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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산 사람 (요 6: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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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중표 목사

사람은 일생동안 밥을 먹고 삽니다. 밥은 생명입니다. 밥을 먹으면 살고 밥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산 자만이 밥을 먹고 죽은 자는 밥을 먹지 못합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살기 위해서 밥을 먹지만 밥을 먹고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그 밥을 먹고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우리가 먹는 모든 양식은 썩는 양식이요, 죽는 양식입니다. 그 밥을 먹고 내가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는 후패해가고 하나의 무덤 속에 썩는 존재로 들어갑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요 6:27)
어떻게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서 일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가난한 시절에는 일꾼들이 하루종일 일하면 겨우 하루살이 양식 구해서 들어갔습니다.
이와같이 유대땅도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살이 인생이었기 때문에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 일했습니다. 결국은 살지 못하고 죽는 양식이었지만 그것을 위해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빵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주식이 밥이기 때문에 빵 대신 밥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예수님을 밥으로 표현하기가 죄송해서 떡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참 생명의 양식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빵이 사람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는 밀이 부서지고 깨져서 가루가 되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식탁에 앉아 먹는 양식도 전부 자기 죽음으로 된 것입니다. 쌀, 생선, 야채, 고기 모두 죽어서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생명이었지만 우리의 밥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켰습니다. 하늘 생명이 한 알의 밀알로 마리아의 몸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고, 십자가에 죽고 가루가 되고 성령의 불로 익혀져 우리의 밥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떡과 표도즙이 아니라 희생의 은혜입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

여기 ‘살’은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이요, 자발적으로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자기의 살과 피를 주는 것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알의 밀알로 부서지고 깨져서 빵이 되어 우리 속에 생명의 양식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됩니까? 그것은 자신을 희생시킨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을 내 살과 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51절)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4-55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 예수님을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요? 이 말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40절)
먹는 것과 믿는 것은 같은 행위입니다. 먹으므로 생명을 얻듯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모든 종교는 철학적이고, 이론적이고, 의식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믿음은 먹는 양식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 배만 채우면 육성을 채우는 것이요, 그 밥 속에 담아진 희생을 알고 먹으면 영성을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을 때마다 그것을 주신 분의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선교사는 후원자의 마음을 먹고, 목사는 교인들의 사랑을 먹어 그것으로 가슴을 채우고, 하늘을 채우고, 은혜를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내가 이 밥을 먹고 살 듯이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양식으로 살게 하옵소서.’라는 마음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밥상에 앉을 때마다 밥 속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 속에서 밥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 밥은 성찬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밥으로 먹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베들레헴 떡집에서 나신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떡이 되므로 우리를 떡집이 되게 하십니다.

둘째, 그 양식을 먹으므로 나도 살고 떡도 살게 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은 자신을 유대인들이 식탁에서 필수적으로 먹는 빵으로 표현했습니다. 고기나 야채는 식탁에서 가끔 빠질 수 있고, 또 자기 식성에 따라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빵은 식성에 따라 먹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반드시 먹어야 하는 음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영적인 생명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누구나 먹어야 할 참 양식입니다. 이것은 하루만 먹으면 끝나는 양식이 아니라 매일 매일 먹어야 하는 양식입니다.
양식은 내 손으로 직접 먹어야 합니다. 먹는 것은 단순하고 개인적인 행위입니다. 먹는 것은 나 외에 아무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먹어야 내 것이 됩니다. 먹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먹은 만큼 남습니다. 내 속에서 소화된 것은 나의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양식은 반드시 내가 믿고 먹어야 됩니다. 내가 먹으므로 내 속에 들어와 내 생명이 됩니다. 내 속에 들어온 것은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돈이나 보석은 빼앗아갈 수 있지만 내 속에 들어온 것은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산 자만이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죽은 자는 밥을 먹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삼고 성찬을 먹습니다. 예수님과 기도함으로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셋째, 하나님과 교제가 일어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56절)
여기 거한다는 말은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양식이 내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예수님과 교제하고 그 힘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 믿는 자의 행복은 예수님과의 교제입니다. 이것은 예수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없이 못산다. 예수는 내 안에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별세의 은혜입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 예수님과 한 몸의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지난날 기독교는 예수 따로 나 따로 믿는 신앙을 강조해 왔습니다. 예수 믿고 살다 죽으면 천당 가는 것으로 믿어왔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십자가 신앙을 굉장한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별세 신앙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신앙입니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부터 천당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아 교제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와 완전한 친교 속에 사는 자는 그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은 자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생명의 양식을 먹는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먹음으로 만족을 얻습니다. 모든 만족을 예수 안에서 얻습니다. 예수로 만족하면 행복합니다.

말씀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설교가 은혜가 되고, 찬송이 은혜가 되면 살맛이 납니다. 예수님에게서 살맛을 못얻으면 인생이 공허해집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양식은 살맛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먹을 때는 다 좋아합니다. 안좋아하는 하는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비싼 것 안먹어도 괜찮습니다. 먹을 때는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밥맛이 나면 살맛이 납니다. 그런데 밥맛이 없으면 죽을 맛입니다. 마치 우리가 배가 고프면 아무런 재미가 없는 것과 같이 우리 속에 예수가 없으면 살맛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은 만족하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사는 자는 예수로 만족합니다. 예수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안에 사는 자가 아닙니다. 믿기는 믿지만 생명의 양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목말라 인생의 갈증을 느끼는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예수 없이 사는 사람은 이 세상 부귀 영화를 다 누려도 만족이 없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먹은 사람처럼 갈증에 허덕입니다. 이 땅의 어떤 것을 가져도 공허합니다. 돈을 벌어도 공허하고, 출세해도 공허합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은 사람 중심에 한 공백을 두었다. 이 공백에 예수님이 좌정할 때까지 인간은 만족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만족해야 합니다.

넷째, 생명의 양식을 먹은 사람은 그 은혜로 삽니다.

사람은 먹는 먹는 음식에 따라 체질이 형성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곧 우리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먹고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같이 체질이 바꾸어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그리스도처럼 살게 됩니다. 예수 믿고 그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그 마음을 품고 그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어렸을 때 부잣집에서 자란 사람은 잘 먹어서 키도 크고 피부도 깨끗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집에서 자란 사람은 잘 못먹어서 키도 작고 피부도 별로 안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어서 은혜 살이 낀 사람은 얼굴이 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지 않는 사람은 못된 살이 끼어서 얼굴이 어둡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생명을 밥으로 먹은 사람들입니다. 사는 방법이 예수요, 사는 목적이 예수입니다. 삶의 가치도 예수요, 행복도 예수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우리는 내 뜻대로 살 수 없는 몸입니다. 살려주는 힘이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살고 있지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것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57절)

생명의 양식을 먹으면 그 양식이 나에게 힘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이런 은혜로 살게 됩니다.
예수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었으면 예수 힘이 나야 합니다. 살아도 예수요, 죽어도 예수요 사나 죽으나 예수 힘이 솟아 올라야 합니다. 지난날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가 힘이 되었기에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찬송을 불렀고 죽으면서도 얼굴이 빛났습니다.

다섯째, 세상에 들어가 생명의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밥이 되어 우리를 살려주셨기에 나도 밥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살려내야 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로 갈 때 “어디 갑시다.” 그러면 “거기 뭐 먹을 것 있나” 그럽니다. “아무개 만나러 갑시다.” 그러면 “그 사람한테 뭐 나올 것 있나” 그럽니다.
예수님을 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까 먹을 것이 있으니까 따랐습니다. 가난한 자는 빵을 먹었습니다. 외로운 자는 위로를 먹었습니다. 낙심된 자는 용기를 먹었습니다. 병든 자는 건강을 먹었습니다. 죽은 자는 생명을 먹었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들이 ‘야, 그 사람 가는 곳에는 먹을 것이 있어’ 하면서 따라갑니까 어떤 권사님은 인심이 후하기 때문에 그 분 뒤에는 꼭 사람이 따릅니다. 이 권사님 남편이 항상 여유돈을 주면서 “여보 인생 짧은데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면서 살아” 그러니까 이 권사님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인심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런 남편은 보통 남편이 아닙니다. 예수같은 남편입니다.
내가 들어가는 곳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 자만이 밥이 되어 나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포로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죽인다는 엄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명이 탈출을 했습니다. 그의 동료 포로 10명이 보복으로 죽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특별히 만들어진 콘크리트 벙커 속에 산채로 감금되어 긴 시간동안 서서히 굶주림으로 죽어가야 합니다. 사령관이 수천명의 포로들을 모아놓고 지나가면서 한 사람씩 골라내는데 한 남자를 가리켰을 때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내 불쌍한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어찌 죽는고...” 그때 한 남자가 줄 밖으로 나와 모자를 벗고는 사령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나는 카톨릭 신부입니다. 저 사람을 대신하여 죽고 싶습니다. 나는 늙었고 아내도, 자식도 없습니다.”  “좋다, 그렇게 해라” 이렇게 해서 아홉 명의 남자와 신부가 벙커 안으로 들어가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신부는 4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1982년 10월 10일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는 그 신부의 장례식이 장엄하게 치러졌고 거기에 참석한 150999명 가운데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남자와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 신부의 죽음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증오와 경멸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려주는 밥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는 예수의 생명의 밥을 먹었기에 자신을 생명의 밥으로 내놓아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에게 밥이 되어줄 자를 찾고 계십니다. 자신을 밥으로 나누어 줄 수 있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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