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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시리즈 (2) : 생명과 평안이 있는 교회 (롬 8: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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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곽주환 목사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데로 마음 껏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떤 사람은 좋은 차를 갖고 싶은 사람도 있고, 세계 일주를 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넓은 집의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된다면 결국에 그 사람은 폐인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탕자의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버지에게 자기에게로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요청한다. 주머니에는 큰 돈이 있었다. 마음껏 하고 싶은 데로 사용한다. 결국에는 폐인이 되고 말았다. 거지가 되고 말았다. 참으로 이상하다.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면 기분이 좋고, 결과가 좋아야 되는데 그 반대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오히려 후회하게 된다.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을 보라.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은 결국에 하나님을 떠나고 그 결과가 좋지 않다. 에덴동산에는 두 개의 중요한 나무가 있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을 들었지만 하와는 생명나무를 향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나무인 선악과를 향하게 된다. 하와라는 이름의 뜻 중에는 생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기의 이름에 생명의 의미가 분명히 담겨져 있건만 인간의 자유는 생명나무를 향하여 가기 보다는 먹으면 죽게 되는 선악과를 향하여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아담과 하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가인과 아벨이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쳤다. 가인은 땅의 제물로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만 받으셨다. 가인이 몹시 화가 나서 얼굴 색이 변하고, 결국에는 형이 하나 밖에 없는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였다.
이같이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을 보라. 인간은 그냥 놔두면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만 골라서 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에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한다. 창세기 6:5 말씀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내가 마음 데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가는 선택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선택, 올라가는 선택보다는 내려가는 선택을 하기 쉬운 존재가 바로 내 자신이다. 이같은 우리의 모습을 본문의 말씀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괴로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가 마음 껏 선택하고, 마음 껏 할 수 있는 데로 하라면 하나님과 원수되는 일을 한다는 그 말이다. 이러한 괴로움에서 누가 나를 건져줄 것인가?

세상의 지식이 나를 붙잡아 줄 것 같은가? 어림도 없는 말이다. 최근에 일어나 입시 부정 사건을 보면서 대학의 입시를 다루는 교수님들은 얼마나 지식도 많이 있겠는가? 그러한 지식이 있어도 시험문제 몰래 빼내서 가르쳐 주었다. 지식이 사람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가? 어느 정도 도움은 되겠지만 완전하게 해결할 수 없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를 가져온다라는 말이 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자기 마음 데로 결정하고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마음 데로 결정하고 결정한 데로 추진하면 그 결과가 좋은 방향으로 가야되는데 막강한 권력이 오히려 부패를 가져오는 결과로 끝이 난다. 세상의 권력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생각과 멀어지는 판단을 하기 쉬운 자리이다.

세상에서 누리는 인기와 아름다움의 미가 있다고 바른 판단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 유명한 영화배우 이은주 씨의 자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은 샀던 그 사람의 결정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결론을 맺었다. 세상에서 누리는 인기와 세상에서 예쁘다고 이야기 해 주는 칭찬도 결국에는 바른 판단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40대 선생님이 기억력이 점점 약해진다고 학교 실험실에서 자살해 죽었다. 가시려면 깊은 산 속에서 조용히 가시든지 하지 왜 학교 실험실에서 그렇게 자살했을까? 그 실험실에 무서워서 어떻게 학생들이 들어가겠는가? 숙직을 서는 선생님이 어떻게 학교에서 숙직을 설 수 있겠는가? 학교의 선생님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생각과 판단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지금 이 세대는 마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 데로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세대가 되어 버린 것 같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많이 듣는 용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후기 기독교세대라는 말이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과 교회의 간섭없이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 시대의 조류같다.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바른 생각하고,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대답은 분명하다. 아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에 이른다.

서양의 도살장에서 돼지를 잡을 때 사용하는 특이한 방법을 소개한다. 도살장 입구부터 하나의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이 통로의 넓이는 돼지 한마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이다. 그 통로 바닥에는 돼지가 좋아하는 콩을 뿌려 놓는다. 먼저 들어간 돼지가 콩을 주어먹으려고 할 때 뒤에 있는 돼지는 앞에 있는 돼지의 엉덩이를 머리로 받으면서 자꾸만 앞으로 밀어낸다고 한다. 따라서 이 통로에 한 번 들어가서기만 하면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돼지 때의 행렬 때문에 계속해서 통로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어느 정도 앞으로 나가다 보면 통로는 끝이 나게 되고 돼지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이때 아래에는 자동 도살 기계가 설치되어 있다. 그곳으로 돼지가 떨어지면 그 기계는 자동으로 돼지를 처리한다. 그렇게 해서 돼지는 가죽이 벗겨지고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추려져서 기계 밖으로 나오게 된다. 미련한 돼지는 눈앞에 있는 먹이만 따라가다가 죽음의 벼랑으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어쩌면 사람들 가운데도 이러한 돼지의 운명을 그대로 따라가는 자들이 없지 않다고 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 줌의 콩을 줍기 위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죽음의 벼랑 끝에 서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마음 껏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려고 하는 이 세대에 교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외쳐야할 메시지가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외쳐야할 메시지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살려하지 마십시오. 결국에는 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외쳐야 한다.

나는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인간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성령님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사로잡혀 있는 교회, 성령의 인도하심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는 교회, 성령의 인도하심에 말없이 순종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 교회에 생명력이 충만하다.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설교 준비를 하는데 내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전화로 전화가 걸려왔다. 성경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목사니까 당연히 관심이 있다고 대답했다. 성경을 바르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알고 봤더니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아마도 전화 번호를 기억해서 계속해서 전화하리라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하지 말라고 혼을 내주었다. 갑자기 우리 교인들이 생각이 났다. 이런 전화를 받으면 교인들은 어떻게 할까? 방법은 대화하지 말고 끊으라. 이 세상은 우리의 영적인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설교 준비를 하는데 컴퓨터로 갑자기 메시지가 뜬다. 읽어봤더니 오빠 놀러오라는 메시지이다. 참으로 헷갈리게 한다. 막 짜증스럽기까지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하면 그냥 나를 놔두지 않는다. 정말로 우리의 신세가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그러기에 교회의 사명이 얼마나 큰가? 우리 교회는 성령이 충만해서 이곳에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가득찬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루이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넣어야 작동 할 수 있도록 인간이라는 기계를 만드셨다. 당신 스스로 우리 영혼이 연소시킬 연료가 되고 먹을 음식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상관없는 행복이나 평화를 주실 수 없다. 그런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행복이나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속에 성령님이 계셔야 생명이 있고, 그 생명력이 있을 때에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 시대는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들이 앞에 놓인 콩을 한 알씩 주워 먹으면서 죽음의 문턱을 향하여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세상을 향하여 여기에 생명과 평안이 있음을 소리높혀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교회가 성령충만해서 생명과 평안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몇 년 전에 뉴질랜드에 가서 본 양쇼를 보았는데 잊을 수가 없다. 관광객들은 스탠드에 앉아서 구경을 하고 앞에는 넓은 초원이 있다. 그 초원에는 수 백마리의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그 때에 양을 치는 목자가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그러더니 개가 벌떡 일어나서 수 백마리의 양들을 양 우리로 집어 넣는 것이다. 그 양우리가 바로 관광객의 스탠드 앞에 있었다. 수 백마리의 양들이 우리로 들어왔고, 양을 몰던 개는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바로 저것이로구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곳 저곳에 흩어진 양들을 생명과 평안으로 인도하는 바로 저것이로구나. 너무나도 깊은 감명을 잊을 수가 없다. 나도 저런 개같은 목사가 되어야 되겠구나.

이 시대는 마치 앞에 놓인 콩을 주어 먹다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교회가 성령이 충만한 교회, 영의 생각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귀를 기울여서 이곳에 생명이 가득한 교회, 평안이 가득한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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