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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고난주일] 아버지여! (눅 23: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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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 1
1369년 어느 날, 유럽의 작은 나라 보헤미아의 남쪽 어느 작은 마을의 가난한 가정에서, 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가난했지만 매우 총명했던 이 아이는, 다행히 교회에서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아이가 난로 옆에 앉아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읽던 중,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난로 불 속에 집어넣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아들의 몸을 끌어 당겨 큰 화를 면하긴 했지만, 놀란 어머니를 향해 이 아들은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정도로 순교의 고문을 견딜 수 있을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교회 성가대에서 성실하게 봉사하며,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이 아이는 프라하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 마침내 신부가 되었고, 교수의 직분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의 강의는 점점 더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고, 당시 지식인들의 열렬한 지지와 환영을 받으며, 마침내 그 대학의 학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서른네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존 후스였습니다.

# 2
얼마 후 그는 프라하에 있는 베들레헴 성당의 주임 신부로 임명됩니다. 도시의 유력 인사들이 많았던 그 성당에서, 그는 라틴 어 대신 자신의 모국어로 기도하며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존 후스의 신념이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베들레헴 성당으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저들은 자신들의 모국어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의 종교적 독립을 선언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당시 보헤미아 교회를 포함한 전 세계 교회는, 로마 교황청에 종교세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수이며 젊은 신부였던 존 후스의 눈에 로마 교황청은 타락과 부패의 온상일 뿐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저런 로마 교황청에 종교세를 바쳐야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로마 교황청을 비판하는 설교를 시작합니다.

<로마의 많은 성직자들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성도들에게서 거둔 종교세로 너무나 넓은 땅과 너무나 많은 건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들 가운데 최소한 세 명 이상의 추기경은 돈으로 그 자리를 얻었으며, 그런데도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대리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 바치는 연보의 동전소리를 들으면서,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3
그러던 중, 존 후스는 위대한 스승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 박사였던 존 위클리프였는데요, 그의 저서들이 프라하에 소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위클리프 박사에 대한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교회 일각에선 그를 이단이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해서 그도 처음엔 편견을 가지고 그의 저서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존 후스는 점점 더 위클리프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위클리프 박사는 당시 타락한 성직자들의 부패상을 고발하면서, 저들을 향하여 세속적인 권력을 포기하고 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충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위클리프 박사의 이 한 마디가 존 후스 교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신부의 말 보다 성경의 말씀이 더 우선한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세계의 모든 언어로 번역하여 성도들이 직접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존 후스는 곧바로 그의 저서를 교회와 대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점점 더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그에게로 몰려와 그의 강의와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 만큼 그의 영향력도 커져만 갔습니다.

# 3
그러나 이내 사탄의 방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프라하의 대주교가 프라하 대학에 있는 위클리프의 책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양심적인 학자요 말씀에 철저했던 존 후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프라하 대학은 학문의 자유가 보장된 대학으로 소문이 나있었고, 해서 전 세계로부터 젊은 지성들이 몰려오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프라하 대학에서, 이런 반지성적인 사태가 벌어지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그는 프라하의 대주교를 반대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그 주변에 대주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만의 힘으론 역부족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의 지령을 받은 저들은 끝내 위클리프의 책을 거두어 모조리 불태웠던 것입니다. 그 책들을 태워버리던 날, 양심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 존 후스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불가지고 진리를 태울 수는 없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남에게 그 어떤 해도 주지 않는 물건을 향하여 화를 내는 것은, 소인배들의 소치입니다. 불로 진리를 태울 순 없습니다.>

그 사건 이후, 존 후스는 보헤미아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요 종교적인 지도자로 부각되었습니다. 특히 중세의 암흑기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개혁의 대표주자로 각인되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동료 교수들로부터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또한 봉건 영주들과 귀족들까지, 그리고 보헤미아 왕과 여왕까지도 교회에 나와 그의 설교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보헤미아에 새 역사가 시작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로마로부터 보헤미아 왕가에 압력이 가해졌고, 결국 왕과 여왕은 이 용감한 교수를 공적으로 지지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 4
그러던 어느 날, 심각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존 후스가 가르치던 대학의 학생 셋이서, 로마 교황청을 대변하는 모 신부의 설교를 듣던 중, 중간에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저 신부의 말은 거짓말!>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문제는 거짓말을 거짓말이라 한다 해도, 예배 중에 그렇게 소리치는 건, 당시 교회법에 저촉되는 행위였습니다. 결국 그 학생들은 곧바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 학생들의 부모가 존 후스 교수를 찾아 왔습니다. 교수님만이 아이들을 구해낼 수 있을 것 같으니 어떻게 손 좀 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존 후스는 그 길로 당국자들을 찾아가 호소했습니다. 그런 존 후스 교수를 향해 담당 판사는, <대학교의 교수가 학생들의 반역을 공개적으로 옹호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충격을 금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그래도 교수가 와서 선처를 호소하니, 관용을 베풀어 주겠노라 약속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정해진 날, 프라하 시민들 모두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용감한 학생들을 맞이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관용을 베풀겠다고 약속했던 치안 판사는, 그 학생들을 뒷문으로 끌고 나가더니,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불의 앞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시대의 모순을 탓하는 수밖에 달리 어찌 할 길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 존 후스 교수는 오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부모와 시민들도 한이 가득한 마음으로 모두 오열하며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그 자리에서 존 후스는, 아무리 억울해도 폭력적 방법으로 악을 응징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더 높은 재판소에서 저들이 재판받게 하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 5
인간의 잔혹함과 비정함에 극도로 실망한 존 후스, 그 길로 낙향하고 맙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공기를 벗 삼아, 다시 한번 존 위클리프 박사의 책들을 정독하며, 어떻게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지 심사숙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난 프라하에선 여전히 존 후스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식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존 후스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기운이 보헤미아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감지한 로마 교황청에서 프라하의 추기경에게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보헤미아의 이 선동가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서슬 퍼런 교황청의 추궁에 프라하의 추기경은 이렇게 답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엄격하고 근엄합니다. 그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야 할 성도의 표본이며, 또한 불의를 멀리하는 삶의 표본이기에 그 누구도 그를 비난하거나 그에게 대항하지 않습니다. 또한 키가 크고 수려한 용모를 지닌 그를, 모든 사람이 사랑하며 추종합니다. 특히 천한 사람들까지 구제하려고 애쓰는 그를 사람들은 성자라고 부릅니다. 어리석은 일임에 분명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저들은 그가 성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답신 가운데 <성자>라는 단어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이 건방진 가짜 성자가 진짜 성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증명해야 한다.> 결국 프라하의 추기경이 써 보낸 답장의 단어 하나를 빌미로, 로마 교황청은 존 후스의 파문을 명합니다. 그는 이제 파문당한 신부가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설교를 할 수도 없게 되었고, 세례를 줄 수도 없게 되었고, 장례식을 집례 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염려하여, 당분간 설교도 하지 말고, 글도 쓰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 자신의 신앙적 용기를 시험하기 위해 난로 불 속에 손을 집어넣었던 그를,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존 후스 교수의 말입니다. <내가 설교하기를 그만 둔다면, 나는 마지막 심판 날에 죄인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순 없습니다. 설령 설교를 하다가 화형을 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계속 설교할 것입니다!>

# 6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습니다. 로마 교황청이 그를 종교 재판에 회부하고, 재판정에 출두하라는 소환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에게 내려진 죄목이었습니다. 존 후스 교수를 소환한 죄목은, 당시 가장 무겁고, 가장 치명적이요, 해서 가장 무서운 형벌이 가해지던 <이단> 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재판 장소가 보헤미아의 프라하가 아닌 스위스의 <콘스탄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보헤미아에서 재판을 열 경우, 그의 추종자들이 소란을 피울까 염려한 까닭이었습니다.

소환 명령에 가장 놀란 것은 그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존 후스의 성격에 소환에 응할 것이 명확했고, 해서 스위스로 갈 경우, 처형당할 것이 또한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해서 존 후스를 사랑하는 저들은 그에게 가지 말 것을 권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보헤미아의 용감한 기사들도 존 후스의 집으로 몰려와 그를 보호하겠다고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그대로 계십시오. 우리가 끝까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존 후스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나는 스위스로 가야 합니다. 가서 내가 발견한 진리를 변호해야 합니다. 난 스위스로 갈 것입니다!>

스위스 <콘스탄스>에 도착한 그는, 그 옛날 바울이 그리했던 것처럼, 가장 먼저 거리로 달려 나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설교할 권리를 박탈당한, 로마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신부였습니다. 그런 그를 <콘스탄스>의 주교와 시장이 비공식적인 자리에 불렀습니다. 식사나 한번 하면서 당신의 소신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식 재판에 그를 세우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올가미를 씌워, 먼저 그를 투옥하려는 음모였습니다.

결국 그는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주교와 시장 앞에서 이단 사설을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절친한 친구 출럼 경이, 간교한 추기경과 시장에게 달려가 이는 불법이라고 항의해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추기경들은 출럼 경을 바라보며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한심한 노릇은, 공정한 재판과 신변의 안전을 약속했던 로마의 황제마저, 콘스탄스에 도착하자마자 존 후스를 이단자라고 선언하고 말았던 점이었습니다. 자기 말을 번복한 로마 황제의 구차한 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단자에게 한 약속은 지킬 필요도 없고, 또한 이단자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실제는 로마 교황청의 힘에 밀린 황제의 구차한 변명이었습니다.

# 7
거짓은 항상 진리를 두려워하는 법, 존 후스 교수를 시민들과 가까이 두는 것조차 두려웠던 추기경들은, 그를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호수가의 도미니카 수도원으로 이송했습니다. 비겁하게도 저들은 존 후스를 감방에 가둘 때조차 쇠사슬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착고>를 차고 지하 감방에 던져졌던 사도 바울처럼 말입니다.

호수가의 감방은 더러운 냄새와 습기와 온갖 벌레와 질병으로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열병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잔혹한 저들은 그가 죽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듯이 아픈 데 죽지도 못하는 처참한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존 후스는 끊임없이 공식 재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이단자와의 모든 대화를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재판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외롭고 처참한 겨울은 깊어만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존 후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를 위로하러 오는 동료 신부들에게, <나는 내 양심에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고 내 조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렵사리 구한 종이에는 이렇게 글을 적어 고국으로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보헤미아 동포들이여!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위하여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 8
그렇게 겨울이 가고 드디어 봄이 왔습니다. 마침내 존 후스 교수에게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일말의 기대를 안고 재판정에 나간 그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그를 고소한 세 명의 고소인들이었습니다. 한 때 가장 절친했던 친구 셋이 거기 고소인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이미 많은 액수의 돈에 매수되어 있었고, 높은 지위를 약속받은 상태였습니다. 그 재판정에서, 자신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했던 내용을 인용하면서, 거꾸로 자신의 이단성을 증명하기 위해 열을 올리는 한 때의 친구들을 바라보며, 존 후스 교수는 친구에 대한 배신감과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감에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세 명의 친구들과 로마 교황청의 사주를 받은 수백 명의 박사들이, 마침내 존 후스 교수의 이단성을 연구한 결과를 가지고 마지막 논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존 후스는 이미 이단으로 정죄된 위클리프의 서적을 읽고, 그의 이단 사설을 가르쳤으며, 보헤미아 대학을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에서 독립시키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로 하여금 상관에 대항하도록 선동했으며, 더 나아가 시민 혁명을 선동했다!> 이것이 선고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존 후스 교수는, 자신을 고소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르친 것은 시민 혁명이 아니라 정신적인 재무장입니다. 형식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각 개인의 의로움을 강조한 것뿐입니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 내가 가르친 내용 중 성경 말씀과 위배되는 것이 있으면 정확하게 말해 보시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당장 나의 가르침을 취소하겠습니다.>

그러자 판사의 추궁이 이어졌습니다. <당신은 당국의 권위를 무시했소. 도대체 누구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거요?> 존 후스 교수가 대답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양심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소!> 그러자 이번엔 거기 모인 군중들이 야유를 퍼붓기 시작합니다.

판사가 군중들을 향해 조용하라 하더니 계속해서 추궁합니다. <그러나 여기 수백 명의 훌륭한 박사들이 너의 가르침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소. 당신은 당신 자신만이 이 모든 박사들과 또한 교회의 공의회 보다 더 현명하다고 주장하는 거요?> 그러자 존 후스 교수가 다시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대답합니다. <당신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요. 나는 하나님과 나의 양심에 호소하는 바이요!>

그러자 이번엔 다시 군중들이 야유를 퍼부으며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군중들처럼,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덤비던 군중들처럼 말입니다. 결국 재판은 중단되었고, 그는 감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 8
다음 날, 저들은 존 후스를 다시 재판정에 세웠습니다. 이번엔 로마 황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존 후스는 잘 들어라! 이제 내가 자네에게 마지막 친절을 베푸노라! 공의회에 복종하도록 하라. 너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고백하면 가벼운 벌만 받고 풀려나게 해 주겠다. 이것이 마지막 충고이다!>

존 후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를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해서 그를 찾아가 로마의 황제와 교황청이 요구하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간청했습니다. 로마 교황청도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이 문서에 서명하기만 하면, 사면 복권은 물론, 앞으로 상당한 지위와 부귀를 보장하겠다고 제안해 왔습니다. 그 때마다 존 후스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여!> 결국 존 후스는 <죄인의 육체는 파괴되어야 한다!>는 마지막 선고를 들으면서, 화형을 언도받았습니다.

존 후스를 처형하던 날, 저들은 먼저 그의 옷을 벗기고, 그의 머리를 십자가형으로 삭발한 후, 악마를 그린 종이 모자를 그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그러자 존 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은 이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곧 이어 장작더미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쇠줄로 묶인 존 후스, 그는 자신의 몸을 태우려고 타올라오는 불길 속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옵니다!> 그렇게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따라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 9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주님, 그 분은 평생 아버지와 동행하신 분이셨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리고 죽기까지 그 뜻에 순종하며 충성하셨던 분, 마침내 그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이렇게 기도했었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 하나이다!>

그 후로, 12 사도들, 스데반 집사님, 사도 바울, 그리고 존 후스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다가, 아버지가 부르시는 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아버지께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아들과 딸이라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과 딸인 줄로 믿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하는 아들과 딸 말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한 평생 사시면서 늘 아버지와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하시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애쓰다가, 이 세상 떠나는 날, <아버지여!> 그 이름 불러 아뢰며,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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