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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시리즈 (3) :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 (사 50: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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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곽주환 목사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들을 때가 많다. 대개 뉴스를 듣기도 하고, 토크쇼를 듣기도 하고,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라디오를 통해서 많은 말을 듣는데 어떤 말은 지금 꼭 필요한 말이 있고, 오늘이 지나면 필요없는 말도 있다. 예를 들어서 기도원을 가려 하는데 어느 쪽의 길이 덜 막힐까?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올림픽 대로를 타고 가는가? 지금 당장 운전할 때에 어느 길의 소통이 원활한가 궁금하다. 그러나 이 방송의 내용은 내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나에게는 더 이상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일기예보를 듣는다. 아침에 나오면서 밖의 온도가 얼마나 될까? 그렇지만 이 온도에 관한 말도 밖에 나오기만 하면 더 이상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지만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는 오늘도 중요한 이야기이면서도 내일도 중요한 이야기이다. 마음에 담고서 그 내용을 기억하려고 한다.

이같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말은 듣자마자 쓸모없는 말도 있고, 어떤 말은 운전하고 가는 도중에만 필요한 말이 있고, 어떤 말은 오전까지만 필요한 말이 있고, 어떤 말은 한달동안 중요한 말이 있다. 어떤 말은 일년 동안 중요한 말이 있다.

그렇지만 영원히 중요한 말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 말씀은 말 더하기 숨으로 이루어진 말씀이다. 말 속에 숨이 들어있다. 말 속에 생명이 담겨져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말씀은 곧 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 성경에 보면 죽음이라는 말이 창세기 2:17에 가장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말씀을 받아드리면 살지만 말씀을 거부하면 죽음을 의미한다. 성경에 나온 죽음에 관한 최초의 단어가 사고로 죽는 것도 아니다. 병으로 죽는 것도 아니다. 자살로 죽는 것도 아니다.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죽는 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성경의 구조를 보면 말씀의 소중함을 그대로 가르쳐 주고 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말씀을 모세오경 혹은 토라라고 부른다. 그 다음에 여호수아이후의 책을 예언서라고 부른다. 여호수아와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로 이어지는 성경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세오경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 데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기록한 말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세오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는 말씀 중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잘 되고, 불순종하면 어려움이 닥치게 된다. 이 중요한 말씀의 내용이 사사기를 통해서 선포되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신약을 보라.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행하심과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에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보라.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의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같이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을 반복하고, 다시 강조하며 교회의 역사가 흘러왔다. 지난 교회의 역사를 보면 말씀이 살아있을 때에 교회가 살고, 교회가 부흥되고, 성도들의 믿음이 성숙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강단에 말씀이 죽고, 말씀이 힘을 잃어버릴 때에 교회가 쇠퇴하게 되고, 교회가 문을 닫게 되는 위기까지 경험하였다. 교회의 역사에 중세를 지날 때를 암흑기라고 말한다. 그 당시에는 교회의 강단이 힘을 잃었다. 루터는 말하기를 교회가 혀를 잃었다고 강력하게 표현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자들이 말씀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말씀의 강단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역사를 가져왔다.

우리 교회가 다음 주에는 새로운 성전으로 입당하게 된다. 우리 교회는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말씀의 능력으로 생명을 살리고, 말씀의 능력으로 위로를 얻고, 말씀의 능력으로 소망을 얻고, 말씀의 능력으로 축복을 받고, 말씀의 능력으로 헌신하고, 말씀의 능력으로 최후 승리를 경험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먼저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야 한다. 예배당을 지으면서 느끼는 점이 많다. 복도에 셔터를 설치하는 것을 보았다. 잘 몰라서 왜 이 복도에 이렇게 셔터를 만들어서 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겠는가? 얼마나 무식한 질문이란 말인가? 그것은 방화문이라고 하는데 불이 나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도록 자동으로 문이 내려오게 되어 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통행에 전혀 지장이 없다. 그 다음 부터는 다른 큰 건물에 가봤더니 층마다, 큰 통로마다 방화 셔터가 있는 것을 보고서 그 눈이 열렸다. 보기는 보아도 방화셔터가 감춰져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방화문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셈이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하듯이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야 한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 듣게 하시도다.” 본문의 말씀은 학자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학자는 곧 공부하는 학생이다. 시험을 앞에둔 공부하는 학생들은 얼마나 신중하게 듣는가? 얼마나 관심있게 듣는가?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는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있는 교회이다. 설교하는 설교자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서 시대를 통하여 무엇이 필요한지 듣고, 성경을 통하여 영적인 감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있어야 한다.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야 한다.

노아시대를 보라. 죄를 얼마나 많이 짓는지 하나님께서 인간 지으심을 한탄하셨다.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 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방주를 만들라.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리라.” 노아는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렸다. 당시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닫혔지만 노아는 귀가 열렸다. 말씀의 능력이 결국에 노아를 살렸다.

이 시대에는 귀가 열린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귀가 열려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고, 교회가 살고, 이 나라가 살고, 나의 가정이 산다. 사랑하는 성도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라.

다음으로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는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옵소서.”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려면 나의 말로 인하여 곤고한 자에게 용기를 주어야 한다. 넘어져 힘들게 살아가는 자에게 일어설 수 있는 용기의 말을 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내가 옆의 성도에게 하는 말에 따라서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될 수도 있고, 말씀이 죽은 교회가 될 수도 있다. 나의 말로 곤고한 자를 도와주면 그 교회는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요, 나의 말로 주변의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면 나도 모르게 교회에 상처를 주는 것이다.

어떤 관광객이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관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구경하다가 목이 말라 폭포의 물을 떠서 맛있게 마셨다. “아, 물맛 좋네!”하고 걸어 나오던 그는 폭포 옆에 ‘포이즌’(POISON)이라고 쓰여 있는 팻말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독성분이 든 물을 마신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배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창자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동료들과 함께 급히 병원에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살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상황을 전해들은 의사는 껄껄 웃으면서 “포이즌은 영어로는 ‘독’이지만 프랑스어로는 ‘낚시금시’란 말입니다. 별 이상이 없을 테니 돌아가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의사의 이 말 한 마디에 그렇게 아프던 배가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한가?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서 말씀을 잘 들었으면 나의 말을 통하여 주변의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하고 힘을 주는 말을 해야 한다. 야고보서의 말씀에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가 아주 작지만 불과 같아서 온 산을 태우고도 남는다. 반대로 말하자면 혀의 영향력이 있어서 나의 혀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겠는가?

한 소년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미술 시간에 크레파스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교사는 충혈된 눈으로 “도대체 몇 번째냐?”며 다그쳤다. 소년은 어려운 형편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교사는 침묵하는 소년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고함을 질렀다. “다음부터는 훔쳐서라도 준비물을 가져오너라” 그후로부터 17년 후 이 소년은 법정에 서게 되었다. 지존파의 대부 김기환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진술은 이러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을 이렇게 바꾸어놓았습니다.”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우리 교회가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려면 학자의 혀를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옵소서.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하자.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되자.
이상적인 조직은 단점을 교정하기 보다는 장점을 강화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 교회가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 은혜로운 교회가 되려면 주변의 사람들의 단점을 들추어 내기 보다는 그의 좋은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장점을 강화할 때에 말씀이 살아있는 좋은 교회가 된다.

그러면, 우리가 듣는 말씀은 무엇이며, 우리가 전해야 할 말씀은 무엇인가? 본문을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네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고통 중에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모진 고통을 당하신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도다.” 고난 받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고난의 아픔 속에서도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리라.

영적인 귀가 열려야 한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야 한다. 그 말씀은 곧 고난 중에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우리가 전해야할 말씀도 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곤고한 자를 만나거든 고난 중에 하나님이 당신이 도와 주십니다.” 이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교회는 담임목사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영적인 민감함으로 고난 중에 도우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과감하게 고난 중에 하나님이 당신을 도와 주신다는 말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아끼지 말아야 한다.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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