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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디모데 훈련(4) : "기도의 지경을 넓히십시오!" (딤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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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흥규 목사

<기독교는 護國的인가?>
북한이 핵보유 및 6자 회담 불참을 선언한 후 국제정세가 긴장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비공식적으로 거론했던 핵보유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배경이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 속뜻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대미 협상용 카드인지 아니면 내부 결속용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핵무기를 이미 개발했다는 엄연한 현실에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한반도가 미국이나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의 열강들 사이에 둘러 쌓여 있다는 지정학적 상황으로 볼 때 언제나 태풍의 눈이 될 소지가 있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이 오직 비핵화(非核化)에 달려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언제고 위기 상황이 아닌 적이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나라의 안전을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뭐니뭐니해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 많이 했습니다. 나라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마다 나라를 위하여 제일 먼저 기도했던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언제나 호국적이었습니다.

여러분, 호국적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라를 수호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물론 호국이라는 말이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는 어용적으로 쓰여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불교가 호국불교였다는 말은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 불교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외적의 침입이나 국론분열이 생길 때마다 불교가 민심을 적극 통합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에게 기독교 역시 본래 호국적인 성격을 띤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국가와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에 기독교가 앞장을 서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지론이었지요. 이것은 나라의 안정과 번영이 나 개인의 신앙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는 바울의 개인적인 신념은 물론 바울이 처했던 독특한 정치 사회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활동했던 시대로 돌아가 바울이 기독교가 왜 호국적인 종교가 되어야만 한다고 가르쳤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도의 지경을 넓혀나가세요!>
기도는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기도보다 더 중요한 수단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이나 가정, 우리 직장, 우리 교회, 우리 마을, 우리 나라 등의 좁은 범주일 때가 많습니다. 기도의 지경(地境)이 넓지 않은 것이지요. 오늘 바울 선생이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것은 기도의 지경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기도에 머무르지 말고 공중적이고 이타적인 기도로 그 지경을 넓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의 지경을 어느 한계까지 넓혀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본문 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禱告)와 감사를 하되." 여기에 보면 바울 사도는 먼저 기도의 4가지 형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간구'(supplications)와 '기도'(prayers), '도고'(intercessions)와 '감사'(thanksgivings)이지요.

이 4가지 기도가 어떻게 서로 다른지에 대해서 학자들의 논쟁이 분분하지만 '기도'가 가장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형태의 기도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모든 형태의 기도가 이 '기도'라는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간구'는 하나님께 간절하게 탄원하는 기도 형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롬 10: 1; 고후 1: 11; 9: 14; 빌 1: 4, 19; 4: 6 참고). 또한 '도고'는 중보 기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서 대신 기도하는 대리기도를 말하는 것이지요. '감사'는 단순히 감사의 기도를 의미합니다(고전 14: 16; 고후 4: 15; 9: 11-12; 빌 4: 6; 살전 3: 9 참고).

중요한 것은 이것이 어떤 형태의 기도인가를 밝히는데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기도를 열거한 의도가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형태의 기도를 총동원해서 기도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용 가능한 모든 기도를 총동원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이지요! 무엇을 위해서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첫째로 권한다'고 했습니다. 이 '첫째로'라는 말을 보면 그 뒤에 '둘째,' '셋째로' 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논리적인 순서를 가리키기 위한 말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first of all)을 일컫는 단순 부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가 기도하는 일인데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는 이들만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교단, 우리 기독교만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 즉 국가나 민족, 인종, 성, 계층 등 일체의 장벽을 뛰어 넘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지경을 지구 끄트머리까지 무한정 넓히라는 말씀이지요!

옳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시아나 남미, 아프리카, 유럽 등등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모든 인류가 구원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사실 이 딤 2: 4 말씀은 롬 3: 27-31, 11: 26-32의 말씀과 더불어 성경에 나타난 가장 포괄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그렇습니다. 요 3: 16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 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땅끝까지 복음을 힘써 전해야 합니다!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 때까지 선교해야 합니다.

막 16: 15에서 부활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최후로 분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 28: 19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여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는 일이 주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지상(至上) 명령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오늘부터 온 세상 만민이 예수를 구주로 알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해외에 나가 계신 원주민 선교를 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를 믿어 구원받도록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맙시다! 

둘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2절 전반부를 보세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별히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권력을 가진 위정자들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롬 13: 1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이와 같이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본 바울이었기에 본문에서 권력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왜 권세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만 하는가 하는지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본문 2절 후반부를 보세요.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표준 새번역 개정판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위정자들을 위해서 왜 기도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 같은 데,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권세 가진 위정자들을 위해서 왜 기도해야 합니까? 경건하고 품위있는 생활을 하기 위하여,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경건'을 영어로 흔히 'GODLINESS,' 즉 '하나님처럼 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거룩하게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단정한' 것, 즉 '품위있는 생활'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중한 대접을 받으며 고상하게 사는 삶을 말합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활이 어떤 생활인지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다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생활을 하는 것이 위정자들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하여 바울이 선교활동을 했던 1세기 상황, 특히 로마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이 살았던 시대는 오늘과 같은 민주주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인간신화(人間神化)가 판을 치는 시대였습니다. 황제의 말 한마디에 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절대 왕권의 시대였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전제군주(專制君主) 시대 속에서 어떤 통치자를 만나는 가는 기독교 선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안정을 위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로마 황제들이 기독교가 황제 이외에 다른 신, 곧 예수를 신으로 섬긴다는 이유 때문에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통치자, 기독교에 우호적인 통치자를 만나는 것은 선교활동과 그리스도인들의 평화로운 생활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중요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꿈에도 소원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널리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선한 통치자들을 만나 그 보호의 그늘 아래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하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할 수 있으면 권력 가진 사람들과 화친(和親)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여러분, 분명히 정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질(質)까지 좌우합니다. 어떤 정치 지도자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경건한 생활을 할 수도 있고 불경건한 생활로 내몰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위정자들을 만나는 가에 따라서 품위있고 고상한 생활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좋은 통치자들은 우리의 삶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정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활동이나 생활수준, 삶의 질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왜 저렇게 어렵고 혼란스럽게 살아갑니까? 저들 위에 군림한 통치자들의 실정(失政) 때문이 아닙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품위 있게, 인간답게, 고상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권세 가진 위정자들을 위하여 힘써 기도하십시오! 위정자들이 좋은 선정(善政)을 베풀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기도하십시오! 

  셋째로,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또 특별히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만 하는 신학적인 근거(RATIONALE)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도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仲保者) 그리스도 예수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위정자들을 위하여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권면한 뒤 뜬금 없이 5절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나님도 한 분이시요, 예수님도 한 분이시요, 성령님도 한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되, 특별히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신 것은 온 우주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두 분이 아니고, 그리하여 나뉘어지지 않은 분이라고 한다면 인류 역시 나뉠 수 없습니다. 모두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마 5: 45은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만민의 하나님이시기에 한 분이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본문 7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음"을 다시 한번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참 하나님이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그 어떤 다른 하나님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세상의 권력자들이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닐까요? 더욱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중보자 역할을 하실 뿐, 세상의 군주들은 죄와 연약성 때문에 참된 중보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로마 황제가 아무리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폭력으로 황제숭배를 강요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참 하나님이시요, 그 누구도 아무리 절대 권력을 가졌어도 인간인 이상 참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딤전 6: 15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결국 황제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유일한 대상일 뿐, 황제들은 기도 받아야 마땅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代贖物)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을 보세요. "저가[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贖錢)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속전'(RANSOM)이 무엇입니까? 값을 치르고 산다는 말이 아닙니까? 우리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서 댓가를 치르고 우리를 살리신 것이 속전입니다!

<만인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 "머리를 내 미세요!">
어떤 선교사 한 분이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원주민들이 쓰는 부족 언어로 성경을 한 구절 한 구절 번역하는 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딤전 2: 6의 '속전'이라는 말에 부닥쳐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원주민들이 쓰는 말 중에 '속전'과 일치하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고심하다 못해 선교사는 원주민 추장에게 달려가 '속전'의 의미를 쭉 설명해준 다음 적절한 표현을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추장 역시 자기들이 쓰는 방언 중에 어떤 말이 '속전'과 같은 말인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 마침내 추장이 숨을 헐떡거리며 선교사에게 찾아왔습니다. "선교사님, 적절한 말을 찾아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당신의 머리를 밖으로 내미세요!--Take your head out!--라고 하면 됩니다." "아니, 뭐라고요. 머리를 밖으로 내 밀다니요. 이 말이 속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가 설명드리지요. 오래 전에 노예상인들이 우리 마을에 쳐들어와 수없이 많은 건강하고 영리한 젊은이들을 약탈해 간 적이 있었지요. 그 때 노예로 팔려간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에 노예 꼬리표를 걸고 쇠사슬에 묶여 노예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만일 노예로 사로잡힌 젊은이의 아버지가 노예선으로 달려가 충분한 값을 치를 경우 노예상은 아들의 목을 쭉 내밀게 해서 노예 꼬리표를 뗀 다음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었답니다. 이것이야말로 속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참 재미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속전의 의미를 정확하게 풀이한 말이 아닙니까? 우리가 다 죄를 지어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서 엄청난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머리를 쭉 내밀고 노예 꼬리표를 떼어버리고 당당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으로 자유의 몸이 된 것이지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은 만인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무서운 권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연약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들이 바른 정치를 펴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또한 그들이 바른 정치를 할 때에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건하고 품위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의 정책 결정이 그리스도인들이 안녕이나 복지와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다!

사탄이 가장 원하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폭발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기도의 지경을 무한히 넓혀 나가십시오! 정치인들을 위해서 힘써 기도하세요!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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