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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고난주일] 그 이름을 위하여 (행 5: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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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 설교 : 김성덕 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Palm Sunday)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셨을 때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 호산나 다원의 자손이여 ] 하고 환호를 하던 사실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시작하여 다음 주일인 부활주일까지
이번 한 주간을 수난주간 또난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여
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했던 수난의 한 주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특별새벽기도회를 드립니다.
의미 있는 종려주일과 고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주의 사자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와 사도들은
하나님의 명대로 새벽같이 성전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주된 관심은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는
많은 고난이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예수를 위한 고난을 각오하는 은혜의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의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듣고 공회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사도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자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당시 공회원들은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는데 왜 크게 노하여 죽이려고 까지 합니까?
자기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아 죽이기로 결의하였기에
그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된다면
그들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지만
그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살인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사도들의 입을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배후에는 사단이 장악하여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요한계시록에서 이러한 유대인의 회를 사단의 회라고 합니다.
계2:9절 [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
오늘날도 사단은 끊임없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기는 하되, 십자가는 증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는 것만 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까지도 고난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무언가 예수를 잘 못 믿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 당시 대제사장이 주도하는 공회가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이 예수 십자가를 증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잘 믿으면 복 받는다
하나님 잘 믿는 것이 성전에 제사 잘 드리고 예물 잘 바치고
공회의 결정을 잘 따르는 것이다.
대제사장을 공경하십시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저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이런 설교만 했더라면
공회가 후원회를 조직하여 사도들의 뒤를 봐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증거가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밖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고 하니
얼마나 듣기에 거북한 말이었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귀에 듣기 좋은 메시지는 아멘 하지만
네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밖아 죽였다
네가 무관심하고 외면하고 시기하고 거역하는 예수라고 하면
혹 우리도 공회원들과 같은 반응을 하지않을지..........

전도를 해보면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번은 용산동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있는데
한 청년이 오더니 나 보고 하는 말이
[ 어~! 예수, 니 오늘 내한테 죽어봐라 ] 하면서 주먹을 들어요
건데 제가 쉭~! 웃으니 멋적는지 그냥 내 앞에 전도하지마, 하고 그냥 가요.
왜 이렇게 싫어하고 적대감을 가지고 나아가 왜 이렇게 분노를 합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탄이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를 싫어하고 거역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의 배후에는
영적인 세력인 사탄이 조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3>
제사장 바리세인 사두개인들
나름대로는 신앙적으로는 한가락하는 거물급 인사들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사탄이 조종을 하니 예수를 죽이고도 모자라
그의 제자들 마져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 가운데 놀라운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34절에 바리새인 중 가말리엘이란 교법사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이라고 하니 예수님을 괴롭혔던 바리새인들 때문에 선입감이 좋지 않지만
사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서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강론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결심한
아주 존경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교법사란 말은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말입니다.
율법을 가르치려고 하면 얼마나 율법을 공부하고 연구했겠습니까?
그는 또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 사람을 존경합니까?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존경을 합니다.
남들보다 탁월한 지혜와 능력과 용기를 가진 사람을 존경합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위해 헌신할 때 존경합니다.
이와 같이 가말리엘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했듯이
자신이 가마리엘 문하에서 배운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듯이
학문에 있어서도 높은 수준의 지성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교법사 가마리엘이
공회 중에 일어나서 사도들들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는
공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35절 이하에
[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약 400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들이 다 흩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그 후 호적할 때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들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 고 하면서
베드로와 사도들을 인민재판 하려는 것을 막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가마리엘을 생각하면서 <4>
몇 가지 교훈을 깨닫게 하는 인물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1) 가말리엘은 존경받는 지성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지성인들은 많이 있지만 존경받는 지성인들이 흔치 않습니다.
어제(19일) 최영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부동산 투기의혹과 관련, 취임한 지 불과 두 달 보름여 만에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고위공직자가 불투명한 재산형성 문제와 관련해 사퇴한 경우가 지난 1월 이기준 교육부총리와
이달초 이헌재 경제부총리를 포함해 올 들어서만 벌써 3번째입니다.
이번에도 청와대 반응이
[ 글쎄, 옛날 것 다 들추어내면 온전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 합니다.
이것이 이 나라 현실입니다.
지성인들은 많은데 존경받는 지성인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2) 가말리엘은 역사의식을 가진 지성인입니다.
드다를 봐라 갈릴리 유다를 봐라, 불의한 자들 같으면 이렇게 다 망한다.
그러니 현재 일어난 사건만 가지고 판단하지 않고
역사를 돌아보면서 오늘의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하는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지성인인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나라의 지도자는
반드시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통령은 정치학보다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이 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봐도 역사라는 것은 수레바퀴로서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역사의식을 갖고 신앙생활을 해야 바로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40년 광야생활 같은 발자취는
그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역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3) 가마리엘은 양심을 가진 지성인입니다.

38-39절에 보면 가말리엘이 공회원들에게
드다와 갈릴리 유다의 사건을 예를 들어 말하면서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
그는 자신의 신앙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했습니다. <5>
사람마다 양심은 다 있지만 그 양심을 표현한다는 것 그리 쉽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를 역대 어느 정부보다 강조하는 참여정부라 하지만
오죽 하면 양심선언하면 불이익을 당하는 세상이라고 합니까?
가말리엘은 이 양심선언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그에 대한 신뢰심과 존경심이
공회 안에서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을 두둔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두둔하는 것이고 체제를 부정하는 발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양심을 가진 지성인이 있다면 그래도 그 사회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불교계의 큰 별이라고 불렀던 성철 스님 1993년 11울 4일에 입적을 하셨는데
마지막 입적하기 전에 제자들이
[ 스님, 한 말씀만 여쭈겠습니다. ] [ 뭐를? ]
[ 일천 삼백만 불자가 있는데 그 불자들에게 한 말씀만. ]
[ 한 말씀만? 내 말에 속지마라. ]
[ 내말.?] [ 내말 말이여. 내 말한테 속지말어. 나는 늘 거짓말만 하니까. ]
참 불교에서 말하는 큰스님 맞기는 맞습니다.
양심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십 년 동안 눕지 않고 앉아서 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0년을 옷 두 벌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가르침에 수좌 5계가 있는데 - 도 닦는 자의 계명이지요
첫째로 잠 많이 자지 말라, 둘째로 말 많이 하지 말라,
셋째로 책(경전)을 보지 말라, 넷째로 간식하지 말라,
다섯째로 돌아다니지 말라.
참 초인적인 삶을 살았던 분이십니다.
그는 이 시대의 양심적인 성직자임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가말리엘에 대해 몇 가지 교훈을 말씀드렸는데
본문을 통하여 그리고 성철스님 이야기를 통해 제가 깨달은 은혜는 이 보다 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십 년 동안 눕지 않고 앉아서 잠자야만 구원받는 다면
나는 죽어도 구원받지 못하겠구나.
그리고 그렇게 도 닦아도 깨닫지 못했던 구원을
내가 어찌 깨닫고 구원받을 수 있었는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또 한가지는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한 가말리엘이 몰랐던 예수 생명 그리고 성령의 역사
오늘 우리가 믿고 눈 뜨여진 것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가말리엘의 충고를 들은 공회가 그 권위와 자긍심 때문에 <6>
마지못해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은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감옥에서 나온 것 때문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롭게 풀려나서 그들이 기뻐한게 아니라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만약 감옥 밖에 나와서도 예수를 전할 수 없었다면
그들은 다시 감옥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전도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전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이나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오직 예수 그 이름을 위하여 어떤 고생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 그 이름을 위하여 ] 능욕을 받는 자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바로 고난입니다. 눅9:77절- 고난 각오하라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는 고난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한 번도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아 보지 못했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모함도, 오해도, 손해도 본 경험이 없다면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치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 안에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은 많은데
예수를 위해 고난을 각오하라고 하면 거부합니다.
교회 와서도 편하기만 하려고 하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 이름을 위해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은
교회 와서 오해도 받아보고, 속도 상해보고
그러면서도 참고 말하지 않고 구차히 변명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 받는 것입니다.
아마 사도들은 사십에 하나 감한 유대인의 태장을 맞으면서
예수님의 산상보훈 마5:10절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이 말씀을 떠올리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7>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작곡가 <하이든>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 당신이 작곡한 교회 음악마다 한결같이 기쁨에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 <하이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나는 이런 곡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
①하나님께서 내 가슴을 뛰게 하시는데
내 음악이 기쁨에 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②하나님께서 내 펜을 움직이시는데
내 펜이 기쁨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③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시는데 나에게서 슬픈 음악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기쁨은 주님을 섬기는데서 옵니다.
우리의 기쁨은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데서 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로 행복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사실로 행복합니다
신음소리로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탄식하며 불평하며 섬기는 것은 자녀들의 도리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노예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 감격의 종교, 행복의 종교입니다.
여러분! 진정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계십니까?
오늘 진정 주님을 위해 헌신하므로
주님을 위해 때로 고난과 역경 속에 있음으로 진정한 기쁨을 맛보셨습니까?
괴로우십니까? 주님 때문에 괴롭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외로우십니까? 주님 때문에 외롭다면 당신은 기쁨의 사람입니다.
[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 고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1) 욕심에서 오는 보응이 있습니다.
약1:14절 [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
이럴 때는 회개를 하면 회복이 됩니다.
2) 믿음의 시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릇으로 사용하려고 하니 깨끗한 그릇 만들려고 믿음의 연단을 시키는 것입니다.
능력있는 일군 만들려고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약1:3절 [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앎이라 ]
3) 사명의 고난이 있습니다. <8>
바로 오늘 사도들이 당한 고난입니다.
이럴 때는 되려 기뻐해야 합니다.
벧전4:13절 [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에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하심이라 ]
오늘 사도들과 같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은
우리가 진짜 예수꾼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죄의 보응이든 믿음의 시련이든 사명의 고난이든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내가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불가사의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해결의 열쇄를 갖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렇게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을 합당히 여기며
예수를 위해 사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42절 [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
예수 이름을 위해 사는 자는
1) 날마다 전도한다고 합니다.
2)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전도한다고 합니다.
3) 예수가 주시라고 전합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예수를 전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011전화 선전문구가 기억나네요.
[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스피드 011 ]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116오직 전도폰이 되시기 바랍니다.

간혹 노방 전도하는 전도인들을 봅니다.
그런 전도자들을 창피스럽게 여기지 마세요.
그들을 통해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느 간증집을 보니 그런 글이 있었습니다.
죽기를 결심하고 전철을 타던 여인이
그 전철 속에서 전도하던 어떤 사람의 애절한 전도 한마디에
[ 그래 왜 내가 교회를 멀리 했나? ]
옛날 학생 때 다닌 그 교회를 다시 다녀보자 하고 그 길로 교회를 찾았다고 합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116오직 전도폰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드라마도 있고 <9>
노래가 한동안 유행을 했는데 그 가사가 의미가 있네요.
사랑은 아무나 하나,가 아니라 전도는 아무나 하나?
저는 오늘 우리 성도들의 예수관이 완전히 변화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예수가 나의 주시고 우리의 임금이라는 사실에 눈이 뜨여지기를 축원합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최대의 기쁨이요 행복이라는 사실에 눈이 뜨여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 전도할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매를 맞아가면서도 기뻐하며 전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했듯이
우리도 116오직 전도폰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사도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는 모습을 한 번 그려봅시다.
그리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전천후 전도하는 모습도 새겨봅시다.

아무나 그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그 이름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이 되면
아무나 그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고
아무나 그 이름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 받아 예수관이 바뀌어져
두들겨 맞아도 고난을 당해도 행복해 하는 예수의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붙잡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오는 것입니다. 행복한 전도자가 되기로 결심합시다.

미국의 베스트셀러작가인 <헤롤드 쿠스너>는
인생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목표라고 믿고 있습니다.
[ 당신이 행복을 추구하는 한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대신 의미 있는 일은 행하는 삶을 살 때야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 쿠스너는 행복을 부산물로 보았지 결코 주된 목표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행복이란 나비와 같은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 행복을 잡으려 들면 그것은 당신에게 달아나 외진 곳에 숨을 것입니다. 반면에 당신의 삶에 꽃을 피운다면 행복은 절로 날아올 것입니다. ]
나의 삶에 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름을 위해 고난 받는 삶입니다.
그 고난 뒤에는 반드시 영광이 찾아올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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