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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고난주일] 거기 너 있었는가?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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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강석공 목사  I  2005년3월20일 설교 
 
  마침내 그 두려운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자들의 행위는 참으로 악랄한 것 같습니다. 그 악랄한 행위로 말미암아 공격을 받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철저히 버려졌다는 느낌 뿐입니다.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시궁창에 던져 버린 자들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요? 자기 뜻만을 고집하며 형제 자매를 짓밟고 괴롭히는 자들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얻었을까요?

  만약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있었더라면 박해를 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정치 지도자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지냈더라면 안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만약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지 않고 그들과 마찰을 일으키 않았더라면 여생을 편안하게 지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예수님은 마치 늙은 현자들처처럼 조용히 자신의 삶을 마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편안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험한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택하여 걸어갔습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마 그 옛날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부르짖어 간구했을 것 같습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나의 대적자들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시 69:17~20)

  사실 예수님과 역사 속의 짓밟히고 팽개쳐진 모든 소외된 사람들 사이에는 깊은 연대 의식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진실한 친구이며 가장 가까운 형제인 예수님은 친히 절망의 가장 깊은 곳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친히 온갖 고통과 수치와 모욕의 밑바닥을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옳고 바른 일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연히 이해와 협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의 무관심이나 배신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그럴지라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매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깊은 절망과 소외를 친히 경험한 예수님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다만 우리뿐 아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 예수님은 넉넉히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좀 어색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마땅히 용서를 구해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잠에 취하여 예수님을 홀로 있도록 했던 시간들에 대해서 용서를 구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때 거기서 그 제자들은 그랬지만 우리는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때때로 우리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버려 둔 채 달아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형제들과 하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도망친 적이 없습니까? 가정이나 직장이나 학교에서, 심지어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불의한 일이 저질러지는 것을 보고서도 나와 직접 관계가 없다는 핑계를 대며 모른 척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들이 바로 잠에 취한 경우들입니다. 그 모든 경우들이 바로 예수님을 홀로 머물도록 방치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그 밤 제자들의 잠든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또 얼마나 서글펐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아마 그 순간 예수님은 그 옛날 고라 자손이 불렀던 노래를 부르며 슬픔과 외로움을 달랬는지도 모릅니다. 시편 42편 6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예수님이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참으로 쓰라린 아픔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진짜로 사랑했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비통함을 맛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9절 이하의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토록 장담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맹세하며 부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혼자서 그 호된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큰 사랑으로 돌봐 줬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버려진 채... 예수님이 애써 이루려고 했던 평화로운 삶의 현장은 깡그리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며 예수님의 목숨까지 빼앗겠다고 덮쳐왔습니다. 불의하고 그릇된 체제에 저항하거나 뭔가 다른 주장을 펼칠 것 같으면 오늘 우리도 박해를 받기 쉽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도 자신의 안녕과 평안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일 날 우리는 하나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말합니다. 주님의 평강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두 임하기를 빌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면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형편과 처지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돌변하지 않습니까? 남다른 특혜를 누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포기하기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왜냐 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누리는 꼴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위선적인 삶의 자세는 결과적으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우리의 형제들이 이 세상에서 불의한 세력에 의해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때 우리는 종종 침묵하거나 그런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특히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은 아예 모른 척하고 넘어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당시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를 꾸짖던 모습을 통해서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 말씀입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우리의 좋은 친구인 예수님의 평화가 절실히 요청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바로 그 주님의 구체적인 부르심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평화와 정의가 아주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이 현실 세계에서 그러나 그 주님이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증거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권력을 쥐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비난이나 공격을 받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불의와 부정과 불법을 보면서도 계속 침묵을 지키는 것은 그 옛날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님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거기에 분명히 있었지만 차라리 없었던 것보다 못한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주인하고 그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그 어디라도 주님을 따라감으로써 장차 그 주님으로부터 영광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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