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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한 삶에 주어지는 축복 (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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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 온유함은 건강의 비결입니다 >

어떤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 앞에 헌신했고, 설교에 능력이 있어서 30대 중반에 이미 큰 사역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에게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격이 강하고 의분을 참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의분이 가끔 혈기로 나타났습니다. 혈기는 대개 정의감과 함께 옵니다.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로운 얘기를 하면 이상하게 혈기가 따라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국집에서 식사를 남기면 “선교지에서는 굶고 있는데 식사를 남기면 되느냐?”고 사람들을 야단쳤습니다. 그런 식으로 야단을 치면서 목회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반듯하게 다듬어져가야 했는데 오히려 갈등은 심해졌습니다. 결국 사역 공동체에 큰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공동체를 버리고 나왔습니다.

그분은 20년 동안 이루었던 목회의 노하우가 있고, 자신의 역량 정도면 처음부터 시작해도 사역을 잘 일으킬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와 보니까 생각처럼 다시 사역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뚜렷한 사역지도 없이 떠도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온유하지 않으면 그 능력 때문에 오히려 나의 인생과 나의 비전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설교에는 강하게 도전하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성도들의 헌신하지 못하는 나약한 삶을 질책했습니다. 그 설교에 의해 15-20년 전에는 많은 성도들이 순수하게 도전받고 많이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그런 말씀을 들어도 잘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목사님은 요즘 성도들의 헌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화병이 생겨, 결국 몇 년 동안 요양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분이 요새 과거보다 많이 온유해지셨습니다. 그렇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니까 병도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얼굴도 많이 편해지셨습니다. 그런데 요새도 가끔 혈기가 나와서 그분을 이해하려는 분들까지도 깜짝 깜짝 놀라고, 그분 자신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분을 볼 때마다 온유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온유함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건강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오늘 본문에는 산상팔복의 세 번째 복인 온유함의 축복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5장 3-10절에 나오는 팔복을 한번 쭉 훑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약속한 복의 내용이 다 하늘의 축복, 영적인 축복을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유일하게 땅의 축복을 말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온유함의 축복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 말은 돈을 벌고 물질세계를 정복하려면 온유함은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지식도 필요하고, 배경도 필요하고, 인맥도 필요하고, 학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온유한 성격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제일 목적 중의 하나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물질세계를 정복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 축복을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되, 무엇보다 온유한 성격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온유함이 아닌 것 >

온유함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온유함을 오해합니다. 그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먼저 온유함이 아닌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1. 온유함이란 마냥 부드러운 것이 아닙니다.

온유함이란 자기 주관도 없고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함이란 외유내강을 말합니다. 속으로는 뚜렷한 자기 주관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부드럽게 남을 감싸 안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있습니다. 사람이 참 좋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수시로 위장병이 찾아왔습니다. 월요일만 되면 배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문제는 남의 말을 너무 잘 들어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어떤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면 “예! 알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기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님이 호인이니까 주일학교 나이 드신 부장집사님이 수시로 어떤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면 “예! 그렇게 한번 해보죠!”라고 했습니다. 때로는 나이 어린 청년 선생님까지 어떤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면 역시 “예! 그렇게 해봅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교인들은 전도사님을 호인이라고 했습니다. 호인인 줄 알고 교인들은 계속 요구를 했고, 전도사님은 그 요구를 다 들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그렇게 들어주었지만 속으로는 자존심이 아주 상했습니다. 교인들은 자기를 호인이라고 했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남자라고 칭찬했지만 본인은 교인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전도사의 권위를 무시해서 그런 요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내면 안에 억제된 분노로 인해 수시로 배가 아팠던 것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은 아주 훌륭한 성격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강한 모습도 필요하고, 자기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밀고 나가는 모습도 필요합니다. 온유함이란 마음이 약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강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모습이 진짜 온유함입니다.

2. 온유함이란 마냥 느긋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느긋함이 있는 것은 아주 좋은 장점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여유가 있습니다. 반대로 조급한 사람은 여유가 없습니다. 여유는 능력의 표시이고, 조급함은 무능력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여유를 부리는 것은 온유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칫 게으름과 무책임의 표시일 수도 있습니다. 진짜 온유한 사람은 여유가 있으면서도 때로는 박력과 추진력도 있고 책임감도 탁월한 사람입니다.

3. 온유함이란 마냥 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인내심이 있는 것은 훌륭한 장점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끝까지 참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거룩한 분노도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온유하다고 강조하는 대표적인 두 분이 나옵니다. 한 분은 모세입니다.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가 이방인 구스 여인을 취할 때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은 그 일을 비방하면서, 그 일에 한정되지 않고 모세의 리더십 자체에 도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그런 상황에서도 모세는 전혀 분노하지 않고, 그 일로 인해 미리암이 문둥병이 들자 오히려 그녀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에 대해서 성경은 “모세의 온유함이 지상에서 최고였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민 12:3). 그처럼 온유한 모세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춤추고 절할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의 두 돌판을 내던지며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또 한분의 온유한 분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온유하신 주님이었지만 성전 청소를 할 때에는 장사꾼을 몰아내고, 장사꾼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막 11:15).

그처럼 모세와 예수님의 분노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를 위한 분노가 아니라 악에 대한 분노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한 분노는 최대한 절제해야 하지만 죄와 악과 사단에 대해서는 크게 분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한번도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 무수한 희롱과 모멸 속에서도 한번도 분노하지 않았지만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무섭게 분노했습니다. 그처럼 온유한 사람도 때로는 악에 대해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온유함이란 무엇입니까? >

1. 온유함이란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동양 철학에서는 사람에게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성품을 ‘중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용을 지키는 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저는 매일 새벽마다 우리 교회 자녀들과 우리 자녀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데, 저와 저의 아내가 가장 많이 기도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두 딸의 결혼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우리 두 딸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신실한 남편감을 주세요.” 왜냐하면 극단에 치우치지 않아야 가정생활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도 큰 믿음은 가지되 극단적인 믿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도 절제가 없으면 실패하기 쉽습니다. 살면서 너무 모자라도 안 되지만 너무 지나쳐도 안 됩니다. 옛말에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절제할 줄 아는 온유한 사람을 축복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2. 온유함이란 생각과 언행이 겸손한 것입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은 짝꿍입니다(엡 4:2). 온유한 사람은 겸손하고 겸손한 사람은 온유합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은혜가 없을 때에는 자기가 꽤 괜찮은 존재인줄 알다가 은혜를 받으면 자기가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인 줄 깨닫게 됩니다.

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까? 겸손한 자가 받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가장 확실한 승리의 요건은 항상 “나는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조금만 알면 판단을 합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많이 알아도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판단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오히려 판단 받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입니다.

내가 자랑하고 판단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떠나고 기도도 공허한 메아리가 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겸손히 감추고 판단을 멈출 때 하나님의 은혜는 속히 임하고, 우리의 기도도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약한 데에서 온전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원하면 조금이라도 높아진 마음을 잘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영적인 허영심을 주의해야 합니다.

좋은 신앙은 반드시 좋은 인격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사단은 ‘인격!’ 하는 소리를 들으면 어느새 영적인 허영심을 부추기며 속삭입니다. “기독교는 윤리가 아니다! 영성을 추구해야지 인격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와 같은 영적인 허영으로 유혹하는 사단의 꾐에 절대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려면 치열하게 자기의 영적 허영심과 싸워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좋은 일 하고 나서 영적으로 더 타락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가장 좋은 일은 자기 자신이 좋은 일 했다는 것을 잘 의식하지 못하고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의 헌신자들을 일일이 거명하고 칭찬하지 않는 이유는 그분들의 하늘의 축복을 빼앗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요새 요삼일육선교회를 통해 선교와 구제에 고정적으로 헌신하는 조용한 헌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제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이름을 알기는 하지만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한 열정을 가지고 저희 선교회의 꿈과 비전을 돕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많이 헌신하면서도 “내가 이만큼 헌신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는 분들을 보면 하나님도 감동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갈릴리 바다와 같습니다. 그 마음의 바다에서는 수시로 허영심의 풍랑이 생겨납니다. 그때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속에 잠들어 계신 예수님을 깨워 항상 겸손한 삶을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찾아서 하고, 가장 좋은 일을 하고도 내색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더 큰 상급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3. 온유함이란 하나님 말씀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온유란 헬라어로 ‘프라우스’라고 합니다. ‘프라우스’란 말의 뜻은 짐승이 길들여진 상태를 말합니다. 야생마가 길들여져서 주인의 말을 순종하게 될 때 헬라 사람들은 ‘프라우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처럼 온유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진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온유함이란 순종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어떤 분은 순수해서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하려고 합니다. 힘들어도 순종하려고 하고, 형편이 되지 않아도 어떻게 하든지 순종하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어떤 분이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평소에 십의 이조를 하고, 또 십일조를 떼어 선교헌금을 하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매달 수입의 10분의 3을 하나님께 드리는 분입니다. 그분이 큰 아파트로 이사하기 위해서 현재의 아파트를 팔았습니다. 살 때보다 약 1억 5천만 원 정도 더 받고 팔았습니다. 그런데 더 큰 아파트로 이사를 가기 때문에 대출을 조금 더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계산상으로는 1억 5천만 원을 벌었지만 손에 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고민하고 기도하다가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이런 경우에는 십일조를 내야 합니까?” 어떻게 하든지 조금이라도 더 내는 구실을 만들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운 마음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런 마음이 결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 성도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 길들여지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온유한 마음입니다.

< 온유함의 축복 >

온유함이 주는 축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축복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3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온유하면 번성의 축복을 받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강한 것은 살아남고 약한 것은 도태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산에는 맹수들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맹수들은 없고 토끼나 다람쥐들만 번성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맹수는 힘은 세지만 번식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온순한 동물들은 힘은 없지만 번식력이 강합니다.

사람도 똑같습니다. 성격이 강한 사람은 영적인 번식력이 없습니다. 반면에 온유한 사람은 영적인 번식력이 있습니다. 강한 사람에게는 다칠까봐 곁에 가질 않습니다. 반대로 온유한 사람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래서 온유하면 번성의 축복이 따르게 됩니다.

가끔 참기 힘든 일이 생겨도 “온유하면 번성케 된다!”는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하며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인내의 때가 끝나면 곧 축복의 때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 때문에 손해 봤던 것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참았던 것들, 가슴에 상처를 받고도 쏟아내지 않고 주님 앞에 울며 승리했던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사람이 손해 봤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보상으로 다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참으라! 영원히 너만 손해 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래 인내하면 언젠가 인내의 끝이 오고 놀라운 번성의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2. 온유하면 물질적인 축복을 받습니다

본문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의 보다 정확한 뜻은 “하나님께서 땅을 유산으로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총칼을 가지고 싸워서 땅을 빼앗을 필요도 없습니다. 온유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땅을 유산으로 물려주십니다. 그처럼 온유하면 손해 보는 것 같고 다 빼앗기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신비하게 땅을 유산으로 얻게 됩니다.

특별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물질적인 축복을 의미합니다. 물질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온유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식당을 차렸는데 자존심을 세우고 손님이 밑반찬을 더 달라고 할 때 기분 나쁘다고 “오려면 오고 말려면 말라!”는 식으로 하면 물질적인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실상 그 밑반찬을 더 달라고 하는 대체로 자기 요구의 목소리가 크고 성가시게 하는 분이 식당의 성공을 위한 키맨(key man)입니다. 그 사람에게 잘해주면 그 사람은 열심히 선전해줄 것이고, 그런 사람에게 잘해줄 정도의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남에게는 더욱 잘해줄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물질적인 축복도 따라올 것입니다. 남의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게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끝까지 온유하고 친절해야 손님들이 돈도 꺼내고 좋은 계약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새 각 기업마다 친절 교육에 열심을 냅니다. 그래야 사업이 번창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가식적인 친절이 있어도 돈을 버는데 인격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훈련되어 온유하게 된다면 얼마나 큰 축복을 받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이 물질적인 축복을 받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겠다고 생각한다면 무엇보다 온유한 성품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3. 온유하면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시편 37편 1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에게는 물질적인 축복도 주시지만 더 나아가 마음의 평안을 주십니다. 강한 힘은 외적인 평화(peace)는 주지만 내적인 샬롬(shalom)은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말씀에 길들여진 온유한 사람에게는 내적인 평화가 주어집니다. 그때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게 됩니다.

원래 피스(peace)라는 말은 팍스(pax)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시대를 흔히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 시대라고 합니다. 즉 로마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평화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힘에 의한 일시적인 평화가 있는 것 같았지만 사람들 마음에는 진정한 평안은 없었습니다. 기독교 역사가들은 그때가 흑암의 시대라고 합니다.

요새 미국은 팍스 어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를 열려고 합니다. 자신을 세계의 경찰국가로 자임하면서 분쟁 지역마다 개입해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가 말을 안 들으면 왕따 시키고 심한 경우에는 쳐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모든 나라들이 미국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지냅니다. 그처럼 힘에 의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개인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힘이 있고, 성공하고, 돈이 많아야 평화가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과 권력이 피스(peace)는 줄 수 있어도 샬롬(shalom)은 줄 수 없습니다. 샬롬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주어지고, 십자가의 헌신으로 주어집니다. 피스(peace)는 환경과 기분에 따라 주어지지만 샬롬(shalom)은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하고 노래하게 합니다.

지금 미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은 시애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살기 좋아서 오히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완벽하게 좋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완벽하게 좋은 곳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 안에 있고 주님의 온유한 성품이 있어야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샬롬이 있게 될 것입니다.

< 온유함이 승리의 길입니다 >

결론적으로 온유함은 승리의 제일 비결이고, 축복의 제일 비결입니다. 오늘날 워낙 믿음이 좋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누가 진짜 믿음이 좋은지 잘 구별이 힘들지만 믿음이 좋은 사람의 공통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좋은 사람은 부드럽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얼굴이 부드럽고, 언행이 부드럽고, 성품이 부드럽습니다. 목도 부드러워서 고개를 잘 숙이고, 얼굴 근육을 비롯해서 모든 근육이 부드럽습니다.

생태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발달된 것일수록 부드럽다고 합니다. 광물보다는 식물이 부드럽고, 식물보다는 동물이 부드럽고, 동물 중에서 사람이 제일 부드럽고, 사람도 어릴수록 부드럽습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이 좋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가장 부드럽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생물학적으로는 점점 굳어지고 딱딱해지지만 믿음이 커지면 나이가 들어도 몸과 마음이 여전히 부드럽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성품이 온유하면 마음속에 평안이 주어지고, 번성의 축복이 있게 됩니다. 결국 부드럽고 온유하게 사는 길이 이기는 길이고 성공하는 길입니다. 이번 한주간도 가정과 일터와 인간관계에서 끝까지 온유함을 잃지 않고 넉넉한 모습으로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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