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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고난주일] 아는 것과 믿는 것 (요 1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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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이봉 목사

□ 아는 것과 믿는 것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
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
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
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
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
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요한복음 11:17-27)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40일 동안 성도들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스스로 절제생활을 하면서 지내는 기간이
바로 이 사순절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은 의미에서 보면,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도록 함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그가 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믿음으로 응답하면
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사순절의 근본 목적이라고 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두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
도에 대하여 <아는 것>과 <믿는 것>에 대한 분명한 고백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고 있는 부분은 많지만, 그가 <나의 구세
주>임을 믿는다고 확신하는 고백은 아직도 분명치 못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준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1.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며칠을 더 지체하여 그가 죽은 후에 갔습니다. 즉 즉시 달려
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식구들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특히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극진하게 영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내려갈 때 마다 그 집에 들려 쉬어갔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나사로가 그만 병이 심한데, 빨리 와서 고쳐주었으련만, 죽은 후에야 그 집에 오게 되었습니
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요11:4) 고 하였습니
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였고,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이 영광을 얻
게 하려고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얼른 보면 잘 이해가 안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대로 나사로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게 하도록 하였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신 역사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면, 주님은 며칠 후에 마르다와 마리아 집으로 오셨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보고 체념
과 아쉬움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
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요11:22)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안다는 것> 때문에 아직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에 관하여 안다는 것,
교회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
성경의 관하여 많이 알고 있다는 것
바로 그 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 말에 주님이 뭐라고 하였습니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다시 뭐라고 했습니까?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요11:24)

역시 여기서도 다시 <알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마르다는 계속 안다고만 하였습니다.
이 말에 주님은 다시 현재적으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했는데, 마르다는 ‘부활의 날에는 우리 오라비
도 다시 살줄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요즘 지성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묻습니다. 우리도 장차 변화된 몸으로 다시 살 줄 다 알고 있습니
다.
우리의 부활신앙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부활의 날에는 나도 다시 살아날 줄 압니다’라는, 알고 있다는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줄 압니
다.
마르다의 이 ‘내가 안다’는 것은 ‘내가 그렇게 믿는 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이 무엇이든 구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어줄 것 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오늘 현대 크리스천들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 구하면 들어준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 부활도 성경지식으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입니까?
그런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의 영적 성장이 둔화되어 앉은뱅이 신앙생활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2. 주님을 알고 있는 지식에서 그를 믿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알고 있다는 것과, 내가 그를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에 대한 정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행위에 속한 문제입니다.
알고 있는 단계에서는 그와 함께 하는 행동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젊은 남녀의 교제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상대방에 관하여 만날 때 마다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고, 알게 됩니다.
음식은 무엇을 좋아하며, 취미는 무엇이며, 그가 좋아하는 꽃은 무엇이며, 그의 생일은 언제이며 하는 것은 모
두 <아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 아는 단계에서 그를 믿게 되면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믿음이 생기면, 그와 함께 하려는 행동이 나
오게 됩니다. 그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고, 무엇이든지 해 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이란 죽은 믿음이란 말이 옳습니다.
내가 그를 믿기에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를 따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예수님에 관하여
알 수는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다 압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저에 대하여 두 부류로 나누일 것입니다. 저에 대하여 알고 있는 분들이 있고, 믿는 분들
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30대의 목회 중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잴잴 설교는 잘 한다’고.... 여기 잴잴
이란 평안도 사투리입니다. 설교는 그럴듯하게 잘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저를 믿고 따르지는 않
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게 대하여 알고는 있었습니다.
설교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많은 지식도 가진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믿고 따르지는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 신앙생활이 결실하지 못하고 탈락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것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대하여 잘 알고는 있습니다.
산상수훈에 나타난 주님의 교훈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께 전적으로
나를 맡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주님 따로> <나 따로> 논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으로 끝나면 아무런 결과가 없습니다.
주님은 알고 있다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
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비로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습니다”>라
고 했습니다.(요11:27)

우리도 주님께 대한 고백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습니다’고....  주님은 나의 부활이요 생명임을 이제 나는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 위에서라
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요11:40)

3. 지식적 신앙에서 고백의 신앙이 되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럴 때 마다 ‘네가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네 알고 있는 지식이 너를 구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나 싸구려 믿음의 정보들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다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믿고 믿음으로 내 모든 행위를 따라 행하고 있느냐? 에 있습니다.
만일 죽을 병이라고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이 주님은 무슨 병이라도 고쳤다고 아무리 알고 있으면 무엇 하겠습
니까?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기적은 인간의 지적인 영역에서는 나타나
지 않습니다. 어떻게 죽은지 나흘이 된 부패해 냄새나는 송장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영
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지금도 그런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지난주일 우리교회에서 간증을 한 박상설 집사님을 여러분 보았습니다. 그가 방속국 PD 로 있을 때, 기적이
란 것에 대하여 늘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를 만들면서 사이비 기도원이나 이단들에 관하여 그들의 내부적 부정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는 모태신앙이었기에 성경 지식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네가
다시 살리라’고 하는 부활신앙에 대하여는 믿음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자기의 놀라운 죽음의 체
험을 통하여 확실하게 하나님 살아계심을 보았기에 이제는 전적 그 분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행한다는 간증을
다 들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중생한 모습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의 랍비였지만, 주님의 거듭나야한다는 말의 뜻을 몰라서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
니까? 어머니 배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라는 우답(愚答)을 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선생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뜻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느냐?’하면서‘육으로 난 자는 육이요, 성
령으로 난 자라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아는데서 끝이지 말고,
그를 믿고 그와 함께 동행 하는 믿음의 삶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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