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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복음의 정체성 (요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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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조용기 목사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장 2절)

오늘날 많은 기독교회가 사회 곳곳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회를 사람들의 마음을 마비시켜서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유물론적인 시각으로 기독교를 비평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오늘 기독교회는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각 교회마다 뚜렷한 정체성을 확립해야만 합니다. 과거, 자유롭게 복음을 외치며 하늘 나라를 증거하던 시절과 달리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정신을 차리고 교회마다 교회의 특성에 따른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명확히 알아야 될 것은 우리 순복음교회의 정체성을 뚜렷이 알고 이를 확립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1. 오순절 성령운동

- 성령세례 받고 성령의 충만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행 2:4)

우리는 1958년 불광동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뚜렷한 오순절적신앙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회는 기라성 같은 교단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출범할 당시 그러한 여타 교단의 교회들로부터 비난 받지 않으려면 그들의 영향력 아래 복음을 펼치면 쉬웠겠지만,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그들의 영향력을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순복음만의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1900년도 초기에 일어난 오순절 성령운동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으라’는 것이 우리 정체성의 가장 뚜렷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물론 다른 교회에서도 성령운동을 합니다. 성령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삼위로 인정하고 성령님의 역사로 감화감동 받고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영, 아들의 영으로 성령이 임재한다는 것을 모두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은 거기에 더하여 성령세례를 더욱 강조합니다.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하심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행 2:4), 방언이 성령세례의 표적이라는 뚜렷한 우리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은 우리에게 ‘방언으로 말해야만 성령 충만한 세례를 받은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물론 방언을 하지 않아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우리 순복음의 정체성은 성령세례를 받으면 사도행전적인 사건과 같이 방언으로 말한다라는 것입니다(행 2:1∼4).

우리 교회는 시작할 때부터 이러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말합니다.

2. 신유와 축사

-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냄(막 16:16,17)

우리의 정체성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막 16:16,17). 성령이 오시면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들을 우리도 동일하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이것이 바로 우리 순복음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을 등한히 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손실됩니다.

다른 많은 교회에서도 오늘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교회의 정체성으로까지 정착되지는 않았습니다.

3. 희망의 메시지와 전인구원

-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일할 때 저주의 생활에서 해방(갈 3:13,14)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 현실 생활에 주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성실히 일할 때 저주의 생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을 품고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고 열심히 일하며 십일조 생활을 하고 교회에 충성합니다.

그럴 때 삶의 모든 속박과 저주에서 해방을 얻고 주님의 은혜로 복을 주시는 삶을 이루는 희망의 메시지를 증거 할 수 있습니다(고후 8:9).

우리 순복음의 정체성은 이처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며, 이 땅에서 주님의 은총으로 저주에서 해방을 얻어 승리하는 삶을 산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에게 하나의 완전한 정체성으로 뚜렷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Holistic Salvation!’ 즉 ‘전인구원’입니다.

우리 순복음은 이러한 전인구원의 복음을 강력하게 전해 왔습니다. 이는 성경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말씀에 기초합니다.

“영혼이 잘됨같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러한 체험에 따라 성령의 은사도 나타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범사에 잘되고”라는 말씀은 주께서 우리의 저주를 제해 주셨다는 의미가 가장 큽니다. 주님이 우리의 저주를 제해주셨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축복을 받아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의 저주를 벗겨 주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이러한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저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고 삶의 꿈과 믿음으로 기도에 더욱 힘씁니다. 그리고 입으로 이러한 것들을 시인하며 더욱 적극적으로 삶에 임하는 믿음의 방법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저주에서 해방을 얻고 “강건하기를” 이룰 수 있습니다. 즉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전인구원의 역사를 이룹니다.

4. 기도운동의 회복

우리교회는 이러한 전인구원의 복음을 가지고 지난 46년을 일해 왔기 때문에 많은 공격도 받았고 한편 지대한 영향력도 미쳤습니다. 지금 전세계 신학계는 우리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목회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전세계적으로 우리 교회에 대해 듣고 연구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우리의 영향을 받아 ‘순복음식’으로 따라오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우리의 정체성의 깃발이 내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는 맹렬한 기도 운동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 없이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세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과거 우리교회에서 구역예배로 모여 부르짖어 기도하면 얼마나 크게 소리 지르며 뜨겁게 기도했던지 이웃에서 신고하여 경찰차가 출동될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을 통해 우리 순복음은 뜨겁게 기도해 왔습니다. 이러한 기도가 식어지면 성령 충만의 체험과 방언의 역사는 사라집니다. 기도와 성령 충만은 병행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떠나실 때 무엇보다도 먼저 당부하신 말씀은 “너희는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지막 남긴 유언의 제일 서두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순복음의 정체성을 어깨에 짊어지고 복음을 증거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행 1:8). 우리는 모두 기독교라고 하는 하나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 교회마다 교회의 정체성에 따라 차별되고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고통을 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 구원은 오직 예수이름으로만 가능하다는 것, 오늘날에는 또 다른 보혜사로 성령을 주셨다는 것 등 기독교회는 모두 이러한 진리를 믿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내에서 각 교회는 그 정체성에 또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다양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공급하기 위한 것입니다. 온 세상에 사시사철 코스모스 꽃만 피어난다면 어떨까요?
봄에는 개나리 뿐 아니라 진달래도 피고 여름에는 해바라기가 피고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피는 등 온 땅은 계절에 따라 각기 다양한 꽃을 피움으로써 우리는 다양한 은혜를 받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기독교이지만 교파가 다르고 교단이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내용을 각 교회마다 달리하심으로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교회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차별성, 즉 우리의 정체성은 뚜렷이 가지고 가야 합니다. 우리는 순복음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이러한 순복음으로 부르신 것은 다양성 속에서 순복음이라는 정체성을 굳게 부여잡고 전도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을 분명히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해야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그 생애의 마지막에 디모데에게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 선생의 그 말씀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순종하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명의 푯대를 향해 전력을 기울여 뛰어야 할 것입니다(엡 3:14).

그럴 때 우리는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전인구원의 복음으로 이 땅에서 승리하며 하늘나라의 확장을 위한 우리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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