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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디모데 훈련(5) : "하와를 위한 변명" (딤전 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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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흥규 목사

<여성에 대한 家父長的 편견, 그 끈질긴 역사>
오늘 우리는 성경 안에서 가장 논란이 많이 되고 있는 구절 중 하나를 만났습니다. 사실 너무 까다로운 문제이기 때문에 저의 솔직한 심정은 이 부분을 피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다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속시원하게 해석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디모데 전서 전체를 붙들고 연속 설교를 해오고 있는 마당에 이 부분만 의도적으로 건너뛸 수 없는 까닭에 용기를 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 봉독한 말씀은 현대 여성 신학에서 아주 큰 논쟁을 불러오고 있는 말씀이기에 제 자신 100% 정확하고 명쾌하게 설명해 낼 자신이 없다는 점을 정직히 고백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이 왜 논쟁거리가 됩니까? 바로 본문 11-12절 말씀 때문입니다. 우리 다같이 읽어볼까요.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從容)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主管)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바로 이 말씀 때문에 일부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여자분들에게 목사나 장로 안수 주는 것을 아직도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교회내에서 여성의 지도력을 눈에 띄게 제한하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우리가 속한 감리교회는 그 어떤 교파보다도 여성의 지도력을 강조해왔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여성에게 목사나 장로 안수를 가장 빨리 허용한 교단이 감리교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 연합 감리교회(UMC)에서는 감리교 전체를 대표하는 감독회장직에도 여자 목사님이 선출된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성의 지도력을 존중해 온 것은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목사님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웨슬리가 평신도들, 특별히 여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지도력을 맡겼던 것은 18세기 영국 사회의 가부장적이며 남성위주의 분위기로 볼 때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오늘 봉독한 말씀 때문에 여성에게 목사직이나 장로직 등 교회 지도력을 허용할 수 없다는 생각은 매우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만 좋을까요? 사도 바울의 전반적인 논조는 분명히 가부장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여성의 지도력을 긍정하는 쪽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이런 문제를 이른바 해석학적 문제라고 말합니다. 성경 말씀을 자구에 매달려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처했던 독특한 정치 사회적 상황을 충분히 검토하면서 어떻게 그 문자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통전적(統全的)으로 밝혀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저는 오늘의 설교 제목을 『하와를 위한 변명』이라고 정해 봤습니다. 이것은 하와뿐만 아니라 하와의 후예인 여성 전체를 남성과 똑같이 동등한 인격체요 동반자요 하나님의 자녀로 볼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성경은 명백히 가부장적인 제도하에 쓰여진 책입니다. 아무리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독특한 시대적인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일례로 구약이나 신약에 보면 사람 숫자를 셀 때 여자와 아이들은 의식적으로 배제했습니다. 이것은 여자와 아이들이 인격적인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바울이 활동했던 시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과 같이 민주의식이나 인권의식, 혹은 양성평등(兩性平等) 의식이 고양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불과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여성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습니까? 그야말로 철저한 가부장 제도하에서 사람다운 취급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여성들이 남성들과 똑같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참정권(參政權)을 가지게 된 것은 결코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도 바울이 활동했던 2천년 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성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편견과 차별이 난무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이 처한 가부장적인 사회질서를 충분히 고려하면서 본문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여자는 순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할 뿐, 가르칠 수 없는가?>
오늘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말씀 중 "여자는 조용히, 언제나 순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하며,"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문자 그대로 본다면 여성은 교회안에서 그저 남성에게 순종하는 가운데 조용히 배워야 할 뿐 가르치거나 남성보다 높은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말 아닙니까? 이 말씀을 자구에 매달린 문자주의(文字主義)에 빠질 경우 여자는 장로도 될 수 없고 목사도 될 수 없고, 하물며 감독회장이 되는 일은 영구히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닙니까? 실제로 보수적인 교단들은 아직도 이 말씀에 근거해서 여성에게 지도력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요?

① 딤전 2장은 예배, 특히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본문이 포함된 딤전 2장 전체는 예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배 중에도 가장 중요한 기도에 대한 교훈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모든 기도 방법들을 총동원해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무엇보다도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경건하고 품위 있게, 그리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예배와 기도를 강조하는 바울 선생의 논조는 오늘 말씀 속에서도 계속됩니다. 여러분, 8-10절 말씀은 모두 예배, 특히 기도하는 태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먼저 8절 말씀에 보면 "남자들이 화를 내거나 말다툼하는 일이 없이, 모든 곳에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초대 교회의 예배 풍경의 일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교회안에서 남자들이 공중 기도를 할 때 두 가지가 중요했습니다.

먼저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사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습관은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여서 기도할 때 두 손을 높이 들고 서서 기도했던 사실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여기서 '거룩한 손'이라는 표현이 중요한데 '손'은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경건한 행위, 올바른 행위를 뜻합니다. 피 흘린 손이나 도적질한 손으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윤리성이 뒷받침된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 다음에 기도할 때 화를 내거나 말다툼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웃과 화평한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기도를 드릴 때 그 기도가 바른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 이렇게 남성의 공중기도에 대하여 말씀하다가 갑자기 9절에 여성이 갖추어야 할 예배 태도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9-10절을 보세요.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廉恥)와 정절(貞節)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성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옷차림이나 외모를 바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까? 할 수 있으면 소박하고 정숙하게 단정한 옷차림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금붙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여성답게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어떤 옷을 입느냐, 어떤 머리 모습을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배드리는 내적인 동기와 태도가 중요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옷을 입고 누구를 위해서 머리치장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분 하나님께 경배드리기 위한 동기보다도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끌기 위하여 요란스러운 치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이지요!

② 바울의 女性觀은 그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 편견에 영향을 받았지만 항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여성들의 예배 태도에서 말씀하다가 사도 바울은 갑자기 문제가 되는 11-12절 말씀을 합니다. 여자는 교회안에서 조용히 순종하는 태도로 배워야 할 뿐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말씀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먼저 이 말씀은 바울의 유명한 말씀 고전 14: 34-35 말씀과도 일맥상통(一脈相通)합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바울이 그 시대의 가부장적인 편견을 극복하지 못하고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여성의 교회활동과 지도력에 제한을 가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항상 여성의 지도력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갈 3: 28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自主者)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예수 안에서의 양성평등, 만인평등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바울은 여러 차례 자기와 함께 선교 사역에 동참해 준 여성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치하했던 것입니다(롬 16: 1, 3, 7; 고전 16: 19 참조).

뿐만 아닙니다. 딛 2: 3-4에서는 나이 많은 여성들이 젊은 여성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적극 권면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성의 가르치는 지도력을 무조건 부인하면서 여성의 침묵을 강요했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③ 바울의 부정적인 여성관을 위한 두 가지 신학적인 근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안에서 여성은 언제나 조용히 순종하는 자세로 배워야 하며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요? 사도 바울이 이런 주장을 하는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13-14절 말씀을 보세요.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성이 교회안에서 설교를 한다든지 가르쳐서 안되고 남자에게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는 이유를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창조의 순서상 남자인 아담이 여자인 하와보다 먼저이기 때문에 여자는 조용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아담보다 하와가 더 쉽게 속아넘어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사도 바울 역시 그 당시 편만했던 창세기에 나타난 여성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창세기에 나타난 하와의 창조와 타락을 분명히 바울과 달리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로 지어졌습니다. 아담이 독처(獨處)하는 것이 보기 싫어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뒤,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셨던 것입니다(창 2: 18-25 참조).

어떤 사람은 남자의 원재료가 흙인데 반하여 여자의 원재료는 갈빗대였으므로 여자가 더 우월하다고 농(弄)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여자가 남자의 중간인 갈빗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자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실상에 있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자가 남자의 일부에 불과한 갈빗대로 나중에 지어졌기 때문에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말씀하는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는 남녀의 우열(優劣)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나 여자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등한 피조물이요 한 몸 인격체로서 동반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를 본 다음에 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 23) 하지 않았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본래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라는 고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다음에 하와가 아담보다 더 쉽게 뱀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여성이 교회안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창 3: 1-7을 보면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금단(禁斷)의 열매를 먹고 타락했는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지만(고후 11: 3 참조) 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본성이 남성보다 죄의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더 많았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와부터 먼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인류 전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여자에게 지도력을 줄 수 없다는 논리, 또 여자인 하와가 남자인 아담을 유혹해서 죄에 빠졌으니 여자는 남자를 끝없이 유혹할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할 존재라는 주장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엄밀히 생각해 보면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된 것은 의도적으로 죄를 지은 아담보다 순진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죄의 경중(輕重)으로 따진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의 꾀임에 순진하게 넘어간 하와보다 하와가 건네 준 선악과(善惡果)를 받아들고 의도적으로 범죄한 아담의 죄가 더 크지 않습니까?(창 3: 4-6 참조). 실제로 창 3: 17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추궁을 당하는 주인공은 하와가 아니라 아담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에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요점은 누구의 죄가 더 크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나 하와나 둘 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연대책임을 져야하지 하와부터 먼저 죄를 지었으니 하와의 후손인 여자들에게는 지도력을 맡길 수 없다는 주장이 아무래도 적절치 않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인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창조의 순서나 누가 죄를 먼저 짓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창세기를 원문 그대로 읽을 경우 아담과 하와는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누가 죄를 먼저 지었느냐 하는 것보다도 인류의 최초 타락, 즉 원죄 문제에 연약한 피조물들로서 둘 다 공동책임을 져야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명해지는 것은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독특한 사회 문화적 아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아주 보수적인 바리새파 배경속에서 자라난 사람입니다. 바리새적인 전통에서 율법(TORAH)을 가르치는 것은 전적으로 남성의 몫이었으며 여성은 주변인으로서 변방으로 밀려나기 일수였습니다.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한 다음에도 이와 같은 시대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으며 그 역시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가부장적 편견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교회안에서 공적인 가르침의 특권을 남성에게만 부여하는 것이 교회의 질서 유지에 더 좋은 일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오늘 시간 관계상 15절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생략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구절인데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결론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도 찬란히 피어난 꽃들이여!>
성경이 여성에 대하여 가부장적인 편견을 가진 시대 배경 속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처럼 여성에 대해서 우호적인 분도 사도들, 즉 12 제자들을 뽑으실 때 여자를 한 명도 포함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성은 12 제자 중에 하나가 될 만한데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시대 상황이 워낙 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항용 여성의 지도력에 대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성경 안에는 뛰어난 여성 지도자들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성의 사역과 지도력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성구만도 1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모세의 누이 미리암(출 15: 20-21), 이스라엘의 네 번째 사사로서 40년 간이나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드보라(삿 4: 4-11), 유다 왕 요시아 시대의 유명한 여선지자 훌다(왕하 22: 15-17; 대하 34: 22-25),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의 여선지자 안나(눅 2: 36-38),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을 때 끝까지 믿음의 절개를 지켜준 여성들, 등등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신약 성경 안에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40명의 사람들 가운데 모두 16명이 여성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최초 목회 추천서로 잘 알려진 롬 16: 1-2은 겐그레아 교회의 여목회자 뵈뵈를 로마 교회에 추천한 내용입니다. 더욱이 바울의 선교 동역자로서 눈부신 지도력을 발휘했던 브리스가는 아주 출중한 여성 사역자였습니다. '브리스가' 혹은 '브리스길라'의 이름은 신약 성경에 모두 6차례 나오는데 4번은 남편인 아굴라보다 먼저 나옵니다(행 18: 1-3, 18, 26; 롬 16: 3; 고전 16: 19; 딤후 4: 19). 이것은 브리스가의 지도력이 남편을 훨씬 능가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초대 교회 이후 여성의 지도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했습니다. 교회 안의 다수는 언제나 여성들이었습니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창조되었지만 그 역할과 기능은 다릅니다. 남성이 우월하고 여성이 열등하다는 생각은 우리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양성이 다 평등할 뿐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합력해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어나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다를 뿐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 중에 으뜸이요 최고의 영광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숟가락이나 젓가락이 똑같이 중요하지만 그 용도는 다르듯이 교회안에서 남성의 지도력이나 여성의 지도력이 다 소중하지만 그 역할과 기능은 각각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형제 자매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전 세계 인구의 50%는 여성이다. 그러나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의 3/4을 여성들이 감당하고 있지만 급여는 전세계 월급의 1/10 밖에 못 받고 있으며, 토지 역시 전세계의 토지 중에 겨우 1/100이 여성의 몫일 뿐이다. 성인 문맹자들 가운데 2/3 이상이 여성들이며, 세계 도처에서 굶어죽어가는 사람들 중에 75% 이상이 여성들과 여성들이 부양해야 할 어린이들이다."--U.N. Statistics, as related by Elizabeth A. Johnson, Consider Jesus(New York: Crossroad, 1990),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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