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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시가 주는 유익-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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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무 목사

고통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하고 그럴듯해 보여도 속을 파고 들어가 보면 고통이 없는 사람,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그 고통이 잠시 내게 머무르다가 떠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일생을 함께 거하며 괴로움을 주고 아픔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통의 긴 세월을 지내놓고 보면 그 고통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때론 그 고통이 내게 유익을 주었고 고통 때문에 더 잘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인생에 고통이라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왔을 때, 우리가 그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고통에 대해서 반발하고 저항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그 고통은 내 인생을 파괴시켜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내게 찾아오는 고통을 수용하고 오히려 그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때 그 고통이 내 인생에 큰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평범한 사람들한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사람에게도 찾아왔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에게도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는 적어도 신약성경 27권 중의 절반 이상, 14권을 기록한 사도입니다. 그는 또한 복음을 증거 하는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선교사입니다. 그런 그에게도 찌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육체의 가시”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사단의 사자”라고도 했습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통, 사단이 우리에게 그 아픔과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표현은 가시라고 하지만, 여러분이 이 가시를 생선 가시 정도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밥 먹다가 생선 가시가 걸렸기로서니 뭐 그리 대단하냐”정도가 아닙니다. 이 가시란 말을 더 정확히 원어로 보면 “스칼롭스”란 말인데 그것은 말뚝이란 말입니다. 마치 사람을 죽일 때 말뚝을 날카롭게 하여 박아 죽이듯이 찌르는 고통이 바울에게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가벼운 고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울을 괴롭게 만들었던 “가시”가 무엇이었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과 학설이 있습니다. 칼빈은 그것을 가리켜 영적 유혹이었다고, 마틴루터는 그것을 가리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찾아온 반대와 박해가 아니었겠냐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카톨릭에서는 그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아마도 성적인 유혹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힘을 얻는 학설이 있다면, 그것은 바울의 “가시”가 간질병이었다는 것입니다. 간질은 당시로 보면 아주 무서운 질병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어떤 아버지가 간질병 걸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고쳐주면서 귀신을 내쫓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간질은 입에서 거품을 내뿜기도 하고, 몸이 뒤틀어지기도 하고, 안색이 변하고, 또 물이든 불이든 막 뛰어드는 병입니다. 그러니 아이가 성한 데가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간질을 귀신이 주는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흔히 간질병 들린 사람을 만나면 귀신이 자기한테 옮지 말라고 침을 뱉었다고 합니다. 바울도 이런 간질병의 일종이 아니겠느냐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에 보니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업신여긴다”는 말을 원어로 보면 ‘침을 뱉다’는 뜻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에게 침을 뱉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나를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근사하게 설교하던 설교자가 갑자기 쓰러지고, 거품을 내뿜고, 입이 비틀어지고 몸이 비틀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한 30분 있다가 진정되어 또 다시 다음 예배에 나서서 설교한다면 그런 절 여러분들은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갈라디아 교인들은 오히려 그런 바울을 사랑으로 용납해 주었다고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학설에 의하면, 안질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고 그 주장 또한 힘을 얻고 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으로 가는 가운데 환한 광채에 의해 눈이 멀어 버립니다. 그는 보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져버립니다. 아나니아 선지자의 안수를 받고서야 눈이 떠지는 사건을 그는 경험했습니다. 그 때 너무 강한 빛 앞에 노출되어 병이 생겼고, 그 병이 바로 안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끊임없는 편두통과 같은 병이 동반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보니 “할 수만 있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서 내게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얼마나 바울을 사랑하는지, 너희 눈이라도 빼서 나의 안질 있는 눈과 바꿀 수만 있다면 너희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주장을 보면 안질이라는 논리가 뒷받침을 얻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6장 11절에서는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를 쓴 것을 보라”고 기록하는데, 바울은 시력이 나빠 직접 글씨를 못 쓰고 늘 대필을 시켰습니다. 마지막에 자기가 서명을 하는데 눈이 안 좋으니 큰 글씨를 썼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여러 정황들을 볼 때 바울에게는 안질이 있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바울에게는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말뚝으로 못을 박는 것과 같은 아픔이 끊임없이 그의 일생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왔다 가 버리는 고통이 아니라 일생동안 그 고통이 그를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몇 번이나 기도했겠습니까? 세 번 기도했습니다. “나도 세 번은 기도하는데 뭘...”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의 일상적인 세 번의 기도와는 다릅니다. 삼일동안 새벽집회에 나오다가 그냥 집에 눌러앉은 그런 세 번이 아닙니다. 바울이 한 번 기도했다는 것은 생각해보건데,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이 문제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무려 세 번씩이나 했습니다. 바울은 생명을 걸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였습니다. 하나님의 거절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다 응답되면 좋겠습니다만, 하나님은 어떤 것은 거절하십니다. 거절도 은혜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오케이 좋다! 응답해주십니다. 또한 어떤 것에 대해서 거절하기도 하시고, 기다리게도 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거절입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너 있는 그대로가 더 좋다는 것입니다. 네가 오히려 약한 가운데 나의 능력이 네게 머물러 네가 온전하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 가시로 인해서 약함을 자랑하게 됩니다.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인생에 주어진 육체의 가시도 영적인 유익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가시가 주는 유익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가시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함께 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나를 쳐서 내게 가시를 주신데 대한 목적을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입니다. “자고”는 “교만”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교만할 조건을 많이 갖춘 사람입니다. 7절에 보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라는 구절대로 바울은 계시를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장면을 목도한다든가 신비스런 이야기를 들은 것인데, 이런 계시의 사건이 바울에게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 또한 지극히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 계시가 얼마나 분명하고 확고했는지 14년 전에 그가 삼층천에 갖다 온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보좌에 가서 하나님을 뵙고 왔다는 말입니다. 

  이런 은혜의 체험을 하는 사람은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은혜란 감사한 것이지만 그 은혜의 체험이 내게 교만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은혜 받고 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우 중에도 꿈에 하나님 같은 분을 만났다고 신이 나서 저한테 전화해서 자랑합니다. “목사님! 좋은 꿈이지요?” 해석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남의 꿈을 나쁘게 말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더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라고 권면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꿈에 예수님 같은 분을 만나다가 또 개가 지나가는 것도 봤다고 합니다. “그건 아무래도 개꿈 같아요.”하고 대답해 드려도 그래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울의 꿈은 그런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보좌에 가서 하나님을 뵙고 왔다는 것입니다 말로 그 놀라운 광경을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으면 사람은  교만하기 쉽습니다. 아마 여러분 주변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다든가 하면 “이런 체험 해 봤어?” “어머, 그거 없구나, 나만 있구나”하며, 교만한 마음이 생기고 우월감이 생깁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 기도를 해도 40일까지는 안한답니다. 일부러 39일만 한답니다. 왜일까요? 40일 금식하면 예수님하고 똑같이 금식했다고 폼 잡고 다닐까봐서 그렇답니다. “우리 교회에 40일 금식한 사람 있으면 나와 봐!”라고 하며 자기도 모르게 자랑하고 뽐낼까봐 그렇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잘못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문선명도 박태선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처음에는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그 은혜를 관리하지 못해서 결국 이단으로 빠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바울도 교만할 조건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가말리엘 학파 출신이고,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참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이 지나가다 손만 얹어도 병이 낫고, 심지어는 꾸짖기만 해도 귀신이 나가고, 바울이 쓰는 앞치마나 손수건으로 아픈 사람에게 갖다 대기만해도 병이 다 나았습니다. 이러니 교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뭔가 너희들과는 달라!”라고 말입니다.

  더구나 이 교우들이 바울을 얼마나 존경하고 따랐는지 모릅니다. 오죽했으면 바울을 위해서 자신의 눈이라도 빼어주고 싶었겠습니까?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부부는 바울을 위해 자기의 생명까지도 대신 내 줄 수 있겠다, 당신이 죽을 자리에 내가 대신 하겠다고 까지 하지 않습니까? 제가 왼쪽 눈이 좀 아프다고 하면 눈 하나 바꿔 줄 분 계십니까?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위해서라면 눈도, 생명도 내어줄 사람이 있으니까 자기를 신처럼 여길 수 있지도 않겠습니까? 그는 충분히 교만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두루 갖춘 인물 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 그를 쳐서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는 방법은 겸손입니다.
  어거스틴에게 와서 제자가 묻습니다. “선생님,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최고의 덕 세 가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둘째는 무었입니까?” “겸손입니다.” “세 번째가 무엇입니까?” “역시 겸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배척하시고 교만한 자를 멀리하십니다. 우리는 늘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시골 어느 조그만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권사님의 아버님이 그 교회를 개척해서 세웠답니다. 권사님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나왔고 조그만 교회라 주인처럼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은 몇 년 있다가 가고, 또 오고 하니까 모든 교회를 좌지우지 하며 권사님이 주인처럼 행세를 합니다. 때로는 목사님의 설교가 맘에 안 든다든지, 또 비위에 걸리는 이야기를 하면 내려오기가 무섭게 호통을 치고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그 교회 교인들은 친척들이고 고향사람들이라 대항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에게 가시가 찾아 왔습니다. 담석증이 생겨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그 권사님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그가 회복되어 갈 때 쯤, 목사님이 교인들과 같이 심방을 가니 그 권사님의 얼굴이 옛날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엔 핏대가 오르고 분노가 차 있고, 교만이 가득 찬 얼굴이었는데 이젠 그렇게 온화하고 평화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권사님이 목사님의 손을 붙들고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힘들게 했죠? 교회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죠? 제가 이번에 회개 많이 했어요. 좋은 권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고백 하더랍니다. 그리고는 퇴원해서 교우들 앞에서 기도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시간에 “여러분 저는 쓸개 빠진 놈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의 손과 발이 되고, 목사님을 잘 받들어서 교회를 훌륭하게 섬기고 여러분들의 심부름꾼의 역할을 충실히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에 웃음이 찾아오고 화평이 찾아 왔습니다. 그 권사님에게 그것이 가시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겸손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십니다. 교만하려고 해야 교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좀 가졌다고, 좀 안다고, 백그라운드가 좋다고 교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고 가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교만할 수 없습니다.
  저도 가끔 저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찬양하다가 마음에 기쁨이 넘쳐 “우리 박수치며 찬양 합시다”하고 보니, 박수가 곡에 안 맞는 노래여서 그만 두자는 말도 못하고 당황스러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고나니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하나님께서 나를 늘 겸손하게 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업을 잘 하는 사람들에게도 사업에 실패를 주셔서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때로는 우등생도 낙제하게 만들고, 대학 시험에 떨어지게도 만들어 우리에게 겸손을 배우게 하십니다.

  가시가 주는 유익, 그 두 번째는 바로 우리를 기도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8절에 보면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시가 오면 기도 안하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건강할 때는 기도의 필요를 못 느낍니다. “나는 기도 안 해도 잘사는데, 아무개는 매일 기도해도 가난하기만 하더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에게도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자식이 가출하고 속 썩이고 남편이 애를 먹이면 그 때 기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가시는 우리를 기도의 은혜로 이끄는 초대장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건강하고 부유할 때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을 떠나서 그가 형 에서를 피해 멀리 도망하다가 베델이라는 곳에 외롭게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할 때,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 잠들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사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놀라운 환상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시 가운데 기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1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많은 재물을 모아 나오며 의기양양하지만, 형 에서가 복수 하려고 많은 장정을 이끌고 칼을 차고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자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가족들과 종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얍복강 이편에서 밤을 새며 하나님 앞에 기도 합니다. 천사와 씨름 하는데 밤을 새도 천사를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십니다. 속이는 자의 이름이 이제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시는 우리를 이처럼 기도하게 만듭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으며 좋은 옷을 입고 형들과 같이 살았다면 아마 천덕꾸러기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형들에 의해서 그는 노예로 팔려 갑니다. 노예 생활이라는 것은 가시와 같은 생활입니다. 편하게 잘 수도, 마음대로 먹을 수도 없이 늘 책망과 질책을 받습니다.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 생활이 편안할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이 그에게 가시였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다가 오히려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축복을 입게 됩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 가시 속에서 하나님을 더 의지했고 열심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가시가 찾아올 때 우리를 기도의 장소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징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시가 주는 유익의 세 번째는, 바로 그 가시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는 데에 있습니다.
  9절 말씀에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가시는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가시가 찾아오면 우리는 연약한 사람이 됩니다. 건강한 사람이 병들면 연약해 집니다. 돈이 있을 땐 마음이 든든했는데, 돈을 다 잃어버리고 나면 마음이 연약해지고 마음이 낮아집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마음이 연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워진 겸손의 그릇위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부어져서 강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에게 강함을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그분의 능력이 부어져 우리는 강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다 약합니다. 엘리야, 다윗, 모세 등등 다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했고, 그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강한 사람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이 누구의 손에 붙들리느냐?”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연약하지만 우리는 강하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시는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토(stowe) 여사가 쓴 'Uncle Tomꡑs Cabin'(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스토 여사는 결혼을 해서 아주 예쁜 딸을 낳았는데, 중병에 걸려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우울한 날들을 보냅니다.
  하루는 해변가에 우연히 나갔다가 아프리카에서 잡아 온 노예들을 노예상인이 판매하며 괴롭히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엄마와 딸이 노예로 끌려와서 엄마는 이쪽 농장 주인에게 딸은 다른 농장 주인에게 팔려서 헤어지게 되자 모녀가 헤어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노예상인의 날카로운 채찍이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모습을 보며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기와 사별한 딸이 생각났고, 노예들의 고통을 조금씩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가 흑인들의 고통의 내용들을 소설로 표현한 것이 'Uncle Tomꡑs Cabin'(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란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노예들의 고통과 실상을 알게 됩니다. 그 유명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이 소설을 읽고 감동을 받고, 노예들을 해방시켜야 되겠다는 사명을 갖게 되었고,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결국은 노예를 해방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 위대하고 놀라운 업적이 바로 한 여인의 가시로부터 시작 됐다는 것입니다. 딸을 잃은 아픔과 그 상처, 그를 찌르는 가시가 노예해방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역사 속에 남겨놓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시가 찾아올 때, 여러분이 한없이 연약해질 때 그때가 가장 강할 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가장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몸에 질병이 찾아 오셨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크게 일하실 때가 찾아온 것입니다.

  베토벤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시력과 청각을 잃어버립니다. 작곡가가 눈 멀고, 듣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연약함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결국 그의 위대한 작품들, 교향곡들은 그가 시각과 청각을 잃어버린 다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그는 더 강한 자가 되고, 위대한 작품을 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존 버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감옥에서 12년 동안 생활할 때에 ‘천로역정’이란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문호 밀턴도 앞을 보지 못하는 고통을 말년에 당하게 되는데, 그때 그는 하나님과 깊은 연결을 나누면서 ‘실락원’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데이비스 리빙스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많은 사람에게 칭찬받고 명성이 자자한 인물입니다. 한번은 그가 여러 사람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항로를 항해하는 우리의 배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배 밑에 있는 바닥 짐 때문입니다.” “어떻게 당신은 이렇게 훌륭한 선교사가 됐습니까?”라는 물음에 응답한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항로를 훌륭하게 항해할 수 있는 것은 배 밑에 있는 바닥 짐 때문입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도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 밑에 바닥 짐을 실어놓으면 배가 늘 중심을 잡을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불멸의 이순신을 보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3층짜리 귀선(거북선)을 만드는데 균형을 잡지 못해서 바다 밑에 전복 되어 버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이런 가시와 고통은 마치 배 밑의 바닥 짐과 같아서 우리 인생을 균형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한 마을에 가면 큰 강이 있는데, 비가 오면 물결이 너무 세서 건널 수 없었답니다. 마을의 추장이 하는 이야기가 “여러분! 여기를 건너갈 때에는 큰 바위를 하나씩 등에 지고 가십시오”했습니다. 사람들이 “강 건너기도 힘든데 바위까지 지고 갑니까?”라고 불평을 합니다. 불평하던 사람들은 다 물살에 떠내려가서 죽었지만 바위를 등에 지고 건넌 사람들은 바위의 무게 때문에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진 그 고통과 가시가 힘들고 무겁지만 내려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보호하고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리빙스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 무거운 바닥 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젊어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것이 리빙스턴에게는 늘 고통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고 기도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바닥 짐, 자기의 자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일생을 균형을 잃지 않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가시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식이, 부모가, 남편이나 아내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는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업이나 건강이 여러분에게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가시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저항하지 맙시다. 오히려 그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찬송 406장 후렴에 “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로운 세상 나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가 족합니다. 여러분이 능히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감사하시고, 자신을 낮추시고, 주님을 의지함으로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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