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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닫는 복 (시 119:6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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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필도 목사

67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8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69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70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71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72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73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74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 75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시편 49:20을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깨달음의 차이에 있습니다. 사람은 깨닫는 만큼 지혜로워지고 깨닫지 못하는 만큼 어리석어집니다. 따라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마치 멸망하는 짐승처럼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란 ?

1.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시편 14:1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있기는 어디 있어? 없고 말고.”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도 없고 내세도 없고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다. 그저 사는 데까지 살다가 죽으면 끝이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세상에 아무리 지식이 많은 석박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르고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1928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종군작가인 엘리위젤이 쓴 '밤'이라는 책을 보면,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은 나치 정권 아래서 600만 명이나 학살당했습니다. 이때 이일에 주동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같은 유대인인 아히만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큰 거리에 아치를 세워두고 남녀 각각 한 쌍과 어린 소년의 목을 아치에 매달아두고 많은 사람들을 그 밑으로 지나가도록 위협했습니다.
이 기막힌 광경 앞에서 엘리위젤은 한 독일군 사병을 향해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독일군은 능청스럽게도 “지금 막 죽어가는 저 소년과 함께 죽어가고 있소.”라고 말했습니다. 종전 후 아히만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몹시 두려워서 어디론가 잠적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끈질긴 유대 비밀경찰에 의해 여러 해 만에 아르헨티나의 어느 시골의 한 공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수염도 기르고 머리모양새도 바꾸고 이름까지 고치고 살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방탄유리 상자에 감금된 채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엘리위젤은 이 책을 통해 다시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두  번째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님은 아히만을 심판하고 계신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일 이런 사실을 사전에 알았다면 이런 짐승만도 못한 비열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어떤 부자가 자신이 소유한 밭에 소출이 풍성하다보니 대만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곡식을 쌓아둘 장소가 부족하여 기존에 있던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내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리라 ”고 흐믓해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나무라셨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건강하다고 오래 삽니까? 재산이 많다고 장수합니까? 천만예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가시고자 하시면 잠을 자다가도 죽고, 길을 가다가도 죽습니다.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오늘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천년만년 살것처럼 년수를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을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나누어서 말하기를 “15세 된 소년은 9:시 38분, 20세 청년은 10시 51분, 30세는 오후 1시 17분, 50세는 저녁 6시 8분, 60세는 저녁 8시 34분을 지나고 있다. 그리고 70세는 밤 11시로 인생의 종착역이 바로 코앞에 와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얼마만큼 남았는지 자신의 남은 시간을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마지막 남은 시간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3.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철학자인 칼 힐티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고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불행의 연속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멀어지면 점점 더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시편 73:27~28을 보면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복을 받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자는 살아있을 때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밤낮 좋은 옷을 입고 먹고 마시고 호화로이 연락(宴樂)하며 세상 향락에 깊이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도 죽어 장사되어 지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지옥이 얼마나 뜨겁고 고통스러운지 심히 괴로워하며 “내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 잘 섬길 걸, 살아있을 때 바르게 살 걸, 좋은 일 많이 할 걸.”후회 막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과 자신의 집 대문 앞에서 거지로 살던 나사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그곳에 내 다섯 형제가 있으니 제발 저들만이라도 이 고통받는  지옥에 오지 않도록 이곳 실상을 소상히 증거해주소서”라고 절규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너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는  것이다. 더구나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서로 건너가지 못할뿐더러 세상에 있는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면 될 것이다. 만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천국과 지옥을 증거할지라도 그들이 결코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도무지 믿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죽은 자가 다시 깨어나 천국과 지옥에 대해 말한다 할지라도 결코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깨닫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이 부자처럼 죽은 후에 후회하게 될 때는 이미 늦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안타깝게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음성으로 이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기차를 타고 남인도로부터 이곳에 오는데 무려 100시간이나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놀라서 “그렇게 먼 거리를  왔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를 “그것보다 더 먼 거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사람의 머리로부터 가슴까지 불과 30cm 밖에 안 되는  거리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하는데 평생이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 머리로는 안다고 말하면서도 눈으로 보면서도 귀로 들으면서도 가슴까지 불과  30cm 밖에 안 되는 거리를 평생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죽을 때야 철이 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119편에서 계속해서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의 눈은 영안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보게 해달라. 깨닫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7절, 34절, 73절, 114절에서도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주의 증거는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깨달으면 살길이 열립니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 탕자는 고생 끝에 이제라도 살길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후 염치불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와 새삶을 살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살길이 열립니다.

미국의 대통령 중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 여러 번 실패를 거듭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크고 작은 어려운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부인이 정신병에 걸리기도 했고, 참모총장이었던 스크린톤이 반기를 들기도 했습니다. 링컨은 왜 이런 일들이 계속 생겨나는지 고민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이 어떤 부인에게 음란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자신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음란의 영을 물리쳐 주십사고 간구했습니다. 그후 그를 괴롭혔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고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자유가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나쁜 생각, 악한 생각, 음란한 생각이 계속해서 들어온다면 그것은 사단이 여러분을 망하게 하기 위해 역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생각과 함께 사단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호히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깨달으면 성공의 문이 열립니다. 깨달으면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톨스토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을 많이 발표한 천재적인 작가로 1828년 러시아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러나 외모에 대한 컴플랙스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의 얼굴은 아주 못생겼습니다. 코는 넓적하고 입술은 두껍고 눈은 매우 작고 회색 빛이었으며 몸에 비해 팔 다리가 긴 기형적인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나는 너무 못생겨서 도저히 행복할 수 없을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인생의 행복은 외모에 있지 않고 내면의 풍요로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사랑에 있다”는 중요한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어른이 된 후에는 신앙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 ‘부활’이라는 세계적인 명작을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도 역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고귀한 신앙에서 나온 사랑이 우리 마음에 채워질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최상의 복은 깨닫는 복이며, 최상의 은혜는 깨닫는 은혜입니다. 더구나 빨리 깨달을수록 축복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보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안이 밝은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듣기만 해도 금방 깨닫습니다. 듣는 순간 열  가지 스무 가지를 깨닫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들을 귀가 있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매를 맞고서야 뒤늦게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난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쓰디쓴 고난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된다면 그 고난은 큰 유익이 됩니다. 

시편기자는 고난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는 시편 119:67,71,75에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도 고난을 통해 깨달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새 사람이 되었다면 그 고난이야말로 큰 유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난이 변하여 축복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고서야 비로소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할 때는 깨닫지 못하고 세상에서 쓸데없는 짓만 하다가 건강을 잃은 다음에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높은 자리에 있을 때 겸손하지 못하고 큰소리치다가 좋은 일 한번 해보지 못하고 비참하게 추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 많던 재물을 하나님의 일에 부요하게 쓰지 못하고 자기만을 위해 살다가 그 많은 재산을 다 잃고 나서야,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축복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더구나 그 동안 받은 복이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돈은 돌고 도는 것입니다. 항상 내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손에서 떠날 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재물이 내게 있을 때 하나님을 위해 바르게 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아낌없이 쓸 줄 압니다. 없어진 다음에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은 하늘나라 창고에 보관되는 것이므로 가장 복되게 사용한 것 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려면 낙(樂)이 있어야 합니다. 낙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세상 낙’과 ‘신령한 낙’입니다. 이 세상의 낙은 육체적인 쾌락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세상 낙에 많은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세상 낙은 추구하면 할수록 만족이 없습니다. 문제가 많고 고통이 따라옵니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따라서 세상 낙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 그저 적당히 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낙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낙으로 ‘신령한 낙’입니다. 말씀을 통해 얻게 되는 낙입니다. 말씀의 은혜 속에서 사는 낙입니다. 또 말씀대로 행함으로 얻게 되는  낙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칭함을 받은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시편 1:2, 19:10~11을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119:50, 72, 92, 97, 103, 127에서도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처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의 은혜 가운데 살며, 말씀을 통해 축복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요, 가장 신령한 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깨닫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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