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고난주일] 주님을 장사지낸 아리마대 요셉 (요 19:38-42)

  • 잡초 잡초
  • 377
  • 0

첨부 1


- 설교 : 박충웅 목사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잘 압니다. 아무 죄도 없지만 그는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몸소 자기가 죽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죽이시오. 죽이시오”하며 데모를 합니다. 빌라도 총독도 그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군중이 압력에 이기지 못해 엉터리 재판을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정치적인 재판입니다. 해골이라는 뜻을 가진 골고다에 갑니다. 십자가에 달고 그 위에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명패를 붙였습니다. 그 명패는 히브리말과 라틴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 대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붙여야 한다고 빌라도에게 가서 항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한 번 썼으면 그만이다”하고 거절했습니다. 유대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욕보이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잔인했습니다. 피도 눈물도 다 말라버린 사라들입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사람의 길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구세주를 몰라 본 것입니다. 그러고도 개선가를 부른 것입니다. 승리의 축배를 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선택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2월 22일에 우리나라 유명한 배우이자 가수가 자살을 했습니다. (이은주) 그는 인기있는 배우입니다. 그는 우울증을 이기지 못해 자살이라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제가 잠깐 있었던 학교 출신입니다. 2003년 우리나라에 자살한 사람이 1만1000명입니다. 이는 평균 48분마다 한 사람이 자살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배우는 죽으면서 유서에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영국 정신과 의사 협회 조사에 의하면 유서에 담는 60%가 “사랑”, 그 다음이 “후회”가 45%이고, “절망”이 15%에 불과 합니다. 시인들은 인생을 “잠시 다녀가는 아름다운 소풍”이라고 합니다. 27세에 권총 자살한 록 스타 커트 코베인은 유서에서 “서서히 소멸하느니 불 타 없어지는 것이 낫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살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숨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 것이니 내야 죽든지 말든지 내 자유라고 합니다. 그 말 틀린 말입니다. 누가 내 거라고 합디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남의 목숨을 죽이면 살인범이 됩니다. 그렇다면 내 목숨이라는 착각 때문에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신앙 지도자 입니다. 그들이 살인이 죄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러면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칭하는 이단자”라는 이름으로 십자가에 처형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위한 떳떳한 행위라고 합니다. 오히려 이런 사기꾼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표창 받을 일이라고 합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이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몰랐습니다. 이미 성경에 예수님은 이러한 분이시다 라는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표준 하여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가 없습니다. 다만 전쟁은 예외 입니다. 사람은 그 생명이 존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한 사람의 죄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요단강에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가신 것입니다. 그 때 세례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오신다.” 하고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은 선지자 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압니다. 죽음 당하신 하나님 어린 양이십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대단한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 박아 죽인 병정들이 예수님의 옷을 가지고 네 몫으로 나누어서 한 몫씩 차지 했습니다. 그런데 아리마데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도 예수님의 사람이었지만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빌라도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렸습니다. 언젠가 밤에 찾아 간 니고데모가 침향을 섞은 몰약을 백 근 쯤 가지고 왔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시체를 모셔다가 유대인들의 장례 풍속 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는 동산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직 장사 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날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명절을 준비하는 날입니다. 그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를 위해 준비한 무덤이었습니다. 오늘이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날입니다.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저도 오늘 예수님을 장사 지낸 사람에 대해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 세상은 정말 힘든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해방 전에 삼대 부자가 살았다고 합니다. 충청도에는 공주 갑부가 살았답니다. 그 이름이 김갑순(1872-1962), 호남은 인촌집안, 영남에서는 경주 최 부자를 꼽았답니다. 일제 시대 김갑순이라는 사람은 조선 제일의 땅 부자였답니다. 공주에 있던 도청을 대전으로 옮기면서 부동산 투기로 땅 투기의 원조가 된 것입니다.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르는 땅으 대부분이 다 이 김갑순이라는 사람의 땅이었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공수래공수거였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사회에 공헌한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남긴 것은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이다) 라는 말 한 마디뿐입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부자는 모두 도둑놈이라는 것입니다. 호남의 인촌 선생님 집안은 10만석을 하던 집안입니다. 인촌은 대학을 설립하고 기업을 일으키고, 신문사를 세우는 등 이런 데 돈을 투자 했답니다. 명분이 있는데다가 돈을 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인촌 집안을 욕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경주 최 부잣집은 어떻습니까? 자그마치 12대 300년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던 집안입니다. 300년 장수 기록은 세계적인 기록입니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를 일으켰던 메디치 집안의 300년 기록에 비견 될 수 있는 집이 최 부잣집입니다.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 한다. 흉년에 땅 사지 마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것이 부자의 생활 철학입니다. 영남을 대표하는 부자 최준(1884-1970)이란 사람은 당시 신흥 부자인 이병철씨와 대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 전신)를 인수인계하여 오늘의 사학을 이룩한 것입니다.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여기 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한가를 압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죄 없는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가장 악질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가장 흉악한 죄인에게 내리는 벌을 내린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살인자들이 이런 모습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이렇게 악질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이런 인정사정없는 시대가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입니다.

                  II. 자기 무덤을 제공한 사람
성경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은 정말 용기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 살벌한 때에 자기가 예수의 사람이라는 것을 표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한때 그도 유대인이 무서워서 자기를 숨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감히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내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 유명한 빅토르 위고는 “겨울이 깊었으니 봄이 멀지 않았다” 늘 시를 읊었습니다. 지금도 추위를 느낍니다. 봄이 봄 같지 않다고들 합니다. 그것은 날씨가 추워서만 아닙니다. 이 세상이 추위를 느낄 만큼 스산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들의 현실이 언 땅처럼 얼어 있을지라도 무언가를 사랑하니까 언 것도 녹게 합니다. 언젠가 꽃도 활짝 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사랑해서 가난도 꽃으로 피워 보았으면 합니다.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서야 살 수 있습니다. 희망을 뿌리고 삶을 꽃처럼 아름다운 향 내음을 낼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는 밀레의 만종(일명 씨 뿌리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저 또한 빅토르 위고를 좋아합니다. 그 작품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낭만파 시일입니다. 또 소설가입니다. 소설 “레 미제라블”과 “ 파리의 노트르담”을 모르시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 레미제라블은 “행복한 사람들을 너무 두렵게 할 뿐 더러 불행한 사람에게는 너무 희망을 품게 하는 위험한 책”이라는 말을 남기게 한 책입니다. 이 책이 출판 되자 말자 대중들, 노동자들에게 폭풍과 같은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 당시 노동자들의 주머니에 12프랑만 있어도 그 책을 사서 읽었다고 합니다. 그 책은 희망을 주는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이름은 “비참”이었습니다. 어둠을 밝힌다고 “레 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로 바꿨다고 합니다. 빅토르 위고가 1845년부터 17년간에 걸쳐 쓴 이 소설을 그가 출판 당시 출판사 사장에게 “어떤가?”라고 쓴 편지에 사장의 답이 ”대박일 것이네“라고 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한 시대의 어둠을 밝힌 그의 소설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빛인 것입니다. 거기 빛처럼 밝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간 이 사람입니다. 그가 진정한 멋쟁이입니다. 당시는 살벌했습니다. 누구도 ”나는 예수의 사람이요“라고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제자 베드로마저 달아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겁이 나서 겉옷도 벗고 달아난 일도 있습니다. 그만큼 무서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용감한 신앙인입니다. 죽음을 겁내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협박에도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무덤을 예수님에게 드린 것입니다. 다들 재물을 좋아합니다. 돈은 누구나 다 필요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선뜻 자기의 무덤을 내 놓은 것입니다. 믿음은 아무렇게나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위험을 무릎 쓴 사람입니다. 그도 예수님 다음으로 죽울 수 있습니다. 지금 유대인의 눈에는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죽이려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는 용감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한 목숨 살려고 비굴하게 구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정말 많습니다. 슬로 라이프란 (Slow life)란 말을 잘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 말이 영어에서는 낯선 단어입니다. 그러나 심플 라이프(simple life)란 말은 매우 익숙한 단어입니다. 이는 요즈음 물질적 풍요만을 우선하는 자본주의 경제와 현대 문명의 양태에 질린 문화 창조자라 불리우는 많은 사람들이 덧셈이 아닌 뺄셈의 발상으로 움직이기 시작 하고 있습니다. 심플이나 슬로는 지금 시대의 심리와 지향을 나타내는 비슷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느림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너무 빠른 것도 좋은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들의 삶에 많은 악영향을 끼치는 것도 많습니다. 빨리 부자 되고 빨리 성공하고, 보다 빨리 이루고자 하다 보니 잃는 것이 많습니다. 먼저 자신이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좋은 친구를 잃어버립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슬로 푸드(slow food) 운동이 필요합니다. 인스턴트 음식이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 많다고 합니다. 음식도 천천히 먹자는 운동입니다. 기다리는 것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너무 급해요. 너무 빨라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너무 성급했습니다. 예수가 누군지를 한 번만 더 생각하였더라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정말 멋쟁이 신사가 있습니다. 자기의 재산을 선뜻 내 놓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많은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입니다.

맺는 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인 줄 모르는 유대인들은 중대한 과오를 범했습니다.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고 그를 이단자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그 일은 분명히 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에 무지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의 거추장스러운 존재로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미련 없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입니다. 곧 안식일이 옵니다. 내일입니다. 그러데 안식일에는 시체를 십자가에 달아 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장사지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도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는 뭇 사람들의 구경꺼리로 달려 있는 것입니다. 때에 아리마대 요셉이란 사람이 그 시체를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합니다. 그가 자기를 위해 준비해 둔 무덤에 장사를 치른 것입니다. 대단한 인물입니다. 자기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선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 재산상의 손해를 보려는 사람이 적지요.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이런 일을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어찌 이 사람뿐입니까? 아니지요. 그는 선한 일꾼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선한 사람이 되어 주 안에서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05년3월 20일 -충웅-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