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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고난주일] 베다니로 가신 예수 (요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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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 설교자 : 손상률 목사 

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본문 말씀에는 예수께서 베다니로 가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는 평소 예수께서 사랑하고 아끼시던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 11절에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불과 오리 정도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습니다(18절). 예수님께서는 수난의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셨는데 그때 이곳 베다니에서 유숙하시며 최후의 고난에 대비하였습니다(마 21:17).
성경에 기록된 지명들은 제각기 고유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벧엘은 「하나님의 집」, 베들레헴은 「떡 집」,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등 복되고 밝은 뜻의 이름들입니다. 그러나 이곳 베다니는 「괴로움의 집」이라는 의미로 매우 어둡고 불행한 고장의 이름입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가신 것은 그가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괴로움과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십자가 죽음을 앞둔 수난의 한 주간을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과 그 사역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베다니의 실상

본문 말씀 1절에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집 베다니의 주인공은 마리아, 마르다 자매와 그들의 오라비인 나사로 입니다. 부모의 이름이 없이 이들 세사람의 이름만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일찍 부모를 잃은 소년 소녀 가장이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호주격인 나사로가 병들었고 결국 죽어 장사지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집 베다니의 실상이요 이세상의 모습입니다.

(1) 질병이 있는 곳입니다.

본문 말씀 1절에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6절에도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질병은 정상적인 생리활동에 이상이 생겨 그 기능이 작용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정신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의 경우 하나님과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증후군을 뜻합니다. 심리적인 불안이나 공포, 염려와 근심, 자괴감, 수치심, 죄책감과 같은 것들로써 과학적으로나 물리적인 처방만으로 치유되기 어려운 질병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늘을 지붕으로 하는 지구촌 곳곳에 모든 인류들이 하나 같이 이런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름모를 질병과 신체적인 악조건에 고통 당하며 신음하는 사람들로 가득차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질병에 시달려 삶의 의미를 방황하고 있어서 과히 괴로움의 집 베다니의 현상을 실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2) 죽음입니다.

나사로는 질병으로 앓다가 마침내 죽었습니다. 본문 말씀 11절에 예수님께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14절에는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1절에 마르다도 자기 오라비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31절과 38절에는 무덤에 장사되었음을 말했고, 39절에는 죽은 지 나흘째요 썩어 냄새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병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장사하게 되고 그 후에 시체는 썩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질병과 재난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숙명적인 불행이 있습니다.

(3) 슬픔과 눈물입니다.

베다니에 마리아 마르다 자매의 집에는 질병과 죽음이 지나간 다음 깊은 절망과 눈물의 흔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갔을 때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하고 절망적인 울음을 터뜨렸습니다(요 11:21). 그의 동생 마리아도 예수님에게 똑같은 말을 하였습니다(32절). 이 죽음의 현장에서 마리아 자매가 울었고, 거기 모인 유대인들도 울었습니다(33절). 마침내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시며 울었습니다(35절).
부활의 신앙이 없는 사람일 경우 죽음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이 엄청난 불행의 충격에 사람들은 슬픔과 좌절과 눈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히 9:27). 심지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에도 질병과 죽음과 슬픔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주신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름하여 괴로움의 집 베다니의 실상인 것입니다.

Ⅱ. 찾아가신 예수님

예수께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잠든 나사로를 깨우기 위하여 가신 것입니다(11절). 예수께서 그곳에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심으로써 베다니의 괴로움을 치유하시게 됩니다. 「베다니」와 「나사로」는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에 가심으로써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슬픔의 집 베다니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진정한 나사로가 되었습니다. 일찌기 이사야는 죄와 죽음으로 얼룩진 세상에 생명의 주님 예수께서 오시게 될 것을 예언하면서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고 하였습니다(사 9:2).

(1)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예수께서 베다니 식구들을 사랑하셨다고 말했습니다. 5절에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11절에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나 그 누이들을 사랑하신 것은 인간의 정신이나 감정에 따르는 사랑이 아니라 영원하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성품으로 그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는 것이어서 상황에 따라서 바뀌어 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시간과 장소와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지속적이고 변함 없는 사랑으로 작용합니다.
여기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그 누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조급해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유 있게 대처하셨고 오히려 그 죽음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성질을 아는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 5:14).

(2) 기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도와 주시는 분입니다. 베드로가 사단에게 둘러싸여 흔들리게 될 때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눅 22:32). 로마서 8:34에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7:25에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기도가 베다니 죽음의 현장에서 발휘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1:41-42에 보면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하고 간절하게 구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결국 그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는 그곳에 하나님의 도움이 이루어져서 슬픔의 집 베다니를 치유하고 말았습니다.

(3) 말씀의 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일찍부터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였고 그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을 듣고 “주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순종하여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눅 5:5).
그런데 여기 마르다와 마리아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말씀에 확신이 없었기에 괴로움을 극복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예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셨을 때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하고 받아 넘겼습니다(요 11:23-24). 또 예수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실 때 그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하고 믿지 못했습니다(요 11:39).
그렇지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생명의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명했을 때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걸어 나왔습니다(요 11:43-44).생명의 근원자이신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생명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달리다굼」하실 때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났고(막 5:41),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실 때 상여에 실려가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다시 살아 일어났습니다(눅 7:14).

Ⅲ. 베다니에 있는 사람

본문 1절에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고 하였습니다. 2절에는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괴로움의 집 베다니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나사로들이며 곧 우리 성도들을 뜻합니다.

(1)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마리아, 마르다와 나사로의 집에는 예수께서 들어가서 유숙하신 집입니다. 곧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수난의 마지막 한 주간을 이들 가족과 함께 지내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에게는 예루살렘에 있는 여러 고관들이나 명망 높은 사람의 집보다, 가난하고 병들고 죽음과 슬픔에 덮였던 베다니의 나사로 집이 훨씬 편안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한편 나사로의 집 식구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집으로 오셨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모셨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여리고 성에 사는 삭개오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셨을 때 삭개오는 큰 은혜를 받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9:8-9에 보면 그가 기뻐서 못 견디며 남의 재물을 토색한 것에 대하여 사 배나 변상하고 자기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내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였습니다.

(2)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2절에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라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거기 대한 감사의 표시와 주님께 보답하는 행위로 헌신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은 나사로의 집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며 헌신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엿새 전에 나사로의 집에 가셨는데 마르다는 많은 음식을 장만하고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가룟 유다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비싼 향유를 허비한다고 책망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사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요 12:1-7). 마태복음 26:13에 보면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3)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에 접했을 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하였습니다(4절).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사로의 부활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대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1:45에 보면 이 사건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12:11에도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생명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이적입니다. 「몸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은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증거하신 복음의 내용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살아나게 되는 사죄와 부활입니다(마 16:21).

이 말씀대로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마 28:1-10).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에 대한 첫 열매입니다(고전 15:20).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만에 무덤에서 살아난 것은 성도의 부활을 실증해 준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도리가 지상교회 설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오순절 이후 성령 받은 사도들은 온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며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4:10-12).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사는 생명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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