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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고난주일] 가상칠언(요 19: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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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영복 목사

성 금요일은 예수님이 우리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입니다. 우리네 시간으로는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장장 6시간동안을 십자가에 달리셔서 온갖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는 두가지의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수치의 대명사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빰을 때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침을 뱉으면서 조롱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머리를 흔들면서 희롱했습니다.‘십자가에서 당장 내려오라’고 말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온갖 말로 희롱했습니다. 더구나 어느 역사학자에 의하면, 예수님을 발가 벗겨서 매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림에 보면, 그래도 하체는 천으로 가린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는 아니랍니다. 발가벗겨 달아 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수치감과 모멸감을 더해 주기 위해서였답니다.

다른 하나는, 고통의 대명사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끔찍했던지 좌우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많은 군병들 가운데는 정신적으로 이상이 생겨서 평생을 괴로와 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악몽에서 시달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 이 십자가 형은 절대 로마인들에게는 가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로마황제가 식사하는 자리에서 십자가 얘기를 꺼냈다가 그 자리에서 처형당한 신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무서운 것이 당시의 십자가 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사상가 키케로에 의하면, “십자가는 로마 시민의 머리에서 생각조차 되어서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무서운 형벌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생각하기 조차 싫은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친히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셔서 6시간 동안을 온갖 고통을 겪으시다가 마침내 운명하셨습니다.

자, 그렇다고 한다면 누구를 위한 수치요, 누구를 위한 고통이었는가 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일찌기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5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했습니다.

바로 나의 죄악과 허물을 위해서 죄없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무서운 고통을 당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값을 대신하여 그 무서운 저주를 받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저는 수난일의 밤을 기억하며 십자가상에서 6시간 동안 고통을 당하시는 가운데 하신 예수님의 일곱마디 말씀을 상고하며 주님을 기억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일명, 십자가위에서 하신 일곱가지 말씀이라고 해서 가상칠언이라고도 합니다. 가상 칠언의 사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33,34에 보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① 원수 사랑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무거워서 ‘어디 이놈들 두고 보자’하시며 이를 가셨다 든지 아니면‘이놈들??3일 후에 어디보자’라고 눈을 홀기셨더라면 어쩔번 했겠는가? 그것은 승리가 아닌 철저한 실패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도 자기를 못박는 무리들을 깨끗하게 용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시더니만 친히 십자가에서 몸소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했음을 보여주신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사랑의 최고절정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② 진정한 승리의 비결은 기도에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 가셔서 40일간 기도하신 후에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사역을 마감함도 기도로 마감하셨습니다. 친히 사역하시는 동안에도 ‘기도외에는 이런 능력이 나갈 수 없음’을 강조하시며, 미명에도 그리고 밤중에도 기도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를 이기고, 무서운 고통과 수치심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그의 기도에 있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도 두번씩이나 기도하셨습니다. 철저하게 기도의 모범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로 승리할 수 있음을 친히 고통 중에도 보여주셨습니다.


2.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예수님의 좌우편에는 강도 둘을 함께 못박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가복음 15:25~27절을 보면 그 이유에 대해서는 특별히 난외주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죄질이나 예수 자신이 강도들과 다를바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가형의 정당성을 얻고자 해서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오른편에 달린 강도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향하여 한마디 했다는 것입니다.‘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많은 현대인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젊었을 때는 마음껏 즐기다가 늙어서 그것도 죽기전에 강도 모양 예수믿어 천국가겠다는 것입니다. 강도의 경우를 믿고 까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언제가 나의 종말입니까? 나의 마지막을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저는 이번 주간에도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만은 순서가 없음을 절감하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저의 친구 이송관씨는 2주전에 속초에서 만났을 때 그렇게 강건을 자랑하며, ‘건강만큼은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 쳤는데 겨우 52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직 창창한 분이었습다. 이제 뭔가 일할 나이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보다 먼저 갔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의 장례식에 참여했을때, 그 옆에서 화장하는 다른 가족 중에 한 분이 이렇게 절규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볼 수가 있었습니다. “야, 이놈아 네가 나보다 먼저 가다니 이게 웬말이더란 말이냐? ”죽은 사람의 어머니 같아 보였습니다. 자식이 먼저 간 것입니다. 이래도 순서 고집할 것입니까? 이래도 죽음이 남의 문제인양 생각할 것입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는 자세로 드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준비할 수 있는 기회는 단 오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음도 오늘입니다. 누가 내일을 장담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죽기 얼마전에 강도처럼 회개하겠다니, 이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죽기전에라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만 회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가는하고, 더욱이 중요한 것은 그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서 나는 너를 위해 피흘려 주었건만 구원 받은 자로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고 물으실 때 무슨 면목으로 그 앞에 서시겠습니까?

② 낙원이 어느 곳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보통 사람이 운명하면, 그 영혼이 신자는 낙원으로 가고, 불신자를 음부로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제 낙원에 있던 영혼들은 예수님과 함께 공중에 재림하여 7년동안 혼인잔치를 거치고, 지상에 재림하여 천년동안 왕노릇 하는 단계를 지나, 마지막 백보좌 심판을 거쳐서 영원한 새 하늘과 새땅으로, 즉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그런가 하면, 음부에 가 있던 불신 영혼들은 백보좌 심판을 거쳐서 영원한 불못, 즉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번째 사망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낙원이나 천국은 영혼만 가는 곳이 낙원이요 영혼과 부활한 육체가 함께가는 곳이 새예루살렘 즉 천국으로 나누어 설명을 하지만 같은 의미의 말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천국에 준한 곳이 바로 낙원입니다. 낙원은 천국으로 이어지는 곳입니다. 강도는 회개하므로 구원받아 낙원에 있으리라는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3.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26절에 보면, 십자가 위에서 사랑하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보시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그러시면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여러분, 기독교에는 효가 없다는 말들을 하지 마십시오. 제사문제를 가지고 효를 논할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독교야말로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죽어서가 아닌 살아서 잘 모시라는 것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죽으시면서도 살아있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는 부모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선언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 땅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의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4. 하나님께 호소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고통에서 나온 절규입니다. 마태복음 27:45절에 보면,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는 온땅에 어두움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철저하게 외면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부르짖으셨습니다.“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버림받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왜 버림을 당하셨습니까?

하박국 1:13에 보면,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이사야 53:6에 보면,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했고,

고린도후서 5:21절에도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그랬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정결하신 눈은 악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쓰셨습니다. 우리들이 지은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래서 악과 죄를 차마 볼 수 없는 공의의 하나님은 그 몇시간 동안 등을 돌리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은 죄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를 갈라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 만큼은 우리들의 죄 때문에 철저하게 버림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육신적인 고통보다도 더한 것이 정신적인 고통이었다고 학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버림받았다는 고통은 그 어느 고통보다도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괴로움과 고통이 무엇입니까? 기도가 막히는 고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고통입니다. 이것은 일찌기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통이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위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속죄양, 즉 인류의 죄를 걸머진 죄인의 대표가 되었을 때 사랑의 하나님께서도 외면하셨슴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 모든 무리들에게 육신적은 고통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28절에 보면,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6시간을 나무위에 달려 계셨으니 피와 땀이 다 빠질만도 합니다. 완전히 탈진 상태까지 가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이단이었던 가현설을 배제합니다. 저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닌 그렇게 보여졌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을 위해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출생 사건과 성장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성장기를 거치셨고, 사역하는 동안에도 목마르고 피곤하셔서 쉬시기도 했고, 눈물도 흘리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이셨음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목 마르시지 않습니다. 천사들도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목마르셨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인간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목말라 하는 것이 무언인지를 진정 이해하실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들을 향하여 초청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6.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19:30절에 보면,“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외마디 속에는 몇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①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선언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있는 일은 수백 또는 수천년전에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 신약에 와서 어떻게 응답되었는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성과 신실성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구약에서 하신 수백가지의 약속이 다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② 고통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6시간동안 십자가 위에서 당한 육체적인 고통은 물론이요,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 당해야만 했던 배신의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그런가 하면 33년간 육신적인 삶을 사시면서 당해야 했던 찌든 삶의 고통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느님으로 부터 버림받았다는 영적인 고통입니다. 이제는 이 모든 고통이 종결되었음을 고하는 외침입니다.

③ 구속 사역의 완성의 외침이요, 선언입니다.

이것은 승리의 외침입니다. 죄인들이 의인되는 환희의 순간입니다. 최초의 구세주에 대한 약속,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으로 성육신의 목적이 완성된 외침이었습니다. 성육신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구원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구속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약속이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 보좌앞에 나올 수 있도록 휘장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영국의 어느 전도자가 전도집회를 막 끝내고 천막이나 마이크 시설을 철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한 젊은이가 다가와서‘목사님,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젊은이 한발 늦었네’ ‘아니 늦었다니요? 전도집회가 이미 끝난 다음에 와서 늦었다는 것입니까?’ 그때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자네는 지금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네, 그렇다고 한다면 이미 2천년 늦은 셈이네, 구원의 역사는 이미 십자가에 완성이 되었으니 말일세’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낫씽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사역에 대해서 믿음으로 받아 들이기만 하면, 오늘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강도 모양, 오늘 이시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믿으면 구원받게 됩니다.


7. 영혼을 부탁하시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46절에 보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상의 최후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운명하셨습니다. 기도로 모든 지상의 사역을 마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① 우리 영혼의 진정한 안식처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0:29에 보면,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살아계신 전능한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것처럼 안전한 곳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어디엔가 자신의 마음을 맡기고 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돈도 내가 가지고 있기 보다는 어딘가 안전한 곳에 맡겼으면 좋겠다 싶어서 은행을 만들었습니다. 건강도 내가 지키기 보다는 어느 기관에 맡겼으면 좋겠다 싶어서 만든 것이 병원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생도 서로 맡기고 의지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이 지구상에서는 믿고 맡길 수 있는 것보다는 맡기기 어려운 것들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영흔을 맡길만한 곳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여호와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게서 내게 맡기기만 하면 아무도 내 손에서 빼앗아 갈자가 없다고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② 무엇을 맡길 것입니까?

시편 37:5절에 보면,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잠언 16:2에 보면,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벧전 5:7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시편 55:22에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들이 가지고 있고,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길이며, 행사며, 염려며, 짐까지도 깨끗하게 맡겨 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해할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영혼까지도 맡겨 버리라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③ 우리들이 마지막 말이나 기도가 이러해야 함을 친히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지막 호흡을 몰아쉬는 시간에 무슨 말, 무슨 기도를 할 것입니까? 이 한마디면 족할 것입니다.‘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사도행전 7: 59에 보면,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예수님 그대로 흉내내고 있습니다. 요즘도 경건한 유대인들 같으면 저녁 잠자리 기도가 단순하고 간단하다고 합니다. 우리 처럼 ‘이밤도 지켜 주시고... ’그런 기도가 아니라고 합니다.한결같은 기도 내용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밤새 안녕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저들은 추상적인 기도가 아닌 매일같이 실제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마디는 그의 3년간의 사역을 대표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고, 우리의 종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인생은 40부터도, 60부터도 아니다. 그렇다고 20부터도 아니다. 인생은 오직 십자가로부터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8절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의 삶에 십자가 구속의 은총과 부활의 무한한 영광과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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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성경을 통해 본 예수님의 최후 일주일

담임 황영복 목사

금요일 / 베다니에 도착 요11;55-12;1

토요일 / 베다니에 만찬, 마리아의 기름 부음, 마26:6~13, 막14:3~9, 요12:2~11

일요일 / 예루살렘 입성, 예루살렘을 보고 우심, 베다니에 유하심. 마21:1~11, 막11:1~11, 눅19:29~44, 요12:12~19

월요일 /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 성전 청결, 어린이들 칭송, 이적을 행하심. 마21:~19, 막11:12~19, 눅19:45~48

화요일 / 무화과 나무의 교훈, 예수의 권위, 두 아들의 비유, 악한 농부의 비유, 혼인 잔치비유, 바리새인 사두개인의 질문 (세금 및 부활) 다윗의 자손에 대한 질문, 바리새인을 책망하심, 큰 계명에 대한 문제, 마21:20~23:39, 막11:20~12:40, 눅20:1~47

수요일 / 과부의 두 렙돈, 최후의 교훈, 성전궤멸의 예언, 교회의 장래, 재림, 깨어 있어야 할일, 열 처녀, 달란트 비유, 최후의 심판, 지도자들의 음모, 유다의 배반, 마24:1~25:46, 막12:41~11, 눅21:1~6, 12:20~13:2

목요일 / 유월절 준비, 최후의 만찬, 제자들의 발을 씻김, 유다의 물러감, 성만찬및 주님의 고별사,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 참 포도나무 비유, 성령의 약속, 유다의 반역,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마26:17~46, 막14:12~42, 눅22:7~46, 요13:3~1425, 18:1~

금요일 / 그리스도의 잡히심, 안나스와 가야바 앞에서 심문, 공회 앞에서 심문, 사람들 예수 조롱, 베드로의 예수 부인, 최후의 정죄, 빌라도의 심문과 석방 노력, 헤롯 앞의 예수, 유데인의 바라바 요구, 발라도가 예수를 내어줌(사형) 유다의 뉘우침과 자살, 십자가의 길, 못 박히심, 십자가 밑에서의 일, 가상칠언, 운명과 사후에된 일, 강도의 회개, 십자가에서 내려가다 매장, 성전 휘장의 갈라짐 마26:47~27:61, 막14:43~15~47, 눅22:47~23:56, 요18:2~19:42

토요일 / 군인들이 무덤을 지킴, 마27:62~66

일요일 / 여인들에게 나타나 보이심, 지진이 일어남, 요한과 베드로에게, 막달라 마이라에게, 파수군의 보고, 엠마오상의 두 제자, 열 제자에게 나타나심,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심, 베드로의 회심,주의 명령, 부활 그리고 40일 후 승천하심, 마28:1~10, 막16:1~20, 눅24:1~53, 요20:1~21~25 pm.10.9-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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