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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고난주일] 그 분은 겸손하였습니다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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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영태 목사 2005. 3. 20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한국의 한 은행장 되는 분이 호화스러운 요트를 타고 뱃놀이를 하다가 그만 침몰이 되었습니다. 이분은 침몰 직전, 해안 구조대에 SOS 구조 신호를 보냈습니다. 신호를 받은 구조대가 답을 보냈습니다. "알았다, 곧 구하러 가겠다. 그런데 현재 당신의 위치를 알려다오." 했습니다. 그런데 답이 오기를. "나는 한국에 있는 모 은행의 은행장이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회신이 뚝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구조대가 출동하지 못해서 이 배는 구조되지 못하고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What is your position?"--이 말을 잘못 알아들은 탓입니다. your position? 이 말을 오해 한거예요. 보세요. your position? 지금 네가 어디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왜 거기서 은행장이라는 지위가 나옵니까? 죽어가는 마당에도 자기지위가 중요하고 자기자리가 중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죽으러 갑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주님의 모습은 겸손 그 자체입니다. 아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모습뿐 아니라 예수님의 전 생애의 모습이 겸손입니다. 그분은 겸손 하였습니다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겸손하였습니다. 그 분에 비하면 먼지만도 못한 우리가 오히려 한도 없이 끝도 없이 교만하지요. 그분은 겸손하였습니다.

보세요.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부터 가 겸손 아닌가요. 우리는 식당에 가서 조금 만 지저분하여도 자리를 옮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자녀가 병원에서 태어날 때 조금 만 불친절하여도 병원을 옮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여관을 잡을 때 조금만 냄새가 나도 방을 옮겨달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별 볼 일도 없는 사람들이면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떠했나요.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 만왕의 왕 되신 분입니다. 이 온 우주가 다 그분의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그분을 기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가장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 사람의집에도 오시지 못하고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쾌하게 생각하시거나 잘못했다고 책망하시거나 이게 뭐하는 것이냐 하고 불평하시거나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곳은 잠자리가 불편한 곳입니다. 그곳은 냄새나는 곳입니다. 그곳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지저분한 곳입니다. 그 곳은 사람들도 잘 가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시길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겸손하게 살기보다는 교만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어찌하든 남보다 더 높아지려고 합니다. 산에 올라가는 인간의 심리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른 사람ㅂ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상에 갔다 왔다는 것이 자랑입니다.

정상에 올라가지 못하고 중도 하차한 사람들을 등신 취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도 못 올라가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산에 가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나무들의 조화, 맑게 흐르는 골짜기의 물소리, 자연의 소리 길가에 피어나는 야생화의 아름다움, 볼 것이 얼마나 많고 생각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도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산꼭대기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누가 먼저 올라가느냐 하는 것 뿐 입니다.

주님은 높이 올라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낮은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병든 자를 찾으시고 버림 받은 자들을 찾으시고 가난한자들과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옳은 일이다. 너희도 이렇게 살아라. 이것이 승리하는 길이다. 너희도 이렇게 살아라.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다. 너희도 이렇게 살아라.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다는 것이 그리 쉽지를 않습니다. 내 마음에 욕심이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예수님을 믿은지 얼마 안 되어서의 일입니다. 길을 지나는데 앞쪽에서 한센병 환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복음도 전하면서 기도해주고 싶은데 왠지 더러운 생각에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아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하나님! 제가 저 병자를 그냥 지나친 것이 잘못입니까?” “왜 그냥 지나쳤는데?” “더럽게 느껴져서 그랬습니다.” “그래? 너는 그 병자보다 깨끗하냐? 나은 게 있느냐? 너는 그 병자보다 더 더럽고 추한 냄새나는 죄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그대로 받아주었고 사랑해 주었다” 그는 즉시 그 병자에게 뛰어갔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병자의 손을 꼭 붙들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겸손입니다. 그분은 겸손 하였다. 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곤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는 말씀대로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였습니다. 왕의 입성치고 이 지구상에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가장 초라한 입성이었을 것입니다. 호위대도 없습니다. 팡 파래도 없습니다. 퍼래이드도 없습니다. 환영식도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하는 일이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겸손은 거기에 더 낮아 지셨습니다. 사람 타는 말을 타신 것이 아니라 멍에 메는 짐승을 탔습니다. 멍에 메는 짐승이 무엇입니까? 일하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어미가 아닙니다. 새끼를 탔습니다. 가장 낮은 것 중에 낮은 것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겸손에서 평화가 나옵니다. 겸손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겸손에서 섬김이 나옵니다. 겸손에서 충성이 나옵니다. 그럼으로 최후의 승리자는 겸손한자입니다. 잠언서가 들려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라고요. 교만하면 이기는 것 같습니다. 성공한 것 같습니다. 잘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넘어집니다. 그러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나를 높여 줍니까? 겸손입니다.

속지 마세요. 마귀는 교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물러 설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절대로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빚을 지든 사기를 치든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을 말합니다. 대접을 받으려면 대접하라고 합니다. 언제 대접을 받게 될는지 안면 영원히 대접을 받지 못 할런지도 모르지만 대접을 먼저 하라고 하십니다. 섬김을 받으려면 섬기라고 합니다. 높아지려 하면 낮아지라고 하십니다.

쏠버대학을 졸업한 ‘포항가리’는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온 쏠버대학에서 라비스 박사 교육 5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순서가 잘 진행 되고. 답사의 시간입니다. 답사를 하기위하여 단상에 오른 라비스 박사는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내빈석도 아니고 재학생석 맨 뒷자리에 대통령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라비스 박사가 황급히 내려가 대통령을 단상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때 포항가리 대통령은 끝내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제자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오직 선생님뿐입니다.” 장내는 뜨거운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고, 포항가리 대통령은 더욱 명성 높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지금 주님 앞에는 영광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고난입니다. 제자들의 배신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죽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길을 다 알면서도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길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겸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 길을 가면 엄청만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이 길을 가면 자존심이 몹시 상할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걸 알면서도 그러나 보람 있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기에 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내가 이 길을 가다가 다 망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갑니다. 그것이 오늘 주님이 나귀를 타고가시는 길입니다.

여기 제자들이 나귀의 등에다가 겉옷을 얹어줍니다.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 호산나를 부릅니다. 호산나는 만세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우리 예수님 만세입니다. 우리 주님 만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 주님이 가시는 길을 압니까? 영광이나 얻으려 했지 겸손을 모릅니다. 주의우편에 누가 않겠느냐 하는 것은 알았고 관심을 가졌지 십자가를 누가 지을 것이냐 하는 것은 몰랐습니다. 저들은 꾀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뜬다 생각되면 예수님에게 와서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불리하다 생각 될 때는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 버렸습니다. 세상사는 방법으론 참으로 지혜가 많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승리자가 누구입니까?

유명한 흑인 교육가 부커 워싱턴 박사가 앨라배마에 있는 터스키기 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한 후 그 지역의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느 백인 부인이 그가 워싱턴 박사인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흑인이려니 해서 멈춰 세우고 몇 달러 줄테니 장작이나 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총장은 웃으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장작을 패서 그녀의 벽난로 옆에 차곡차곡 쌓아주었습니다. 일이 다 끝나 그가 돌아간 후 그 집 하녀가 그를 알아보고 주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그 부인은 너무 부끄럽고 당황해서 다음날 아침에 총장실로 찾아가 백배 사죄했습니다. 그러자 부커 워싱턴 총장은 “부인, 괜찮습니다. 저는 가끔 가벼운 육체노동을 좋아합니다. 그뿐입니까. 이웃을 위해 돕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지요”하며 위로를 했다고 합니다.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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