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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독특성과 구별성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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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동규 목사

5장 11절부터 예수님께서는 3인칭으로 언급하셨던 것들을 2인칭으로 바꾸어 제자들에게 적용하셨습니다. 이같이 하심으로써 이전에 언급된 복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선택된 소수의 무리들과 동일시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제자들은 세상과 구별되었기 때문에 복 있는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세상과 다르다는 사실, 그리고 이로 인해 야기되는 핍박은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을 등지고 예수님과 그들만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려는 유혹에 직면하게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세상과 구별된 존재이지만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들은 이 세상과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있으면 분명한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제자들이 나타내는 이 독특하고 구별된 특성을 ‘소금’과 ‘빛’이라는 은유로 표현하셨습니다.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소금이 되라’ 혹은 ‘빛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소금과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우리라는 존재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이미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은 짠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짠맛은 소금이 가진 독특한 특성입니다. 소금은 원리적으로는 결코 그 맛을 잃을 수 없습니다. 짠 맛이 없는 것은 아무리 소금처럼 보일지라도 본래 소금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맛 잃은 소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소금에 불순물이 많이 섞이거나 물 타기로 희석되면 소금이 맛을 잃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한 번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그 신분이 결코 상실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28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신자가 타락하여 결국 배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처음부터 참 신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줄 뿐입니다. 맛 잃은 소금이란 구원의 상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상실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힌다’는 말씀도 독특성을 상실하게 될 때,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모욕을 당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임이 분명한 사람도 전혀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갈 때, 혹은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복음 전파라는 독특성을 상실하고 세속적인 방식에 희석되었을 때, 맛 잃은 소금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금은 부패한 것을 다시 신선하게 하거나, 부패를 방지하지는 못하지만 부패를 지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도 부패한 사회를 신선하게 만들거나,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만들 능력은 없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 세상은 점점 악하여지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의 공동체는 세상의 부패를 지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아마 2.7%의 소금이 바닷물의 부패를 방지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한국교회는 25%의 성도가 있으나 부패를 방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듣고 있습니다. 맛을 잃다 못해 맛이 가버린 교회에 대한 비판이 세속의 법정과 매스컴을 통해 질타되고 있습니다. 왜 오늘날 교회는 이처럼 맛을 잃고 있습니까? 이는 소금 아닌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이거나, 제자들의 공동체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80년대에 배해서 이 시대는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무척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 성장을 위해 복음에 물타기 하려는 유혹이 강합니다. 많은 교회가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 전도’의 방법을 버리고 상업적인 마케이팅 전략을 도입했습니다. 효과적인 홍보를 위해 건강하게 사는 10가지 비결 속에 복음을 끼워 파는 식으로 전도합니다. 사람을 모으기 위해 교회에서 경품을 추천하고, 사람을 붙들어두기 위해 웰빙 문화를 도입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교회의 독특한 짠 맛이 희석되고 있습니다. 교회를 찾는 이유가 건강이나 성공을 위해서, 혹은 외로움을 달래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라면 그 교회의 독특성은 이미 희석된 셈입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어떤 사회단체나 종교단체에서도 제공할 수 없는 독특한 짠맛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금의 짠맛은 색깔이나 모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독특성이라는 것도 교회의 형태나 종파의 색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라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서 나옵니다. 복음 전파라는 고유한 짠맛을 잃어버린 교회는 결국 변질됩니다. 맛이 가서 버림받고 수치와 모욕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14-1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의 정체성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소금이 독특성을 말하고 있다면 빛은 구별성이 강조됩니다. 소금은 세상이 부패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고, 빛은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과학과 기술의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급변하는 오늘날은 72일마다 기존의 지식이 배가 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이유와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지식은 조금도 증가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인간이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부패하고 어두운 참 모습을 직시하게 해줍니다. 또한 날이 갈수록 부패와 어둠의 정도가 심해질 것을 이미 예언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해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구별된 제자들을 향한 이 말씀은 ‘너희만’ 세상의 빛이라는 의미입니다. 빛은 어둠을 폭로하며 길을 밝혀줍니다. 인간이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폭로해주고 생명의 길이 어디 있는 지를 밝혀주는 역할은 복음의 빛을 이미 발견한 제자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위대한 사상가나 철학자도 생명의 길이 어디 있는지 밝히 보여줄 수 없지만 제자들은 평범한 삶을 살아도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본질문제에 대해서, 인생이 시작과 끝에 대해서 제자들은 어떤 위대한 학자보다도 더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 개인이나 제자 공동체는 ‘빛’이며 그들만 ‘빛’이라는 사실은 변개될 수 없습니다.

빛을 내지 못하겠거든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라도 되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멋있는 말이기는 합니다만, 제자라는 존재는 단지 빛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그 존재 자체가 빛을 담은 등불과 같이 되었습니다. 억지로 말로 덮어두려 하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그 빛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산 위의 동네가 숨겨질 수 없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감추려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함이 그의 삶 가운데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됩니다. 어둠을 밝히려고 억지로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빛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가리지만 않는다면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비추는 삶이라 하면, 일상적인 생활을 떠나 세상에서 굉장히 위대한 어떤 일을 시도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먹고 사느라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하고 피곤해서 기도조차 하기 힘든 사람이나, 가정에서 애 키우느라 성경 읽을 시간조차 없이 바쁜 사람은 빛을 비추는 것을 꿈도 꿀 수 없는 현실이라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유 있는 직장을 얻거나 애가 크고 난 후에야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철저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 하시면서 동시에 집안사람을 비추는 빛을 말씀하셨습니다. 24시간을 아이에게 매여 있어도 그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라면 그는 등불입니다. 비록 그 빛을 비추는 범위가 산 위의 동네처럼 광범위하지 않지만, 가정을 비추는 정도로는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빛’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적극적으로 막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의 존재는 자녀들에게 혹은 방문하는 이웃과 친지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밝혀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꼭 종합 운동장을 밝히는 전구처럼 밝은 빛만 쓸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희미한 손전등도 구원의 길을 안내하기에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많은 세월을 쓸모없이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난 후에 그가 벽에 써 놓은 글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글이 찬송가 404장 4절이 되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 하리.♬ 다른 사람에게 부담감과 피해만 주고 살았을 것 같은 그도 하나님의 백성이었기에, 위대한 사람도 바라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밝게 비취든 희미하게 비취든 어떤 모양으로도 비취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빛 노릇을 하려고 야단법석을 떨며 특이한 종교적 생활에 몰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 백성의 삶이라는 것이 그다지 요란스럽지 않고, 그저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주어진 자기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였는데,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 자기가 믿고 있는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해 분명하였다는 것입니다.

빛 된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말로 덮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디가느냐’고 친구가 물을 때, 얼버무리며 숨기지 않고 ‘예배하러간다’ 혹은 ‘말씀을 배우러 간다’고만 하여도 충분히 관계성 전도가 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당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닌척하며 숨기지 않고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담담하게 우리의 믿는바 신앙을 말해야 합니다. 

흔히 이 말씀을 두고, 소금처럼 녹아지는 자기 헌신이 있어야 짠 맛을 낼 수 있고, 횃불처럼 자기를 태우는 열정이 빛을 낸다는 식의 설교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헌신과 봉사를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소금과 빛’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돕습니다. 하나님 백성다운 맛을 잃어버리고, 빛을 발하지 못하는 까닭은 성도들의 헌신이나 열정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소금과 빛’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 살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복음 전파라는 본질이 변질되지 않고 고유한 짠 맛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삶의 자리에서 소금과 빛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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