 예수님을 전파를 하였습니다. 그는 학문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능한자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불러서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참 기독교의 복음을 잘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얼마나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는지 고린도에 있는 사람들이 와서 “이 복음을 우리에게도 좀 전해주십시오”라고 청빙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마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목회자 청빙 같습니다. 그래서 아볼로는 아가야 지역의 고린도 지역에 가서 복음을 계속 전하고 있습니다.

때마침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보니까 아볼로가 복음을 전하여서 이미 예수 믿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2절에 보면 ‘너희가 믿을 때에’ 라고 하였는데 그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만난 사람이 예수님 안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고 특별히 제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까 예수님을 믿는데 좀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성령이란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성령이란 말도 못 들었지만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내가 배워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새 가족부, 또는 예배를 통해서 이해가 되어져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똑똑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믿어지는 것은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내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 믿어지면 이미 내 마음 속에 성령님이 와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머물러 있지 말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승천하시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이후에 떨고 숨어 있는 제자들, 밖에 나가 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웨슬레도 이미 목사였습니다. 선교사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에베소의 12명의 사람들은 이미 제자였습니다. 이미 성령의 감동으로 믿는 자들 이였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성령을 받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할 때 성령이 임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성령으로 예수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것이 동일하다고 하면 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예수 믿는 그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은 체험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은 성령을 받을 때 급하고 강하고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불의 혀 같은 것이 사람들 머리 위에 내려옵니다. 그리고 혀가 말려 들어가면서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도행전 8장 14절에도 보면 사마리아에 성령강림이 이루어지는데 거기에도 ‘성령을 받는지라’ 라고 볼 수 있을 만큼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4절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하는 것이 있는데 성령이 내려오시니 방언도 하였습니다. 19장 6절에는 성령이 임하시므로 방언도하고 예언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는 다르게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믿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받으라” 명령하고 가셨습니다. 성령을 체험하는 것을 성령세례, 성령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체험을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한번 체험하는 그 체험을 성령세례, 성령 받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속에 계심으로 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예수님이 믿어집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성령님을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세례 받기를 원합니다. 성령체험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해야만 바른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바른 목회자, 사역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마치 자동차를 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기름이 떨어진 자동차를 밀고 가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창피합니다. 자동차를 밀어주면 가고 안 밀어주면 섭니다.

오늘도 성도들 가운데 심방가면 교회 가고, 심방안가면 교회 안나오는 것처럼 끌려 다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 받고 신앙 생활하는 것은 기름이 넉넉한 자동차가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동차가 뭡니까? 스스로 움직이는 차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받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기름이 가득한 자동차와 같이 스스로 가는 신앙생활을 이야기합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에 제자들처럼 신나는 신앙생활, 황홀한 신앙생활,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활을 안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안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도 믿습니다. 부활도 믿습니다. 재림도 믿습니다.
그러나 내 신앙이 이성과 지성과 노력과 의지로 교회 나오고 선을 행하고 예수 믿고 전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님을 만나고 그 능력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는가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하면 그 기도가 참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찬양하면 그 찬양이 전혀 다른 찬양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자들에게 이런 경험하기 전에는 성령 세례를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다른 말로 말하면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받지 않고는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고 우리가 기도해야 참 기도가 되지 그렇지 아니하면 10분-20분도 기도하지 못합니다. 성령 받고 찬양해야 제대로 하나님 앞에 열납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감의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리 찬양을 불러 보세요. 그 찬양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는가? 성령 받지 않고는 우리 마음속에 참된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 받지 않고는 참된 전도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 받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는 것인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성령 받는 것은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와서 만나는데 어떻게 흥분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우리 집에 와서 나와 독대하고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도 왜 흥분이 되어지지 않느냐? 왜 기쁘지 않느냐? 하나님은 성령님을 만나는 이런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령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성령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령 안에서 찬송하는 사람이 이해가 되어지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는 사람을 보고 “무엇이 저렇게 기쁘냐?” 라고 비난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절대 필요 하는 것이 성령 받는 것입니다. 성령세례 받는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예수 바로 믿을 수 있고 믿음대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성령 받아야 베드로의 삶처럼 달라집니다. 성령 받아야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 받으면 좋아하던 술과 담배도 자연히 끊어지고, 과거에 즐거워하던 것이 시들해집니다. 성령 받으면 기도할 때 이상한 말이 터져 나오기도 합니다. 성령 받으면 기도가 길어지고 깊어집니다. 성령 받으면 결심한 것이 생활로 옮겨집니다.
베드로 보세요. 성령 받기 전에 예수님께 다짐했습니다. “내가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옥에 갇힐지언정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라고 큰소리 떵떵 쳤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 지키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앞에 도망쳤습니다. 여종 앞에 예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성령 받고 난 다음에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나가서 “너희가 죽인 예수가 바로 메시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희는 바로 살인자다 그런 이야기 아닙니까? 엄청난 폭탄선언을 하게 되어집니다. 옥에 들어가는 것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를 거꾸로 못박으라고 요청하여 그렇게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성령 받고 난 다음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성령 받아야 제대로 예수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 받아야 신나는 황홀한 능력 있는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참 예수, 진짜 예수, 정말 제대로 신앙생활 하기 원하십니까? 성령 받으세요. 성령 세례 받으세요. 성령 체험하세요. 그러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날라 갑니다.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더 충만히 받으려고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성령체험이 없는 사람은 성령체험하기 위해서 성령 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사모하여 부르짖을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실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며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아버지가 어디있느냐?” 세상의 아버지도 더 좋은 것 줄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더 좋은 성령 안 주시겠는가? 라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도 부르짖어 기도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은 다 성령 받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성령 받지 않는 교인을 ‘올모스트(almost) 크리스찬’ 이라고 하였습니다. 올모스트가 무엇입니까? ‘거의’라는 뜻입니다. 거의 교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거의 교인이 교인이겠습니까? 요즘 학생들이 대학 수능시험을 치고 학교마다 면접을 하고 합격발표가 나서 합격통지서를 받고 있는 때인데 거의 합격하면 그것이 합격입니까? 합격 아닙니다. 거의 성공하는 것이 성공입니까? 거의 1등 하는 것이 1등입니까?

거의 교인이 누구냐? 성령 받지 못한 교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 받지 못한 거의 교인이 아니라 성령 받아야 색깔이 뚜렷한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성령의 능력이 떠나면 나는 진흙 한 덩어리에 불과하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진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거기에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 거두어 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성령 거두어 가면 그리스도인도 안되어지고 아무것도 안되어집니다. 이것을 다윗은 보았습니다. 사울에게 있던 성령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니까 대신에 악신이 들어가고 나중에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바라보고 그는 범죄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여 나에게 성령을 거두어 가지 마옵소서” 얼마나 애절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성령 거두어 가면 아무것도 되어지지 않습니다.

무디는 이야기했습니다. “온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성령 받기 전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 성령 받고 난 다음의 삶과 성령 받기 전의 삶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만약에 온 천지를 다 줄 테니 성령 받기 전의 삶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 성령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성령 받았습니까? 바울은 에베소에 와서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우리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대답해 봅시다. 받았다는 것은 감동이 아닙니다. 분명한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외쳤던 바울의 그 음성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외쳐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우리 가슴속에 이 귀한 물음이 항상 메아리쳐서 오늘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내가 다른 일 하지 않으리라 성령 받고 다른 일 하리라 그렇게 해서 성령 받는 경험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성령님은 어떤 분입니까?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 성령’ 하지 않고 ‘성령님’이라고 합니다. ‘님’ 자가 붙는 이유는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하나의 어떠한 찌릿찌릿한 파워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자이십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성령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성령님은 여호와 하나님,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엘 엘리온’ 지존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성령님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일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성령님을 환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인격자이시 때문입니다. 인격자는 환영하지 않는 곳에는 싫어하는 곳에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을 가지고 있는 성령님은 환영하는 곳에 갑니다. “성령님을 환영합니다. 성령님 좋아합니다. 성령님 사모합니다. 성령님 기대합니다.” 라고 오시기를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님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열흘 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성령께서 사도행전에 4번이나 크게 임하게 되어지는데 두 번은 기도할 때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간절히 기도하면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특별히 지금은 시간이 짧아서 기도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한시간만 모여서 기도한다면 성령의 임재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새벽기도 때 얼마나 성령의 경험을 하는 지 모릅니다. 그러면 얼굴이 달라집니다. 말씨가 달라집니다. 수요 기도회 때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체험을 하는 지 모릅니다. 우리가 특별한 모임 때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면 약속하신 성령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자이신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기도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더러운 곳에 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을 받습니다.
1907년도 평양의 장대현 교회, 한국의 오순절이라는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의 회개운동과 복음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강한 부흥도 성령의 임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장대현 교회 길선주 목사님이 회개를 합니다. 그 마음 속에 찔림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나면서 “내 아내는 무능하니까 우리 집의 재산을 다 정리하여서 나의 아내에게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길선주 목사님은 믿기 전에 친구의 재산을 정리해서 친구의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친구가 살았으면 내가 몇 일 일했으니 이 정도 주겠지” 하고 말하지 않고 얼마를 챙겼습니다. 그것이 예수 믿고 난 후 그 날밤 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중 앞에 나왔습니다. “나는 아간 같은 놈입니다. 나는 남의 물건을 훔친 놈입니다.” 하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은밀하고 부끄러운 이야기까지 다 나와서 밤 세워가면서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온 삼천리로 회개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따라서 성령께서 강하게 임재하여서 1907년을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성령님은 이렇게 회개하는 심령들 속에 임합니다. 또한 성령님은 영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르아흐” 신약에는 “프뉴마”라고 하는데 영, 바람, 공기, 호흡 이런 뜻입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어느 곳에든지 다 있습니다. 지금 여기도 계시고, 하늘에도 계시고 어디든지 성령님이 계십니다. 공기 없는 곳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다’라고 합니다. 지금도 어디든지 다 계시는데 어떻게 하면 공기가 들어갑니까? 병 안에 공기를 넣으려고 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물을 쏟아버리고 나면 자동적으로 공기가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죄들을 회개하고 내가 성령님을 사모하기만 하면 그러한 환경만 만들어지기만 하면 자연적으로 오늘 우리에게 성령님이 오시게 될 것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사모할 수 있기 바랍니다. 환영할 수 있기 바랍니다. 회개할 수 있기 바랍니다.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도 말씀 듣는 이 시간도 기도하는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체험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3. 성령님이 하시는 일

성령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성령님의 명칭가운데 보혜사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이하에 보면은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는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와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상담자(counselor), 위로자(comforter), 돕는자(helper)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님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데  우리 곁에 상담자, 돕는자로써 우리 곁에 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 자체가 보혜사였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사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질병을 고치시고 배 고픈자를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내가 너희를 떠나가야 하겠다.” 라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이 너무 놀라고 근심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내가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겠다.”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는데 그분은 육신을 입은 분이 아니고 영으로 오셔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있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신다면 서울에 계시지 않습니다. 미국에 계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기는 어디든지 다 있는 것처럼 영이신 성령 하나님은 어디든지 동시에 계십니다. 여기 계시는 성령 하나님은 미국에도 계십니다. 어디든지 동일하게 지금 ‘우리와 늘 같이 있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어디든지 계시는 성령님이 오시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럼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무능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돕기 위하여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셔서 지금 우리 곁에 공기처럼 와 계십니다. 우리 옆에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전능하시고 능력 많으신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우리 곁에 와 계시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 환영합니다. 내 마음에 들어오십시오.” 라고 초청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스탠바이 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것을 기대하지 않아서 성령님을 만나려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마치 에베소 교인들처럼 ‘성령이 있는 것도 듣지도 못했다’ 라는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체험 할 수 있어야만 우리가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정말 신나고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교회 지어라, 책 써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 세례 받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 받으면 신앙생활이 너무 즐겁고 쉽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 받고 기도하면 기도, 찬양이 저절로 되어집니다. 성령 받고 신앙생활 하면 신나는 신앙생활, 기쁨의 신앙생활, 소망 넘치는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성령 받고 신앙생활 하면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고 말씀하셨는데 예수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 성령 받고 난 후에 구체적으로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 받으면 삶이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끊지 못한 구습들이 단번에 끊어집니다. 성령 받으면 가정이 달라지고 하는 일들이 달라집니다. 능률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 받는 보다도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일 하지말고 너희가 성령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 떠나지 말라,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주님의 명령 따라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성령의 받은 체험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너희는 예수 믿을 때에 성령 받았느냐? 이 음성을 우리가 마음에 속에 거룩한 부담으로 깊이 새겨서 성령 받은 사람들은 더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 받기 위해서 회개하고 사모하여서 간절히 부르짖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받고 신앙생활을 해서 정말 예수 믿는 맛을 알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 잘 감당하여 “아 이것이 예수 믿는 맛이구나” 라고 그 맛을 제대로 알고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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