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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백성의 비판정신 (마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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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비판은 어려운 것

누군가를 비판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과연 남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을까도 두렵지만 혹시 비판을 하면 상대방이 받아들일지 알 수 없어 더 어렵습니다. 비판을 하려다가도 혹시 나를 미워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 여간 망설여지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비판하기보다 더 어려운 일은 바로 비판을 받는 일입니다. 남이 나를 비판하면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근거 없는 비판, 감정이 섞인 비판도 물론이지만 혹 저 사람이 나를 정말 생각해줘서, 나를 위해 비판하는 줄 알면서도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이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저도 그렇지만 목사들은 설교를 하고 나서 으레 내 설교가 오늘 어땠는지 참 궁금해 합니다. 하지만 과연 누구를 붙잡고 “오늘 제 설교 어땠어요?” 하고 물어보겠습니까? 어렵지요. 더욱이 제가 물어보면 “목사님 오늘 설교 참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어느 누가 “목사님 설교 오늘 정말 졸렸습니다. 참 지겨웠습니다. 준비 좀 열심히 하세요.”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목회자들은 흔히 사모들에게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저도 아내에게 “오늘 내 설교 어땠는지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요구하지만 막상 “잘했다, 성도들도 오늘 은혜 받는 것 같더라”고 하면 기분이 으쓱해지고, “여보, 오늘 설교 솔직히 그저 그랬어요” 하면 왜 기분이 확 나빠질까요? 솔직하게 평가해 달라고 말은 했으니 기분 나쁜 티는 못 내고 속으로만 애가 끓습니다.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무리 내 아내나 남편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부모나 친구라 할지라고 내게 대해 비판을 할 때 순순히 받아들이고 나를 반성할 수 있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비판이란 하기도 쉽지 않고 받기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비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비판’이란 ‘비평하여 판단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비평’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니 ‘남의 결점을 들어 평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비판이란 쉽게 말하면 남의 잘못된 점, 결점을 찾고 들추어내어 그것을 판단하고 꾸짖고 고치라고 요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의 잘못을 보면 어떻게 하십니까? 내 자녀나 배우자, 동료나 같은 교회 다니는 성도들의 잘못된 행동이나 태도가 보일 때 우리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그러면 안 된다고 지적도 하고, 때로는 꾸짖고 고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이 비판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비판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까? 그 이유가 1절과 2절에 나옵니다. 1절에서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2절 보면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고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를 보고 “너 왜 그러냐? 그러면 안 된다, 고쳐라” 하고 비판을 하게하면 나중에 우리가 실수하거나 잘못 했을 때 남들에게 똑같은 비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 당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완전할 수 없고 누구나 실수와 잘못이 있게 마련이므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나무라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비판에 대한 오해 1 : 비판의 종류

그런데 이런 해석에는 두 가지의 오해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곡해할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 오해는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비판은 일반적인 인간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비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히 인간관계에서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판단하는 비판은 여기 해당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비판이란 바로 ‘종교적인 비판’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예를 들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로 스스로 율법의 수호자며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는 자부심에 도취해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일반백성들을 보며 “우리는 너희 같은 천한 것들과는 달라,” “우리는 너희하고는 구분되는 사람들이야” 하는 자만심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바리새’라는 말도 ‘분리되다,’ ‘나누어진다’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의 눈으로 볼 때 율법을 잘 못 지키는 일반 백성들은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율법을 어기면 가차 없이 비판하고 정죄했으며 특히 당시에 직업적인 이유로 율법을 지키지 못한 세리나 창기 같은 사람들은 모두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행동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에서 이삭을 잘라먹은 행동 역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맹렬한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는 심한 욕설까지 쓰면서 야단을 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자기 의’와 겉으로는 의로운 척 하지만 실제로는 그 속사람이 잔뜩 썩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의 가식적 행위를 꾸짖으면서 ‘외식하는 자들’ 혹은 ‘회칠한 무덤’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의에 빠져 다른 사람의 허물은 잘 보고 쉽게 비판하고 정죄하면서 정작 스스로의 허물과 문제를 돌아보지 못하는 이들의 잘못된 태도를 가증스럽게 여기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인간관계나 처신을 잘못해서 비난받는 경우도 있지만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 받고 비난 받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저 집사 왜 저래? 저 장로님 왜 저런대?” 물론 불신앙적인 행동이나 태도는 지적을 받고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가 하는 점입니다. 혹시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도 속으로는 부패하고 죄를 지으면서 겉으로만 의로운 척 하고, 자기 의와 교만에 빠져 남을 쉽게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비판에 대한 오해 2 : 비판의 주체

비판에 대한 오해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2절의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에서 내가 비판을 했을 때 똑같은 비판으로 우리를 비판하고 헤아릴 분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남한테 비판 안 받으려면 너희도 비판하지 마라. 너희도 똑같은 비판을 남에게 받게 된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를 비판하고 헤아릴 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심판주 하나님입니다. 이 말씀은 전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와 교만에 빠져 남의 신앙을 판단하고 정죄하면 나중에 우리가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 최후심판을 받을 때 똑같은 꼴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또한 우리를 진정으로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분은 심판주이신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특히 이 ‘비판’이라는 낱말은 헬라어로 ‘크리노’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다분히 법적인 용어입니다. 즉 법정에서 이 사람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재판장이 판결할 때 주로 쓰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어성경은 예외 없이 이 낱말을 영어로 ‘판결하다,’ ‘심판하다’는 뜻을 가진 ‘judge’라는 낱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하실 때는 우리가 남의 행동이나 태도를 보고 저것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함부로 판단하고 재판해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재판하고 우리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판정할 수 있는 재판장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싶은 생각일 들 때 바로 이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판의 우선순위

이렇게 주님은 1절과 2절에서 우리가 남을 비판해서는 안 될 이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이제 3절부터 5절까지는 ‘비판의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제가 이 부분을 ‘비판의 우선순위’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조금 있다가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3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 뜻은 네게 있는 큰 문제는 안 보고 남에게 있는 작은 문제를 들추어내지 말라는 것인지 여러분도 이미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왜 주님은 나 자신이나 남에게 있는 문제를 눈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 것으로 비유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 한 가지는 왜 내게 있는 큰 문제를 ‘들보’라고 부르고 남에게 있는 작은 문제를 ‘티’라고 부르셨나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선 내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무엇일까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들보란 집을 지을 때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걸치는 커다란 나무, ‘대들보’를 뜻합니다. 이만큼 큰 나무가 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계시지요? 바로 과장법입니다. 그런데 형제의 눈 속에 들어있는 ‘티’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이 ‘티’를 눈에 가끔 들어가는 먼지 정도로 생각합니다. 왜 바람이 불면 가끔 우리 눈 속에 작은 먼지 같은 것이 들어가 따끔따끔하고 이것을 빼려고 입으로 ‘훅’ 불지 않습니까? 그런데 원어를 보니까 참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헬라어에 보면 이 ‘티’라고 번역된 낱말이 ‘카르포스’라고 나와 있습니다. 카르포스란 보통 말라서 수축된 ‘작은 나뭇가지’나 ‘짚’ 따위를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말라버린 작은 티끌도 뜻합니다. 저는 옛날부터 들보와 티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 궁금하게 여겼는데 원어를 보니 그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들보’라는 것은 보통 큰 아름드리나무의 몸통, 원줄기로 만들지 않습니까? 그 굵은 나무의 몸통에 비해 이 ‘카르포스’는 아주 작고 가느다란 마른 나무 가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대조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눈 속에는 지금 커다란 들보, 나무가 들어있고 형제의 눈 속에는 작은 나무 가지가 있다고 비교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내 눈 속에 커다란 나무 들보가 들어있습니다. 뭐가 보이겠습니까? 전혀 안 보입니다. 커다란 들보에 가려 아예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시야가 가리고 판단력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형제의 눈 속에는 아주 작고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잘은 안 보여도 살짝 볼 수는 있습니다. 조금이나마 볼 수 있고 흐리지만 판단력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주님이 눈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우리의 시야와 판단력 때문입니다. 눈 속에 들보가 들어있는 너, 즉 남을 아예 볼 수도 없고 판단력도 전혀 없는 네가 어찌 남을 보고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형제는 눈에 작은 가지가 들어 있어 조금이라도 볼 수 있고 조금이라도 판단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는 4절 말씀은 어찌 형제보다 더 심각하고 나쁜 상태에 있는 내가 나보다 더 나은 상태에 있는 형제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5절에서 비판의 우선순위를 말씀하십니다. 함께 읽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무슨 말입니까? 너부터 먼저 눈의 들보를 빼라, 즉 네게 있는 더 큰 문제부터 제거하고 나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는 것입니다. 왜 ‘외식하는 자여’라고 먼저 부르신 것일까요? 바리새인들처럼 내 자신의 모습을 먼저 돌아보지 않고, 나 자신에 대한 겸허하고 철저한 자기비판 없이 자기 의와 교만에 빠져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자주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비판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비판은 먼저 나 자신에게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철저한 비판으로 내 눈에 들어있는 들보를 빼내면 눈이 밝아집니다. 들보처럼 커다란 자기 의, 교만과 위선, 선입견을 제거해 내면 눈이 환해지고 올바른 시각과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5절에 주님은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네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7장 1-5절을 아예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이것 또한 오해입니다. 이 말은 비판을 근본적으로 금지한 것이 아니라 비판의 우선순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 자신을 제일 먼저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현재 모습과 상태에 대해 돌아보고, 내 문제와 허물을 먼저 본 후에 그것을 제거하고 나서 그 다음에야 남의 허물도 보고 남의 문제도 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결코 비판을 아예 금지한 것이 아닙니다. 건전한 비판은 꼭 필요합니다. 비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바로 건전한 비판과 불건전한 비판입니다. 다른 말로 세워주는 비판과 파괴하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비판은 남의 허물만 들춰내는 비난이며 남을 해치고 파괴하려는 목적이므로 악합니다. 반대로 건전한 비판은 형제를 사랑하고 진심으로 세워주려 할 때만 가능합니다. 형제가 잘못된 길로 가는데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무책임한 죄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건전한 비판, 사랑 있는 비판, 남을 세워주는 비판은 가능하지만 결코 비판을 위한 비판, 사랑 없는 비판, 무책임하고 파괴적인 비판은 절대 하지 말고, 특히 남에 대한 비판을 하기 이전에 반드시 나 자신에 대한 겸허한 비판을 먼저 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비판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하면 우리는 참으로 건전한 비판을 통해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개돼지만도 못한?

지금까지 주님은 비판을 하는 자세를 말씀하셨는데 이제 6절에 이르러서는 비판을 받는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설교 첫 머리에도 말씀드렸지만 비판이란 하기도 쉽지 않지만, 받기는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6절을 통해 주님은 비판을 받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6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거룩한 것’이나 ‘진주’가 무엇이냐 하는 점입니다. 무엇일까요? 거룩한 것이란 영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라는 뜻이고 진주는 귀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앞의 1-5절 말씀과 연결해서 읽어보면 이 거룩한 것이나 진주란 다름 아니라 건전한 비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비판, 사랑 넘치는 비판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먼저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내 눈의 들보를 뺀 후 올바른 판단력으로 상대방을 비판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결코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와 가까운 사람이고 나를 사랑하는 줄 알지만 그래도 비판은 비판인지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저도 제 설교에 대해 아내가 조금만 부정적인 충고를 하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어떨 때는 우울해지기까지 합니다. 어떤 때는 그게 아니라며 애써 부인하고 변명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때가 지나고 나중에 생각해 보면 아내의 지적이 참 옳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제야 깨닫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모든 비판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건전한 비판, 사랑 담은 비판이라도 그 순간에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 비판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그런 수용력과 용기가 있는 사람은 참 다릅니다. 분명히 발전합니다. 반대로 그 비판을 끝까지 못 받아들이는 사람, 더욱이 “감히 나를 비판해?”라며 분노하고 비판을 무시하고 나아가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정말 구제불능입니다. 오늘 주님은 6절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개와 돼지가 그것을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안 돌아보고 함부로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시지만 반대로 남의 비판이나 좋은 충고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나아가 나를 비판했다고 분노하고 공격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을 개나 돼지로까지 비유하십니다. 개돼지라면 우리나라에게서 참 심한 욕입니다. 인륜을 어기고 패륜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개돼지만 못하다는 말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개돼지가 좋은 것, 귀한 것을 줘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준 사람에게 달려드는 것처럼 건전한 비판과 충고를 못 받아들이는 사람들, 적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개돼지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심한 말이지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물론 자신을 안 돌아보고 남을 비판했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지만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적대적으로 대했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생각과 안 맞고 자신들이 세운 질서를 깬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은 예수님 말씀 듣고 은혜 받고 변화되는 그 순간에 똑같은 말씀을 듣고도 분을 내고 이를 갈며 모여서 예수님 죽일 모의를 합니다. 결국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개돼지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에도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복음의 소식을 듣고도 끝까지 안 받아들이고 오히려 핍박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준 사람을 치받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들은 안 믿는 사람들, 교회 밖의 사람들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고 교회 안에도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목회자가 설교할 때 참 어려운 것이 바로 권면하는 설교, 잘못을 바로잡는 설교입니다. 분명 교회가 잘못 된 길로 가고 있을 때, 분명 저 성도가 잘못 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목회자는 고민합니다. “말해줘야 하는데, 하지만 혹시 지적하면 상처 받지 않을까, 화내고 나를 미워하지 않을까, 다른 교회 간다고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래 쉬운 길, 편한 길로 가자, 좋은 게 좋은 거지 뭐”하면 그냥 넘어가게 됩니다. 잘 하는 일일까요? 바로 그 순간 정말 용기를 내서 “내가 정말 이 교회를, 이 성도를 사랑한다면 말해줘야 한다”며 권면하고 바로잡는 설교를 할 때, 충고를 할 때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주님은 단호하게도 못 알아듣는 자들에게 거룩한 것, 귀한 것을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얘기를 해줘도 못 알아듣고 거부하고 공격적으로 나오는 사람은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어렵지만 쉽지 않지만 결국 받아들이고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사람들은 분명 다릅니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은혜도 받고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은 천국백성들의 비판정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천국백성은 비판을 할 때로, 비판을 받을 때도 달라야 합니다. 겸손과 자기비판이 있어야 하고 특히 ‘사랑의 정신’이 있어야 건전한 비판이 오갈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건강한 교회고 그런 성도가 건강한 성도입니다. 우리 사회에, 우리 교회에 건전한 비판정신이 사라졌습니다. 아예 비판도 없고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비난만 난무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분열과 아픔만 가득합니다. 이런 현실을 주님이 얼마나 서글퍼 하실까요? 그래서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말씀을 깊이 새기고 천국백성으로서의 건전한 비판정신을 회복하여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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