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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있는 믿음 (요 12: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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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예수님을 재판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도스토예프스키가 형상화한 하나의 픽션입니다. 그냥 가상으로 적은 글입니다.
이 소설에 나온 예수에 대한 재판을 “이반의 재판”이라고 부릅니다. 이반은 카라마조프 집안의 둘째 아들인데 그는 이른바 하늘나라의 티켓을 반납한 무신론자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무신론자 이반을 유머니스트를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재판관 앞에 끌려 왔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내용은, 예수님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을 억누르고 구속하는 일체의 세력에 맞서 저항하는 휴머니스트 운동에 거리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인간적 이유로 고발당한 것입니다.
‘이반의 재판관’의 고발은 신랄합니다.
“예수! 그대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대에게서 누구 한 사람 진정으로 무거운 짐을 벗고 편히 쉰 사람이 있느냐? 설혹 한 두 사람이 편히 쉴 수 있었다고 하자,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수많은 이 대중들은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특히 쇠사슬에 묶이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모든 민중들의 아픔과 서러움과 한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결국 그대는 대중을 기만한 것이 아니냐? 그리고 대중을 현혹한 것이 아니냐? 이처럼 대중을 기만하고 현혹한 사람은 우리 유머니스트로서는 용서할 수가 없다. 그대처럼 대중을 기만하고 현혹한 사람은 화형에 처하든지 십자가에 매달여야 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고생하며 허덕이는 민중들에게 베풀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그들에게 씌워 있는 멍에를 벗겨주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편히 쉬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 밖에 민중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도 예수 그분에게서 쉼을 얻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반의 재판관의 고발처럼 예수님은 민중의 멍에를 벗겨 주어 그들을 평안히 쉬게 해주셨습니까?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도 고통의 멍에를 매고 허덕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여전히 힘들고 어렵지 않습니까? 여전히 그 짐은 엄청나게 무거운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시오. 내가 당신들을 편히 쉬게 해 주겠소“라는 예수님은 실제로 그렇게 편히 쉬게 해주지 못 하시면서 말로만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신 것일까요? 도대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쉼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노라”
도대체 그 쉼이 무엇이며 그 평안은 또한 무엇입니까?

이반의 재판관이 신랄한 고발을 끝내자 예수님은 인자한 눈으로 재판관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로 대가갔습니다. 예수님 그는 재판관의 두 손을 잡고 거기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서 제자리로 물러서서 다시 재판관을 쳐다보았습니다.
한참 침묵이 흘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입을 열었습니다.
“이반의 재판관, 당신의 논리는 위대합니다. 그러나 내 사랑은 그보다 더 강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분의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쉼이 되고 우리에게 평안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참으로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몸으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신 그대로 사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고 또한 죽은 사람을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셨고, 정말 무거운 짐을 진 우리에게 쉼을 주시려고 당신은 오히려 무거운 짐을 지셨고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죽음은 비참한, 그야말로 개죽음이고, 어떤 사람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 기리는 죽음입니다. 죽음이라고 다 똑 같은 것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분의 죽음에 대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4번이나 영광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자신도 자신의 죽음이 영광이라 하셨고 하늘의 음성도 영광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의 죽음이 영광스러운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희생을 영광이라고 했는가?
예수님의 죽음은 유대라고 하는 나라를 위한 죽으심도 아닙니다. 무슨 열사나 의사 같은 그런 죽음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그런 죽음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분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의 죽음은, 그 죽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위한 죽음이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앞에 고스란히 순종하는 죽음이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부복하는 당당한 순교였기 때문입니다.
27절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때에 왔다.”
28절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영광스러운 것은 그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피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죽음을 스스로 껴안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스스로 죽어지는 한 알의 밀과 같은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그분은 오히려 죽음 앞에 당당하셨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금 그릇이 있습니다. 너무 소중하기에 깊이 감추어 두었습니다. 혹은 은행의 개인 보관함에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값으로 따진다면 대단한 것인지는 몰라도, 사용 가치로 따진다면 지금 부엌에 나와 있는 접시 한 장만도 못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 금 그릇의 주인은 평생 그 그릇으로 물 한모금도 못 먹고 생애를 마치고 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까지 그런 금 그릇이 되고 싶어 합니다. 소중하게 여김 받기를 원합니다. 쓰여지기보다는 보관되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은 말씀처럼 세상 곳간에 쌓여 있을 뿐입니다. 하늘에 쌓아두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품을 찾습니다. 그러나 명품은 명품으로 쓰일 때 명품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유명한 이름이 있는 구두 한 켤래 있다고 합시다. 너무 유명한 이름이라 값도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그 구두를 한 번도 신지 않고 장롱 깊숙이 보관하고 있다면, 그 구두는 이미 구두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님의 죽음.
사실 죽음이 뭐 그리 영광스러운 것 입니까? 더욱이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 어찌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죄인들, 그것도 아주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이나 달려 죽는 것이 십자가인데 말입니다.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조롱하던 사람들의 말로 생각해 보면, 성경엔 없지만 “십자가에 달려 그렇게 죽으면서 지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렇게 말한 사람도 한 둘 아닐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 죽음이 무슨 영광스러운 것인가? 그런데 성경은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복음 11장 나사로를 살리심, 12장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를 통해서,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그리고 계속해서 19장까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날 밤에 하나님은 죽음의 사자들을 애굽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사자들은 애굽의 모든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를 죽였습니다. 그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렇게 유월절 어린양이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죽음은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서 그렇게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죽으심은 인간을 구원하라는 사역으로서의 죽음이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말씀하신대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과 같은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당신 자신을 죽음에 넘겨줌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인류를 구언하시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 말고는 여러분과 저가 구원 받을 길이 달리 없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2,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말씀은 말씀으로만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으로만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증명하며 보내 주신 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이요 십자가의 죽으심 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 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동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삶으로 이어질 때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 그리고 그분이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당신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 그것이 없다면 예수님은 예수일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허공을 떠도는 소리일 뿐인 것입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 하신다.” 그 사실을 확증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 위에 죽으신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말씀으로만 하늘에 계셨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으로만 하늘에 계셨더라면, 아마 우리는 막연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약에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잡는 어린양을 잡습니다. 그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는데, 그런데 안수하지 않은 양을 잡았다면 그 피가 대속이 될 수 있을까?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지 아니하시는 짐승을 잡았다면 그 피가 대속이 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것과 자신이 하는 말을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이라는 것 등등, 뭐 하나 해도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또 복음서나 서신들은 예수님의 삶이 구약에 이미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강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삶이 메시아로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말씀과 일치하기에 그분의 죽으심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십자가 지신 것 아닙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극형에 처해야 할 죄인들이 달려 죽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구원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젠 우리가 생각 할 수 있는 것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은 나에게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이기에 우리가 이 시간에 여기 나와 앉아 있는 겁니까? 그냥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니까? 그냥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니까?

26절,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 주실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 주실 것이다.”

그래요. 나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섬김의 대상입니다.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셨다고 우습게보지 마세요. 십자가 밑의 사람들처럼 조롱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가 섬겨야 하는 분입니다.
여기 십자가 볼 때 무슨 생각이 들어요? 아무 생각도 없지요? 때로 좀 더 예쁜 거 걸었으면 좋겠다 싶지요? 때로 조금 비뚤어진 거 아닌가 싶지요? 이 십자가가 주는 의미는 생각도 없지요?
이 십자가를 볼 때, 마치 갈보리산 그 언덕에서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로 보입니까? 여기 달려 그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예수님의 절규가 들려집니까? 여기 달리셔서 여러분을 인자한 모습으로 보시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보입니까?

또 하나,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에게 있어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 그분이 십자가 지셨어요? 왜 그분이 죽으셔야만 하셨어요? 그래요.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서 왜 하나님의 자녀는커녕 맨날 궁상떨고 살아요?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16절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그 앞에, “나를 섬기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너라”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있어 우리는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따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5에 도마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우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알기만 하면야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지요.

만약 어디 간다면,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버스타고, 아니면 차를 몰고 어디로 해서 어디로 갑니다. 이럴 때 부산이면 부산, 서울이면 서울하고 목적지를 일러주면 오히려 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든 찾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가 가야할 곳은 그 목적지를 알 수 없습니다. 길도 모릅니다. 아는 거라곤, “내가 있는 곳”이니 하셨으니 예수님이 계신 곳이요, 요한복음 14:1-4의 말씀대로라면 예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없습니다. 그 길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6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만 아는 곳, 예수님만이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일러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이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있어서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게 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 때 말씀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라” 하시는 말씀에 순종할 때, 그렇게 살 때, 그 말씀이 능력을 경험하고 결국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먼 훗날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삶으로 행동으로 순종하는 그 순간순간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은 입으로만이 아닙니다. 마음만으로도 아닙니다. 그것은 행동이요, 삶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 그들은 모두 믿은 바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12:10-13에 손 마른 사람, 곧 손 오그라든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손을 내 밀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손을 내밀었더니 “다른 손과 같이 성하게” 되었습니다. 성한 손, 쓸 수 있는 손이 되었습니다.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으로서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악한 곳으로, 멸망으로 가라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복과 생명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말씀이 순종하면 복과 생명을 얻습니다. 말씀은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기에 예수님은 “해라” “가라”고 행동하기를 말씀하셨다.
그렇기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것은 한 알의 씨앗으로 그냥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열매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말씀하신 쉼을 얻습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며 끝내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진정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믿는 대로 사십시오. 그래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하는 주님의 말씀이 늘 실제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면 사는 것이 쉼이요, 평안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대로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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